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초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혼인으로 하나가 된 그날, 하늘은 마치 분노를 터뜨리기라도 하듯 붉게 물들었다.
화려한 웨딩 드레스를 입은 초설아는 신랑인 정규환이 백초아를 품에 안고 불길 속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규환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거대한 천막이 무너져내리며 초설아의 몸을 짓눌렀고, 그 안에 갇힌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이 점점 막혀 오고, 눈앞이 흐려졌다.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공기 속에, 초설아는 숨을 쉬기 위해 애를 썼다.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그녀는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희망이 사라질 것만 같던 순간, 연기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탄탄한 팔이 초설아를 가볍게 들어올렸고, 그 사람의 안정적인 심장 소리가 들려오면서 혼란 속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무언가가 타는 듯한 끔찍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두려움과 혼란으로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가운데, 초설아는 눈을 뜨려고 애를 썼지만, 시야를 가리는 연기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던 그녀의 손가락에 끈적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녀를 안고 있던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몸에 힘을 빼고 그녀의 손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거센 바람이 그녀의 귀를 때리며 차갑고 불어왔다.
그렇게 얼굴을 달구던 뜨거운 열기도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초설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며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려 애썼다.
연기 속에서 문득, 남자의 눈가에 있는 작은 점을 발견했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순간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급차가 도착했습니다. 초씨 가문은 이미 모두 탑승했고, 저희도 서둘러야 합니다. 팔의 부상이 심각합니다. 게다가 오늘은 초설아 씨의 결혼식 날인데..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들키면 여기저기 이상한 소문이 퍼질 겁니다."
... ...
초설아는 차가운 병실에서 홀로 눈을 떴다.
창밖에는 커다란 달이 침울한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방은 고요했고, 그녀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부상은 심각했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왼쪽 뺨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의사는 잘 관리하지 않으면 얼굴에 영영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며 경고했다.
날이 밝자, 담당 의사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병실을 찾았다.
그는 텅 빈 방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가족들은 다 어디에 계신가요?"
초설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규환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괜히 몸을 함부로 쓰면 부상이 더 악화될 수도 있어요. 보호자가 없으시면 간병인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젊은 간호사가 끼어들었다. "혹시 뉴스에 나온 그 화재 사건의 신부님 아니세요? 남편 분은 왜 같이 안 계세요?"
그 말을 들은 수간호사가 조용히하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위층에서 다른 분을 돌보고 계셔."
젊은 간호사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 여자는 손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잖아요!"
정말로 돌봄이 필요한 건 초설아였다.
수간호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온 팀들이 다 붙어서 그 여자를 케어하고 있어. 참 불공평해, 그치?"
그 순간 초설아는 치욕과 절망에 사로잡혔다. 병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는 피가 얼어붙는 듯 몸이 살짝 떨렸다.
그러더니 벽에 기대며 힘겹게 일어나 위층에 위치한 VIP 병실로 향했다.
문 앞에서 멈춰 선 그녀는 자신이 10년 동안 사랑해 온 남자가 자신의 의붓 동생인 백초아에게 밥을 먹여 주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 둘은 깊은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계모, 유소희는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상호 씨, 이게 다 제 업보일까요? 내 지난 과오가 우리 딸을 괴롭히는 걸까요?"
초설아의 친아버지이자 유소희의 남편인 초상호가 유소희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아니야, 단지 운이 나빠 일어난 사고일 뿐이지, 당신 잘못이 아니야."
"아빠! 이건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에요! 설아 언니는 아빠와 규환 오빠가 저를 더 아낀다고 항상 질투했어요. 이건 다 언니가 꾸민 일이라고요. 화재 현장에 우리 둘밖에 없었는데, 언니가 저를 밀쳤어요. 절 죽이려 했어요."
말을 마친 백초아는 정규환의 품에 안겨 오열했다.
유소희는 딸의 긁힌 손을 바라보며 초상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더니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상호 씨, 초아가 당신 친딸은 아니지만, 여태껏 당신을 친 아빠로 여기면서 살아왔어요. 그런 마음이 우리 초아한테 이런 사고로 돌아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설아를 위해서 난 모든 걸 포기했어요. 당신과 결혼한 후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고요. 하지만 설아는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네요. 도대체 저한테 어디까지 바라는 걸까요? 내 모든 걸 다 가져가도 좋아요, 내 목숨까지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초아가 왜 고통 받아야 하죠? 초아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유소희가 너무 애절하게 오열하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초설아가 아닌 유소희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얼굴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밖에서 몰래 지켜보던 초설아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모두 듣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두 남자인, 아버지와 남편이 백초아에게 온 신경을 쏟으며 자신을 감싸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다. 고통에 짓눌린 채, 그녀는 천천히 병실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아버지마저 함께 잃은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남편은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생각에 초설아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것 같았다.
운명은 그녀를 잔인하게 배신했다.
어둠이 깔릴 무렵, 정규환이 음식 용기를 들고 그녀의 병실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문턱에서 멈춰 서서, 병실 안의 공기마저 혐오스럽다는 듯한 날카롭고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차갑고 공허한 눈빛이 그녀를 꿰뚫었다.
초설아는 애써 몸을 일으키며, 절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맹세컨대, 난 백초아를 밀지 않았어. 초아가 나한테 결혼 선물이 창고에 있다고 했어.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불길이 일어났고, 문은 밖에서 잠긴 상태였어."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정규환은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초설아, 이제 그만 좀 해. 네가 사람들한테 사랑 받는 초아를 늘 질투했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리 결혼식까지 망치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 네가 이렇게 괴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차 2
초설아는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정규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병실에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창고에 CCTV가 있었어. 불 때문에 카메라가 망가졌을 수는 있지만, 영상은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야."
"그만해!" 정규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초설아를 노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겠다고 변명만 늘어놓는구나. CCTV 영상이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어. 네 입에서 나오는 말, 단 한 마디도 믿을 수 없어. 너 같은 여자 말을 어떻게 믿어!"
초설아는 정규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마치 상대방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초설아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 하지만 결국, 이렇게 끝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당장 초아한테 사과해!"
그의 목소리가 차가운 바람처럼 공기를 가르며 초설아를 덮쳤다. 그녀는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이 싸늘해졌다.
"당신 아내는 나야!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야?" 초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상처받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초설아, 초아한테 당장 사과하라고! 만약 초아가 고소라도 하게 되면, 그땐 무릎 꿇고 빌어 봐야 소용 없을 거야."
그의 날카로운 말이 초설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두 사람의 결혼, 그리고 그녀가 사랑과 헌신이라고 믿었던 지난 10년의 시간은 모두 잔혹한 웃음꺼리일 뿐이 였다.
정규환은 그녀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 끌며 백초아의 병실로 향했다.
간호사 한 명이 그 뒤를 다급하게 쫓으며 소리쳤다. "환자 분은 갈비뼈가 부러지신 상태예요! 당장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지금 하시는 건 학대나 다름없어요!"
그러나 정규환은 간호사의 간절한 호소를 무시한 채,
초설아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VIP 병실로 들어갔다.
VIP 병실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따뜻하고 평온했다. 백초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유소희가 그녀 옆에 앉아 과일을 깎아 건네고 있었다.
초설아가 들어서자, 유소희는 그녀를 한 번 흘끗 보더니 곧바로 시선을 돌려 못 본 척했다.
초상호의 얼굴은 혐오스럽다는 듯 일그러졌다. "네가 어떻게 감히 여기에 얼굴을 내밀어? 네 동생이 어떤 상태인지나 알고 있는 거냐?"
그 순간, 초설아의 마음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주상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아빠, 제가 아빠의 피를 나눈 딸인 걸 잊으셨어요? 엄마가 떠나시고,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저한테 맹세하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이게 저를 지키는 방식이에요?"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설명이나 변명의 기회조차 주려 하지 않았다.
초상호의 표정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초설아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네가 잘못한 일에, 왜 나까지 끌어들여? 너 아주 맹랑해졌구나? 이제는 나한테까지 대들겠다는 거냐?"
침대에 누운 백초아는 심각한 상태라는 말과 달리 꽤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과장된 제스처로 가슴을 누르더니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언니, 아빠가 늙어서까지 혼자 쓸쓸히 사시길 바라는 거야? 언니가 결혼하고 나면 아빠가 얼마나 외로우실지 생각해본 적 있어? 그 넓은 집에서 혼자서, 아플 때 물 한 잔 떠다 줄 사람도 없이 외롭게 지내실 텐데.. 그런 생각은 해봤어?"
말을 끝낸 백초아는 정규환을 향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리고 규환 오빠, 내가 설마 나 자신을 죽이려고 불을 질르겠어요?"
정규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고, 눈빛에는 요동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초설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초설아, 무릎 꿇고 초아한테 용서를 빌어!"
초설아는 정규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순간, 유소희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초설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깜짝 놀란 초설아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유소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초설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초설아! 내 딸을 죽이려 해놓고,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서서 초아를 몰아 세울 수가 있어? 불쌍한 우리 초아.. 다 내 잘못이다. 처음부터 남의 자식을 친 딸처럼 받아들이려고 한 내가 바보였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널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걸 포기했는데! 그런데도 넌 날 원망하고, 우리 초아까지 죽이려고 했어.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어!"
유소희의 처절한 울음소리에, 초상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노로 가득 찬 그는 초설아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그대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 충격으로 초설아는 뒤로 휘청이다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다시 똑바로 서려고 애썼지만, 이미 정신이 멍해진 상태였다.
초설아는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서서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선으로 정규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마음 속에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가 단 한마디라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산산이 깨뜨렸다. "지금 당장 사과해. 안 그러면 경찰을 부를 거야. 초설아, 네가 한 짓은 살인 미수야. 네 남은 인생, 감옥에서 끝낼 수도 있다고."
회차 3
"정규환.."
그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칼날로 깊게 베며 파고드는것 같았다.
10년이라는 그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자그마치 10년을 바쳐 이 남자를 사랑했고, 온 마음을 다해 헌신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다른 여자를 맹신하고 보호하는 그의 모습 뿐이었다.
"그래, 경찰 불러!" 유소희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며 핸드폰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런 살인자는 경찰에 넘겨 콩밥 먹여야 되!"
그 소란 속에서 초설아는 백초아가 유소희의 손을 살짝 쥐는 장면을 목격했다.
둘은 짧은 순간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사인을 주고 받았다.
유소희가 순간 멈칫하자,
백초아가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규환 오빠, 오빠가 절 걱정해 주는 건 알지만, 이건 우리 가족 문제예요. 경찰을 불렀다가는 언니가 체포될 수도 있어요. 초씨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그런 일은.. 원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그냥 넘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백초아가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냥.. 이쯤에서 그만 없었던 일로 해요."
그 말에 초상호는 생각에 잠긴 듯했고, 정규환도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초설아를 노려보며 냉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지금 당장 사과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
부러진 갈비뼈의 고통이 점점 심해졌지만, 초설아는 이를 악물고 등을 곧게 세운 채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잔혹한 깨달음이 스쳤다. 자신의 고통이, 이들에게는 그저 한낱 구경거리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난 잘못한 게 없어! 결백하다고! 무릎 꿇지도 않을 거고, 사과하지도 않을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초상호가 무섭게 다가와 그녀의 뺨을 또 한 번 세게 후려쳤다.
초설아는 충격에 비틀거리며 휘청거렸다. 이미 지쳐 있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중심을 잡기도 전에, 무자비한 발길질이 날아왔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단단한 바닥에 무릎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무릎에서 가슴까지 찌르는 듯한 고통이 퍼져 나갔다.
초설아는 손바닥을 바닥에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가슴을 감은 붕대 사이로 피가 스며 나오더니 그녀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왔다.
초설아를 부축하러 달려간 간호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정규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록을 확인해 봤어요. 초설아 씨 남편 분 되시죠? 부부라면 서로를 보살펴야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구세요? 초설아 씨는 지금 부상이 심각하고 제대로 치료 받지 않으면 평생 후유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고요!"
"난 저렇게 악랄한 여자는 아내로 받아들일 생각 없어." 정규환은 바닥에 쓰러진 초설아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치 신발 바닥에 붙은 먼지를 보는 것처럼 혐오감으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초설아,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초아는 착해서 용서해 줄지 모르지만, 넌 선을 넘었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해.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여기서 무릎 꿇고 있어!"
그리고는 주상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님도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보시죠?"
주상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자기가 한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아야지. 난 찬성일세."
그때,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가족들을 불러냈고, 병실 안에는 초설아와 백초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병상에 앉아 있던 백초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초설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바닥에 짚고 있었다. 백초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언니, 친딸이면 뭐해?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이나 꿇고 있는데. 난 규환 오빠가 좋아. 오빠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언니도 절대 가질 수 없어."
그 순간, 초설아는 왼손을 주머니에 살짝 밀어 넣어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초설아는 백초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불을 낸 게 너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