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정규환.."
그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칼날로 깊게 베며 파고드는것 같았다.
10년이라는 그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자그마치 10년을 바쳐 이 남자를 사랑했고, 온 마음을 다해 헌신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다른 여자를 맹신하고 보호하는 그의 모습 뿐이었다.
"그래, 경찰 불러!" 유소희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며 핸드폰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런 살인자는 경찰에 넘겨 콩밥 먹여야 되!"
그 소란 속에서 초설아는 백초아가 유소희의 손을 살짝 쥐는 장면을 목격했다.
둘은 짧은 순간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사인을 주고 받았다.
유소희가 순간 멈칫하자,
백초아가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규환 오빠, 오빠가 절 걱정해 주는 건 알지만, 이건 우리 가족 문제예요. 경찰을 불렀다가는 언니가 체포될 수도 있어요. 초씨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그런 일은.. 원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그냥 넘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백초아가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냥.. 이쯤에서 그만 없었던 일로 해요."
그 말에 초상호는 생각에 잠긴 듯했고, 정규환도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초설아를 노려보며 냉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지금 당장 사과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
부러진 갈비뼈의 고통이 점점 심해졌지만, 초설아는 이를 악물고 등을 곧게 세운 채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잔혹한 깨달음이 스쳤다. 자신의 고통이, 이들에게는 그저 한낱 구경거리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난 잘못한 게 없어! 결백하다고! 무릎 꿇지도 않을 거고, 사과하지도 않을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초상호가 무섭게 다가와 그녀의 뺨을 또 한 번 세게 후려쳤다.
초설아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휘청거렸다. 이미 지쳐 있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중심을 잡기도 전에, 무자비한 발길질이 날아왔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단단한 바닥에 무릎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무릎에서 가슴까지 찌르는 듯한 고통이 퍼져 나갔다.
초설아는 손바닥을 바닥에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가슴을 감은 붕대 사이로 피가 스며 나오더니 그녀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왔다.
초설아를 부축하러 달려간 간호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정규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록을 확인해 봤어요. 초설아 씨 남편 분 되시죠? 부부라면 서로를 보살펴야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구세요? 초설아 씨는 지금 부상이 심각하고 제대로 치료 받지 않으면 평생 후유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고요!"
"난 저렇게 악랄한 여자는 아내로 받아들일 생각 없어." 정규환은 바닥에 쓰러진 초설아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신발 바닥에 붙은 먼지를 보는 것처럼 혐오감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초설아,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초아는 착해서 용서해 줄지 모르지만, 넌 선을 넘었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해.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여기서 무릎 꿇고 있어!"
그리고는 주상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님도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보시죠?"
주상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자기가 한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아야지. 난 찬성일세."
그때,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가족들을 불러냈고, 병실 안에는 초설아와 백초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병상에 앉아 있던 백초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초설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바닥에 짚고 있었다. 백초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언니, 친딸이면 뭐해?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이나 꿇고 있는데. 난 규환 오빠가 좋아. 오빠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언니도 절대 가질 수 없어."
그 순간, 초설아는 왼손을 주머니에 살짝 밀어 넣어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초설아는 백초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불을 낸 게 너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