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오늘은 나의 5번째 결혼기념일이다.

그리고 내 남편, 강태준이 38번째 이혼을 요구한 날이기도 하다.

그의 소꿉친구, 윤희진 때문이다.

우리의 결혼식 날, 차를 몰고 자살 소동을 벌이다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된 여자.

그날 이후, 태준은 죄책감이라는 빚을 갚기 시작했고, 그 대가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지난 5년간, 나는 이혼과 재혼의 굴레를 견뎌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희진이 나를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다.

피 흘리는 나를 발견한 태준은 정의를 약속했다.

반드시 그녀가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며칠 뒤,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건 현장의 CCTV 영상이 의문스럽게 삭제되었다고.

증거도, 사건도 없었다.

그날 밤, 희진은 나를 납치했다.

봉고차 뒤 칸에서 남자들이 내 옷을 찢어발기는 동안, 나는 겨우 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거절했다.

나는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피를 흘리며, 나는 목숨을 걸고 달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39번째 재혼은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사라져 줄 차례였다.

제1화

오늘은 우리의 5번째 결혼기념일이다.

내 남편, 강태준이 내 앞에 서 있다.

날카로운 눈매와 오뚝한 콧날. 그는 처음 만난 날처럼 여전히 멋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혼기념일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이혼하자."

충격받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그를 바라봤다. 심장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이게 우리 38번째 이혼인 거 알아?"

내가 묻자 그의 눈에 무력감이 스쳤다.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희진이가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하고 있어."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너랑 이혼 안 하면 안 내려오겠대. 걔 불안장애 있는 거 알잖아…."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음, 알지."

5년 내내 알고 있었다. 서른일곱 번의 이혼을 겪으며 지겹도록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갈 건데?"

내가 담담하게 묻자 그는 놀란 듯했다.

눈물이나 비명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는 더 이상 나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했다.

"희진이 상태 안정되면, 다시 혼인신고할 거야."

그는 약속했다. 내 어깨를 만지려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추고는 거두었다.

"알았지?"

나는 그의 얼굴, 그 눈 속의 갈등을 보았다.

문득 그 모습이 끔찍하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내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걔한테 빚진 거잖아."

서울가정법원 직원들은 이제 우리 이름을 다 외웠다.

"또 오셨네요?"

김 주무관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한 서류를 꺼냈다.

우리 이혼의 전문가였다.

"이번에도 합의 이혼 맞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건네는 펜을 받았다.

태준이 내 이름 옆에 서명했다.

펜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가 날카롭고 단호했다.

그는 이 일을 서른일곱 번이나 해봤다. 아주 능숙했다.

내 차례가 되자, 펜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칫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오래된 감정의 잔재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게 38번째다.

첫 번째는 숨도 못 쉴 만큼 엉엉 울었다.

두 번째는 그에게 물었다. "왜, 태준아? 왜?"

세 번째, 네 번째… 고통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아홉 번째쯤 되자, 나는 이곳에 와서 김 주무관과 농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빨리 좀 해주세요. 저희 약속 있거든요."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이름, 서아린, 세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 내려갔다.

이번에는 유난히 공을 들였다. 모든 획이 완벽하고, 마지막인 것처럼.

법원 밖으로 나서자 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옥상이 아니라, 바로 법원 계단 위에서.

가녀리면서도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로.

그녀는 나를 스쳐 지나가 태준의 품에 와락 안겼다.

"태준아! 네가 날 선택할 줄 알았어! 날 더 사랑하는 거 알고 있었다고!"

태준의 몸이 굳었다. 그는 희진의 어깨너머로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죄책감? 미안함?

상관없었다.

그는 희진을 살며시 밀어내려 했다.

"희진아, 그만해."

그녀는 더 세게 매달리며 그를 무시했다.

그의 손에서 이혼 서류를 낚아채 내 얼굴에 트로피처럼 흔들었다.

"이거 봐, 서아린. 이제 이 남자는 내 거야. 원래부터 내 남자였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지켜봤다.

뼛속까지 지쳤다.

"윤희진!"

태준의 목소리가 짜증으로 날카로워졌다.

"그만하라고."

그녀는 즉시 태세를 전환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가슴에 기대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태준아. 그냥 너무 기뻐서 그랬어. 우리 축하하러 가자! 응?"

그러더니 그녀는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악의가 번뜩였다.

"서아린도 초대하는 건 어때? 우리의 새로운 시작과, 저 여자의 끝을 축하하기 위해서."

태준이 미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제발 한 번만 더 장단 좀 맞춰달라고 눈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모두 그의 차에 탔다.

희진은 조수석에 앉아 태준에게 기대며, 그의 다리 위에 보란 듯이 손을 올렸다.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내 인생의 유령처럼.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허벅지 위를 맴도는 것을 지켜봤다.

그가 핸들을 쥔 손등에 힘줄이 하얗게 돋아나는 것을 봤지만, 그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막은 적이 없었다.

침묵. 방관. 타협.

그것이 지난 5년간 희진을 대한 그의 방식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그 광경은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5년 전. 우리의 결혼식 날.

나와 태준은 한국대학교의 공식 커플이었다.

그는 촉망받는 경영학과 수재였고, 나는 미래가 기대되는 미대생이었다.

우리는 빠르고 격렬하게 사랑에 빠졌다.

그때 그는 참 다정했다. 붓을 잡는 내 손을 잡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희진은 항상 배경처럼 그곳에 있었다. 그의 소꿉친구.

그에게 집착하며 어디든 따라다니던 여자.

"그냥 친동생 같은 애야."

그는 내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

"걱정 마, 아린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나는 그를 믿었다.

결혼식 날, 내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을 때, 그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희진이었다.

"받지 마, 태준아."

불안감이 배 속에서 똬리를 트는 것을 느끼며 내가 말했다.

"오늘은 안 돼. 오늘은 우리를 위한 날이야."

그는 미소 지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꿨다.

몇 시간 동안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나중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약을 읊조리는 동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희진이 차를 몰다 대형 사고를 냈다.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몸은 망가졌다.

의사들은 그녀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말했다.

죄책감이 태준을 짓눌렀다.

그는 그녀의 전화를 무시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그날부터 빚이 생겼다.

그가, 그리고 그로 인해 나까지 함께 갚아야 할 빚.

희진의 육체적 상처는 아물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심각한 불안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무기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태준과 내가 행복해 보일 때마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켰다. 공황 발작. 자살 협박.

그리고 매번, 태준은 굴복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요구는 항상 같았다.

"서아린이랑 이혼해."

그래서 우리는 이혼했다.

첫 번째 이혼 때, 그는 우는 나를 안아주며 이건 그냥 쇼일 뿐이라고 약속했다.

몇 주 후, 희진이 "안정"을 되찾으면, 그녀는 울며 사과하러 찾아왔다.

태준은 그녀를 용서했다. 그리고 우리는 재혼했다.

그러고 나면 그 굴레가 다시 반복되었다.

그리고 또 반복되었다.

서른여덟 번.

나는 고통에서 무감각으로, 그리고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뼛속까지 시린 피로감으로 변해갔다.

내 붓은 먼지가 쌓여갔다. 내 세상의 찬란한 색들은 잿빛으로 바래버렸다.

차 안에서, 나는 운전하는 태준의 옆모습을 본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여전히 내가 사랑에 빠졌던 남자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여자가 우리 삶을 망치도록 내버려 둔 낯선 남자이기도 하다.

그는 방금 그녀가 자신을 만지도록 내버려 뒀다.

내 자리에 앉도록 내버려 뒀다.

내 이혼을 축하하러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

차갑고 선명한 결심이 내 심장에 자리 잡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39번째 재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아빠 집에 계셔?]

거의 즉시 답장이 왔다.

[ㅇㅇ. 왜?]

[나 한 시간 뒤에 갈게. 할 얘기 있어.]

그리고 부모님께 문자를 보냈다.

[나 그 사람이랑 헤어질 거야. 이번엔 진짜로. 멀리 떠나고 싶어. 같이 가줄 수 있어?]

엄마의 답장은 걱정스러운 이모티콘으로 가득했다.

아빠의 답장은 간단하고 직설적이었다.

[우린 언제나 네 곁에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재빨리 닦아냈다.

이 남자를 위해 흘린 눈물은 이미 충분했다.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청담동의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희진은 아이처럼 태준의 팔에 매달려 그의 옆자리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팔을 빼려 하자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태준아, 이제 내가 싫어진 거지? 내가 겪은 모든 일들 때문에…."

그는 패배감에 한숨을 쉬며 그녀를 내버려 뒀다.

그는 그녀의 스테이크를 잘라주고, 와인을 따라주었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은 깊이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였다.

나는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불필요한 부품.

내 옆자리에 놓여 있던 가방이 미끄러지며 작은 스케치북이 떨어졌다.

몇 달 동안 쓰지 않은 것이었다.

희진이 그것을 봤다.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그게 뭐야?"

그녀가 쏘아붙였다.

"자랑하는 거야? 네가 예전에 어땠는지 그 사람한테 상기시키려는 거야?"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테이블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뜨거운 수프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향해 그대로 던져버렸다.

회차 2

펄펄 끓는 액체가 내 가슴과 얼굴에 쏟아졌다.

고통은 즉각적이었고 눈앞이 아찔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뒤로 넘어졌다.

머리를 단단한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고통의 안갯속에서, 경악으로 물든 태준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벌떡 일어섰다.

"아린아!"

그가 내 쪽으로 오려 했지만, 희진이 더 빨랐다.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고, 히스테릭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저 여잔 당해도 싸, 태준아! 날 조롱했어! 모르겠어? 내가 사고 난 것도 다 저 여자 때문이야! 내가 애를 못 갖는 것도! 저 여자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태준이 얼어붙었다.

그는 바닥에 구겨진 내 모습과 울부짖는 희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에서 익숙한 싸움이 벌어졌다. 의무 대 욕망. 죄책감 대 사랑.

희진이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서 나가게 해줘, 태준아."

그녀가 울며 말했다.

"제발, 집에 데려다줘. 무서워."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수프 웅덩이에 누워 있었고, 피부는 타는 듯했으며, 시야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망설임을 보았다. 그가 곧 내릴 선택을 보았다.

그는 희진을 공주님처럼 안아 들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둠이 나를 완전히 삼키기 전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뺨에 닿는 차갑고 단단한 바닥의 감촉이었다.

소독약 냄새와 기계의 삐 소리에 잠에서 깼다.

병원이었다. 또다시.

가슴과 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피부에서 둔하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퍼져 나왔다.

상냥해 보이는 간호사가 내 링거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 깨어나셨네요."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놀랐어요. 2도 화상을 입으셨지만, 괜찮을 거예요. 운이 좋으셨어요."

나는 운이 좋다고 느끼지 않았다.

"남편분이 정말 걱정하셨어요."

그녀가 내 베개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밤새 복도를 서성이셨어요. 방금 커피 사러 잠깐 나가셨고요. 정말 좋은 분을 두셨네요."

태준이 희진을 안고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심장이 조여왔다. 어떤 화상보다도 더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그는 나를 바닥에 버려두고 떠났다.

"저희 이혼했어요."

마른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간호사는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녀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태준이었다.

그는 지쳐 보였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아린아."

그가 안도감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는 내 침대 곁으로 달려왔다.

"그런 말 하지 마. 우리 이혼한 거 아니야, 진짜로는."

그는 내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손을 빼버렸다.

"희진이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익숙한 변명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걔는 그냥 아픈 거야. 엄청 죄책감 느끼고 있어, 밤새 울었어."

그가 사과했다.

"미안해, 아린아. 정말, 정말 미안해."

나는 그를, 내가 오랫동안 사랑했던 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깊고, 영혼을 짓누르는 피로감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여자가 더 중요하잖아, 안 그래?"

내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네가 날 바닥에 버려두고 선택한 그 여자."

"그런 거 아니야-"

"이 모든 것,"

내가 말을 끊었다.

"이 지긋지긋한 이혼과 재혼 놀음, 그 여자의 '불안'을 달래기 위한 내 고통… 나 이제 끝났어, 태준아."

내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몇 년 만에 가장 단단했다.

"가서 그 여자랑 있어. 가서 돌봐줘. 확실히 넌 그 여자한테 더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린아, 아직도 화났어?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네 곁에 있었어야 했다는 거 알아."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걔가 자살하겠다고 협박했어, 아린아! 칼 들고 있었다고!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그는 절박해 보였다. 목소리는 애원하고 있었다.

"이건 그냥 쇼일 뿐이야. 너도 알잖아. 내 아내는 언제나 너 하나뿐이야."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와 부드러운 독처럼 속삭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의사 선생님이 걔가 나아지고 있다고 했어. 완전히 회복되면, 우리가 항상 원했던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얼마나, 태준아?"

내가 물었다. 질문이 소독된 공기 속에 떠다녔다.

"또 5년? 10년? 넌 걔가 죽는 날까지 달래고 있을 거고, 난 기다려야 해?"

그는 침묵했다.

"내 잘못이야."

그가 마침내 속삭였다. 수천 번이나 했던 똑같은 말이었다.

"내가 걔한테 빚졌어."

나는 그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예전에는 동정심을 느꼈다. 지금은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젖은 시멘트로 가득 찬 것처럼 무거웠다.

"그래."

내가 속삭였다.

"넌 걔한테 빚졌지."

나는 몇 년 전에 했어야 할 말을, 차 안에서 결심했던 그 말을 하기 위해 숨을 골랐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여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영상 통화였다.

희진의 눈물범벅인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비난조였다.

"강태준! 금방 온다고 약속했잖아! 왜 그 여자랑 같이 있어? 그 여자한테서 떨어지라고 했지!"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 밥 안 먹어. 네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내가 굶어 죽으면, 네 탓이야!"

태준의 얼굴에 익숙한 좌절과 체념의 가면이 씌워졌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알았어, 희진아. 진정해. 지금 갈게."

그는 일어서서 떠나려 했다.

내 이마에 키스하려고 몸을 숙였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린아, 좀 쉬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밤에 다시 와서 확인할게."

씁쓸한 웃음이 내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오늘 밤에. 그가 희진을 침대에 눕히고 세상을 다 주겠다고 약속한 후에.

나는 그가 서둘러 문을 나서는 것을 지켜봤다.

그의 휴대폰은 여전히 귀에 붙어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다른 여자를 위한 낮고 부드러운 속삭임이었다.

문이 닫히고, 나는 침묵 속에 남겨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텅 빈 문가를 응시했다.

"말하려고 했어."

나는 텅 빈 방에 속삭였다.

"넌 그 여자한테 모든 걸 빚졌으니, 그냥 그 여자 가지라고."

"하지만 난 너희 둘한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어."

"이 순간부터, 강태준, 너와 나는 끝이야. 영원히."

회차 3

나는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있었다.

가슴과 목의 화상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고, 붉고 성난 흉터를 남겼다.

태준은 가끔 병문안을 왔다.

그는 내 진료에 함께 가주겠다고, 간호사가 드레싱을 갈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희진이 울거나, 소리치거나,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태준은 떠났다.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그가 떠나고 나면, 내 휴대폰이 빛났다.

희진에게서 온 문자였다.

[태준이가 방금 나한테 닭죽 끓여줬어. 나만을 위한 거래.]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죽 사진이 왔다.

또 다른 문자.

[밤새 내 곁에 있어줬어. 내가 잠들 때까지 손잡아 줬어.]

이어서 그녀의 침대 옆 의자에서 잠든 태준의 영상이 왔다. 그의 손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네가 한 짓 때문에 속상한 나를 위해 오늘 데이트 신청했어.]

[발 아프다고 하니까 집까지 업어줬어.]

그리고 마침내, 내 무감각을 뚫고 들어온 한 장의 사진.

희진이 고개를 들고 태준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사진.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이어서 영상이 왔다.

그녀의 손이 그의 셔츠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돌처럼 굳었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날카롭고 으스러지는 압박을 느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저 메시지를 하나씩 삭제했다.

퇴원하는 날, 나는 혼자서 수속을 밟았다.

택시를 타고 한때 우리 집이라 불렀던 곳으로 돌아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희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태준은 스트레스 받은 얼굴로 그녀 옆에 있었다. 그녀는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갈 곳이 없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태준이 말했다.

"집주인이 쫓아냈다고."

희진은 집 안으로 억지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여긴 태준이 집이니까 내 집이야! 날 막을 수 없어!"

태준은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막고 있었다.

"희진아, 안 돼. 여긴 나와 아린이의 집이야. 넌 여기서 지낼 수 없어."

그녀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거칠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차도로 뛰어들 거야! 진짜 할 거라고!"

그는 무력하고 갇힌 듯 보였다.

그때 그가 문가에 서 있는 나를 봤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아린아! 집에 왔구나."

그가 달려와 낮고 미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며칠만 머물게 할 거야. 내가 새집 찾아줄 때까지만. 약속할게."

나는 그의 너머로, 이제는 승리감에 찬 눈으로 나를 쏘아보는 희진을 보았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내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채 차분했다.

"알았어."

태준은 충격받은 듯 보였다.

"너…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나는 더 이상 이 집의 안주인이 아니었다.

곧 쫓겨날 임시 손님일 뿐이었다.

희진은 태준을 밀치고 마치 자기 집인 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으, 이 집 진짜 촌스럽다."

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선언했다.

"싹 다 바꿔야겠어."

그녀는 가정부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했다.

"이 소파 끔찍해, 갖다 버려. 그리고 이 커튼도! 다 버려!"

그때 그녀의 눈이 거실에 걸린 커다란 결혼사진에 닿았다.

나와 태준의 가장 행복했던 날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저거,"

그녀가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제일 꼴 보기 싫어. 당장 내려서 태워버려."

가정부들이 불안한 듯 태준을 쳐다봤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패배감에 찬 작은 고갯짓을 했다.

"저 여자 말대로 해."

나는 예상했다. 그의 항복을 예상했다.

가슴속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말없이 돌아서서 짐을 싸러 내 침실로 갔다.

그들이 내가 사라지길 원한다면, 쉽게 해줄 것이다.

이 집에서 나 자신을 지워버릴 것이다.

나는 여행 가방을 꺼내 내 물건들을 채우기 시작했다.

옷, 책, 오래된 미술 도구들. 내가 사랑했던 것들.

내가 여행 가방을 끌고 방에서 나왔을 때, 거실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우리의 결혼사진은 바닥에 부서져 있었고, 유리는 산산조각 나고, 내 웃는 얼굴은 찢겨 있었다.

내 책들은 책장에서 뽑혀 더미로 던져져 있었다.

신혼여행에서 사 온 아름다운 꽃병은 조각나 있었다.

내가 그토록 정성껏 가꾸고 사랑으로 유지했던 집이 파괴되었다.

나는 잠시 서서 그 잔해를 바라보았다.

희진은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 서서, 의기양양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모든 것,"

그녀가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너… 너희는 이제 다 과거야."

나는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의 게임은 이제 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시려고?"

그녀의 눈이 반쯤 열린 여행 가방에 닿았다.

그녀는 내가 챙긴 먼지 쌓인 유화 물감 세트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뒤틀렸다.

"아직도 화가인 척하는 거야? 네가 얼마나 재능 있는지, 그가 널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자랑하고 싶어?"

나는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 내 침묵은 그녀가 깰 수 없는 벽이었다.

"지나가게 해줘, 희진아."

나는 그녀를 돌아가려 했다.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 미친년!"

그녀는 옆 테이블에 있던 무거운 도자기 화병을 집어 내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나는 그 일격을 피하며 뒤로 비틀거렸다. 화병은 내 뒤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내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사이, 그녀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내 가슴을 밀었다. 세게.

나는 웅장한 계단 꼭대기에 서 있었다.

"지옥에나 떨어져, 서아린!"

그녀가 독기 서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중력 상태를 느꼈다.

그리고 내 몸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날카롭고 격렬한 충격을 느꼈다.

고통이 온몸으로 폭발했다.

나는 계단 아래에 무더기로 쓰러졌고, 머리가 대리석 바닥에 역겨운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피. 따뜻한 피가 내 머리카락을 적시고, 내 아래에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내 몸이 격렬하게 경련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현관문을 통해 달려 들어오는 태준의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은 완벽한 공포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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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번의 이혼, 한 번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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