회차 3
박정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아내가 이렇게 단호한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안서연이 나를 8년이나 사랑했고, 이런 협박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어. 그녀가 정말로 나를 떠난 적이 있었던가? 게다가 우리는 가짜 이혼을 하는 것이니, 이혼 증명서만 한 장 더 생길 뿐, 우리의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거야.'
"얌전히 있어, 나 진짜 피곤해. 서연아, 이제 투덜대지 마, 알았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안서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서류에 사인하고 일찍 자. 나 오늘 집에 안 들어올 거야."
극도로 화가 난 안서연은 오히려 마음이 평정되었다. 그녀는 싫은 듯 그의 손을 밀쳐내고, 합의서 옆에 미리 준비된 펜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박정훈은 그녀가 울지도, 떼쓰지도 않는 모습을 좋아했다.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마음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마음 한켠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그는 이런 불안감을 싫어하며, 재빨리 은행카드를 꺼내 안서연에게 건넸다.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나한테 주는 '보상'이야?" 안서연은 코웃음을 치며 카드를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빈 카드로 사람을 역겹게 하지 마."
박정훈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안서연은 손목이 아파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손을 빼냈다. "네 착한 엄마한테 물어봐. 네 카드가 그녀 손을 거치기만 하면, 잔액이 순식간에 0이 돼. 정말 신기하잖아?"
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객실로 향했다.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은 더 이상 무리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빨리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박정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옆에 선 오수궁 집사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 카드에 돈이 있는지 확인해 봐."
안서연은 밤새 눈을 감지 못할 줄 알았지만, 박정훈이 떠난 후 오히려 편안하게 잠들었다.
어쩌면 사람은 무언가를 잃을까 봐 걱정할 때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정말로 잃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갑자기 도려내진 것처럼 쑤시는 고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5시 30분, 익숙한 노크 소리가 정확하게 들려왔다.
"안서연, 빨리 일어나서 대통령님의 커피를 준비해." 이것은 비서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수궁 여자 관리인 백성민이 세 번이나 불렀는데도 안서연이 안 나오자, 결국 문을 열고 그녀의 이불을 걷어 올렸다.
초여름 아침의 기온은 낮았고, 하필이면 객실의 항온 시스템이 고장 난 상태였다. 이불이 걷히는 순간, 안서연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몸이 뜨거워 열이 난 것 같았고, 사지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다시 누워 쉬고 싶었다.
안서연이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우려 손을 뻗었을 때, "딱!" 회초리가 그녀의 손등을 내리쳤다.
이것은 오수궁 관리의 권한이었다. 그들은 단단한 회초리를 손에 쥐고 각자 관할하는 직원들을 훈계하고 교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서연이 박정훈을 따라 오수궁에 입주한 2년 동안, 백성민의 회초리는 그녀 한 사람만 때렸다.
백성민은 이민지가 오수궁에 집어넣은 아부꾼이었고, 그래서 항상 그녀를 괴롭혔다.
2년 동안 안서연의 손등은 수없이 부어올랐지만, 박정훈은 못 본 척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위해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참아 왔다.
"뭘 쳐다봐? 오수궁에서 일할 수 있는 건 너한테 엄청난 복이야. 그런데도 여기서 농땡이를 부려?"
백성민이 욕설을 퍼부으며 손에 쥔 회초리를 다시 내리치려는 순간, 안서연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회초리를 빼앗아, 백성민의 몸통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악! 악!" 백성민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객실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안서연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다시 끌어당겼다. 그리고 회초리로 그녀의 등을, 어깨를, 더 세게 내리쳤다. 안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전에 나 때릴 때 엄청 시원했잖아? 이번엔 너도 회초리 맞는 맛 좀 봐야지!'
"딱! 딱! 딱!"
안서연은 자신이 맞은 만큼, 참아온 만큼 돌려주려 했지만, 회초리가 그녀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퍽하고 부러졌다.
그제야 그녀는 백성민의 머리채를 놓아주며 소리쳤다. "꺼져!"
백성민은 객실에서 굴러떨어지듯 도망쳤고, 밖에서 기다리던 하인들은 그녀의 처참한 모습을 모두 보았다.
백성민은 당장이라도 안서연을 죽이고 싶었다. '이 천한 년, 두고 봐. 민지 아가씨가 오면, 너를 가만히 안 둔 거야!'
백성민을 혼낸 후, 안서연은 열이 더 심하게 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물을 한 잔 가득 마시고 이불을 꼭 끌어안고 다시 누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안서연은 이미 건장한 하녀 몇 명에게 끌려 박정훈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고, 이민지는 그의 곁에 앉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이민지는 얼굴을 붉히며 흐느끼듯 말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서연이는 나를 못마땅해했어. 그동안은 다 참았는데, 내가 백 관리인을 오수궁에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서연이가 아무 잘못 없는 그녀를 몹시 때리다니. 흑흑… 회초리가 부러질 정도로 때렸으니, 박 관리인이 얼마나 아팠겠어!"
백성민은 옆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대통령님, 이민지 씨. 모두 제가 무능한 탓입니다. 제가 부하 직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둘이 서로를 끌어안고 울기 직전 같은 그 순간, 박정훈은 이민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울지 마. 아이한테 안 좋아…"
아이를 언급하자 이민지는 더욱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백 관리조차 지켜주지 못했는데, 어떻게 애를 제대로 지킬 수 있겠어? 차라리 아이랑 함께 천국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과일 접시에 놓인 과일 칼을 잡으려 했다.
그 모습에 박정훈은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잡고 품에 꽉 끌어안았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내 말 들어."
"정훈아, 나 좀 놔. 서연이가 보고 있잖아. 서연이가 화나게 하면 또 난리 날 거야."
이민지는 박정훈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그의 품속에서 힐끔 안서연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그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