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결혼 3주년 전날 밤, 박재훈은 경매장에서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캐시미어 블루 사파이어 귀걸이' 를 낙찰 받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내가 가장 미안했던 사람,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귀걸이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라이브 방송 화면을 바라보던 허윤아는 그 한마디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내일이 바로 그녀와 박재훈의 결혼 3주년 기념일이었고, 그가 드디어 마음을 바꿨다는 생각에 허윤아는 그 동안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본 박 노부인도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손자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이제야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거야."

다음 날, 결혼 3주년 당일. 허윤아가 풍성한 음식을 준비 마쳤을 때 박재훈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박재훈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서류 가방을 받아 들고 무릎을 꿇어 구두를 벗겨준 후, 실내화로 갈아 신겨주었다. 그 모든 동작은 이미 몸에 배인 듯 익숙했다.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차렸어? 오늘 무슨 날이야?"

훤칠한 키에 날렵한 이목구비를 가진 박재훈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간단한 동작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늘 허윤아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녀는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잊었어?"

'아니, 그럴 리가. 날 다시 붙잡기 위해 그 600억짜리 귀걸이를 낙찰 받은 거 아니었어?'

하지만 박재훈은 여전히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허윤아, 내가 뭘 기억해야 하는데?"

"그 귀걸이, '우주의 별빛' 이라고 불리는 그 귀걸이... 네가 낙찰 받았잖아." 허윤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도 끝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귀걸이를 네가 어떻게 알아?" 박재훈은 놀란 듯 되물었다. 집안일 밖에 할 줄 모르던 아내가 사회의 뉴스들을 알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곧이어 박재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

솔직히 허윤아의 외형조건은 정말 좋았다. 갸름한 얼굴형에 가지런한 눈썹과 또렷한 눈매. 하지만 늘 꾸미지 않고 수수한 차림으로 집안일만 하니, 정말 촌스럽고 나이 들어 보였다.

어쩌면 박씨 본가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가정부보다도 더 초라해 보였다.

박재훈의 물음에 허윤아의 눈에는 다시 기대가 차 올랐다. "방송으로 봤어. 그 귀걸이 정말..."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재훈이 탁 잘라 말했다. "그건 예라한테 주는 거야."

첫사랑 소예라가 언급되자, 박재훈은 목소리까지 다정해졌다. "예라가 드디어 나랑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돌아왔는데, 내가 당연히 선물을 준비해야지."

그 순간, 허윤아는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방송에서 말한 그 가장 미안했던 사람이... 소예라라고?'

'3년 동안 성심껏 돌보고도 단 한 번의 선물조차 받지 못한 난 그럼 뭐였는데?'

허윤아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박재훈, 그때 네가 누구때문에 사고가 나서 눈이 멀었는지 잊었어?"

몇 년 전, 소예라가 사소한 일로 격노를 하여 운전 중이던 박재훈의 주의력을 혼란 시키는 바람에 차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박재훈은 눈이 멀었고 회복 가능성도 낮다는 의사 말에 소예라는 그날 바로 핑계를 대고 외국으로 도망쳤고 그 후 아무 소식도 없었다.

당시 둘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박씨 가문은 이미 청첩장을 돌린 상태였는데 아무리 찾아도 소예라와 그녀의 가족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그때 허윤아가 나서지 않았다면 박씨 가문은 이미 이 도시의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네가 뭘 알아! 그건 예라 잘못이 아니야!"

박재훈은 단 한 마디라도 소예라를 비난하는 말은 용납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도 다 예라 덕분이야. 예라가 내 눈 수술을 해줬거든. 누가 실수로 입밖에 내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까지도 예라가 날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고 있었을 거야..."

"뭐라고?" 허윤아는 순간 멍해졌다.

박재훈이 시력을 잃은 후, 박 노부인의 부탁으로 분명 허윤아가 신경이식 수술을 맡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세 번이나 대수술을 했었다. 수술 후에도 허윤아는 밤낮 없이 박재훈을 간호했으며 자신의 신의 정체를 숨기고 오직 박재훈에게만 정성을 퍼부었었다. 그러니 그가 다시 이 세상을 보게 된 건 모두 허윤아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공로를 소예라가 가져갔다고?

"너... 확신해? 근거도 없는 그 말을 정말 믿냐고?"

"당연하지! 예라는 임세준 교수님의 제자야. 전세계에서 이런 수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박재훈의 표정은 감격과 자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임세준 교수님의 제자는 나잖아. 언제부터 소예라가 그 신분을 사칭하고 다녔던 거지?'

허윤아는 진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문득 임새준이 반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소예라도 이 타이밍에 돌아온 거겠지.

죽은 사람은 증언할 수 없으니 허윤아가 아무리 말해도 진실은 묻힐 게 뻔했다. 박재훈은 그녀의 정성스런 보살핌 속에서 다시 시력을 회복하고 박씨 그룹을 계승하게 되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허윤아는 더 뭐라 하기에도 힘들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럼 오늘 왜 돌아온 거야? 소예라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허윤아는 앞치마를 홱 벗어 던졌고 마음 한구석에서 절망이 번져갔다.

그러자 박재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당당하게 말했다. "나 이제 지쳤어. 우리 이혼하자. 결혼 전에 3년만 함께 하기로 합의했잖아. 나도 3년 동안 널 많이 참아줬어."

'참아줬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내뱉을 수 있지?'

분명 그녀가 3년의 청춘을 바쳤고 몸과 마음이 다 지치도록 헌신하며 박재훈을 다시 정상적인 사람으로 이 세상에 끌어올린 것인데!

하지만 박재훈은 그런 허윤아의 고통엔 관심조차 없는 듯 미리 준비해놨던 이혼 서류를 던져주며 말했다. "읽어봐. 문제 없으면 서명하고. 나랑 예라는 너 때문에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했으니, 더 이상 예라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허윤아는 빠른 속도로 서류를 훑었고 마지막 항목인 이혼 보상에 시선이 머물렀다. 외곽에 팔리지도 않는 허름한 아파트 한 채, 그녀가 늘 장 보러 타고 다니던 고물 폴로 차량 한 대, 그리고 보상금 6억 원.

참 기가 막혔다.

눈을 멀게 한 장본인에게는 600억짜리 귀걸이를 선물해 주고, 정작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자 아내인 허윤아에게는 고작 6억이라니...

고작 6억, 심지어 그녀가 수술 한 번 해주는 보수보다도 적은 금액이었다. 게다가, 그 동안 박재훈을 돌보기 위해 허윤아는 신분을 감추며 아주 많은 수술을 거부했었다.

"보상이 부족하면..."

박재훈은 허윤아가 울며불며 매달릴 줄 알았다. 하지만 허윤아는 냉소를 짓더니 망설임 없이 이혼 서류에 서명을 남겼다.

그 뜻밖의 전개에 박재훈은 괜히 찝찝해 났다. '고아 출신인 주제에 뭐가 이렇게 당당해?'

허윤아는 서명을 마친 서류를 박재훈에게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서명했어. 근데 박재훈, 너 나중에 후회하지 마."

회차 2

박재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히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다만, 이혼 보상금도 받았으니 할머니한텐 네가 직접 말씀 드려."

박 노부인이 인정하는 손주며느리는 오직 허윤아 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이혼 소식을 들으면, 박 노부인은 반드시 박재훈의 다리를 부러뜨릴 각오로 화를 낼 것이다.

그러니 이 악역은 허윤아가 맡아야 했다.

하지만 허윤아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난 말하지 않을 거야. 할머니에 대한 은혜도 3년간의 결혼생활로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해. 박재훈, 너 소예라를 엄청 사랑한다면서 그 얘기를 할머니 앞에서 할 용기조차 없는 거야?"

허윤아는 고아원에서 자란 고아였고 어릴 적부터 박 노부인의 지원 덕에 좋은 교육을 받고 사람답게 자랄 수 있었다.

그래서 박씨 가문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망설임 없이 그 결혼에 임한 것이었다.

그때 박재훈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허윤아는 그 모든 걸 감수하며 박씨 가문 식구들을 지극정성으로 챙겼다.

단, 그녀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만약 3년 후에도 박재훈이 그녀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곧바로 이혼하는 것이었다.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고 그녀도 해방할 때가 된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뭐든 극복할 수 있겠지? 잘해봐." 허윤아는 담담하게 웃으며 비웃었다. "둘이서 평생 묶여 살길 바랄게."

말을 마친 허윤아는 차 키를 들고 나가려 했지만,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박지민에게 앞길이 막혔다.

"허윤아, 너 우리 오빠랑 이혼한다며. 그 차는 우리 박씨 가문 거니까 가지고 나갈 생각하지 마!"

허윤아는 냉소를 지었다. "박지민, 그 차는 내가 산 거야. 너도 네 오빠랑 똑같이 뻔뻔스럽구나!"

"무슨 일이야?" 박재훈이 소란을 듣고 따라 나왔다.

그러자 박지민은 억울한 척하며 외쳤다. "오빠, 허윤아가 차 끌고 나가려 해. 나 지금 딱 차가 필요하단 말이야!"

박재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윤아야, 그 차 지민이 줘."

"내가 왜?." 허윤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줘."

"뭐? 너 미쳤어?" 박지민은 당장이라도 차 키를 빼앗으려는 듯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낡은 여행가방 하나와 함께 불이 붙은 폭죽 한 묶음이 차 안으로 던져졌다.

"펑! 펑! 펑!" 폭죽이 터지며 차 안에는 순간 불꽃과 연기로 가득 찼고 박지민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이딴 차 필요 없으니까, 너 가져." 허윤아는 폭죽을 던진 뒤, 단호하게 돌아서 나갔다.

허윤아는 박씨 가문에서 썼던 물건과 입었던 옷들은 다 남겨두고 나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괜히 가지고 나갔다간 재수만 없을 테니까.

그녀는 곧바로 친구 한민정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이혼 소식을 전했다.

허윤아가 빌라 구역의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한민정은 이미 그녀의 고급스러운 '페이튼' 한 대를 몰고 도착해 있었다.

"어머, 세상에! 우리 여왕님께서 정말로 돌아오신 거야?"

한민정은 과장스럽게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꼬박 3년 동안,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더니, 전화하면 늘 남편 간병 중이라 하고! 솔직히 난 네가 3년 전에 결혼을 한 게 아니라 장례식을 한 건 아닌가 생각했다니까!"

불만을 쏟은 후, 한민정은 곧바로 달려가 허윤아를 와락 안으며 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잘했어. 그 눈 뜬 장님은 진작에 잘라냈어야 했어. 이제 우리 자유롭고 시원하게 살아보자고!"

그러다 한민정은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안 되겠다. 우리 이참에 폭죽이라도 수백 킬로 쏴버리자. 삼일 삼야 불꽃놀이로 너의 환생을 축하하는 거지!"

"이미 쐈어." 허윤아는 피식 웃으며 박씨 가문 쪽을 가리켰다.

바로 그때, 굉장한 폭음과 함께 낡은 폴로 차량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며 폭발해버렸다.

그 순간, 불길이 치솟으며 밤하늘을 밝혔다.

"폭죽소리 굉장하지?" 허윤아는 장난스럽게 미간을 살짝 치켜올렸다.

한민정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우리 여왕님 완전히 부활하셨네! 자, 이제 축하 파티 하러 가자!"

허윤아는 차에 올라타며 하품을 했다. "다음에 하자. 지금은 그냥 자고 싶어."

3년 동안 밤낮으로 수술을 하거나, 박재훈을 간병하느라 잠 한번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우선 좀 쉬고 싶었다.

한편, 박씨 가문의 저택에서 박지민은 이를 악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빠! 나 방금 진짜 깜짝 놀랐어! 허윤아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우리 차를 이렇게 터뜨리다니! 오빠, 진짜 가만 놔두면 안 돼..."

"됐어." 박재훈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너부터 좀 봐봐. 지금 네 모습이 어딜 봐서 명문가 아가씨 같아?"

박지민은 금세 입술을 삐죽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지금 설마 그 촌스러운 여자 편드는 거야? 나 예라 언니한테 말할 거야. 오빠가 요즘 나한테 소홀해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박재훈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촌스러운 허윤아 따위를 내 동생이랑 비교할 리가 없지.'

그는 이내 달래듯 말했다. "며칠 뒤에 이 도련님이 웅성에 온다는 거 잊었어?"

이씨 가문은 경주에서 손꼽히는 대재벌가였고 군·정·재계를 장악한 무소불위의 가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도현은 타고나게 잘생긴 외모에 이씨 그룹이라는 글로벌 기업을 이끌고 있었으니 그가 재채기 한 번만 해도 전국 경제가 뒤흔든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것은 이씨 가문의 다섯 도련님들 중에서 이도현이 유일하게 아직 미혼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웅성은 물론, 경주 전역의 재벌가 아가씨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안 잊었어." 자신의 이상형이 언급되자, 박지민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박재훈의 팔짱을 꼈다. "이번에 이 도련님이 웅성으로 내려온 것도 조카의 눈 수술 때문이잖아. 예라 언니가 이유진 씨의 눈만 고쳐주면 우리는 이씨 가문의 은인이 되는 거야! 그러면 할머니도 언니랑 오빠의 결혼을 반대하시지 않을 거야."

그 말에 박재훈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 가문은 소예라가 그의 눈을 성공적으로 치료했다는 소문을 듣고 웅성으로 내려온 것이니 이건 그들에게 있어서 이씨 가문과 가까워질 소중한 기회였다.

"그땐 네가 예라의 수술 보조를 맡아. 이유진 씨 눈에 들기만 하면, 이 도련님 쪽도 훨씬 잘 풀릴 테니까."

"고마워, 오빠!" 박지민은 상상의 나래에 빠져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박재훈은 문득 폭죽을 던지고 돌아서던 허윤아의 당당한 뒷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녀를 단지 순하고 조용하기만 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쿨하고 터프한 면이 있었을 줄이야.

'아마도... 허윤아라는 여자를 다시 평가해야 할 모양이네.'

회차 3

허윤아는 한민정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서 무려 사흘 동안이나 잠만 잤다.

매일 간단히 식사만 하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심지어 팩도 한민정이 그녀의 얼굴에 직접 올려줄 정도였다.

그렇게 나흘째 되던 날, 박 노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박씨 저택에 한번 들르라는 말이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분명 박재훈과의 이혼 문제 때문에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민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생각엔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이번에 경주 이씨 가문의 장손녀, 이유진 씨가 갑작스럽게 머리를 다쳐서 실명했다잖아? 그런데 이씨 가문에서 전국의 명의를 다 불러 모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대.

지금 이씨 가문은 온 세상을 뒤져서 '사이트 위버 여신' 이라 불리는 임세준 교수님의 제자를 찾고 있는 중이고, 이 도련님까지 조카를 치료하기 위해 직접 웅성으로 내려왔어."

한민정은 조금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너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은 박 노부인 한 분뿐이잖아..."

허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걱정하지 마. 할머니께서 내 정체는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어."

"그래도 조심해. 괜히 박씨 가문한테 또 이용당하지 말고." 한민정은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당부했다.

"알겠어."

곧이어 한민정은 그녀를 붙잡고 덧붙였다. "근데, 너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돼."

아침 식사 후, 한민정은 스타일링 팀을 집으로 불렀다. "목적은 딱 하나, 우리 여왕님을 완벽히 부활시키는 거야."

말이 씨가 됐는지, 휴식을 충분히 취한 허윤아는 마치 죽기 직전의 꽃이 생수를 만난 듯 생기와 윤기가 돌아왔다. 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탄력 있었고 그 동안 고생으로 흐려졌던 눈빛도 맑은 샘물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스타일링 팀은 간단하게 허윤아에게 어울리는 미니 드레스를 골라주고, 얼굴엔 가볍게 파우더만 얹었을 뿐인데도 그야말로 신의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한민정조차 눈을 떼지 못하다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박재훈 그 자식은 눈이 얼마나 썩었으면 너 같은 여신을 두고 그 잡초 같은 소예라한테 눈이 돌아갔을까?"

시간이 되자, 박씨 가문의 차량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직접 마중 나온 집사 장기철은 처음에 허윤아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는 몇 번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허윤아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목소리로 알아채고 급히 말했다. "윤아 양이 이렇게 예뻐지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못 알아볼 뻔했네요."

30분 후, 박씨 저택의 정문에 도착하자 장기철은 직접 차문을 열고 허윤아를 공손히 맞이했다.

"어머? 혹시 이씨 가문의 아가씨세요?" 그때, 박지민이 잽싸게 달려와 알랑방귀를 뀌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이도현이 직접 박씨 가문을 방문하는 날이었고 박지민은 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새벽부터 머리를 손질하고 명품 옷까지 차려 입었다.

원래는 이도현만 방문하는 줄 알았는데, 집 앞에서 이렇게 눈부신 젊은 아가씨를 만나게 되다니.

저 고귀한 분위기, 이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박지민, 너 시력이 별로 안 좋나 봐?" 허윤아의 목소리를 듣자, 박지민은 충격을 먹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허윤아, 너야?!" 박지민은 믿기지 않는 듯 허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질투에 찬 시선을 숨기지 못했다.

바로 그때, 박재훈이 소예라를 데리고 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박재훈은 허윤아에게 시선이 고정되며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냥 이혼만 했을 뿐인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확 달라질 수가 있지?

"재훈 오빠, 저 사람 오빠 전 부인 아니야?" 소예라는 박재훈의 눈에 담긴 놀라움을 보며 이를 갈았지만, 얼굴엔 여전히 품위 있는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왕 마주친 김에 인사라도 해. 아무것도 없던 고아가 오빠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특하잖아."

누가 들으면 소예라가 정실이고 허윤아가 내연녀라고 여길만한 말투였다.

정신을 차린 박지민은 허윤아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허윤아! 너 따위가 어떻게 이런 값비싼 옷을 입을 수 있어? 오빠가 준 돈으로 옷도 사고 성형까지 했나 봐?"

'오늘은 예라 언니조차 수수하게 꾸며 내 배경이 되어줬건만, 어떻게 허윤아 따위가 나보다 더 눈에 띌 수 있지?'

박지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욕설을 퍼부었다. "퉤! 역겨워! 이렇게 싸구려같이 치장해서 누구 보여주려고? 설마 우리 오빠 마음이라도 다시 잡아보려는 건 아니겠지? 꿈 깨!"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구르던 박지민은 곧바로 허윤아의 옷과 머리채를 뜯으려 했다.

그러자 장기철이 급히 막아 섰다. "아가씨,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시는 날이니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하지만 박지민은 늘 제멋대로였기에 집사의 타이름 따위는 개의치도 않았다. "난 반드시 저 년 얼굴을 찢어버릴 거야! 저 더러운 여우 같은 얼굴!"

그러자 허윤아는 침착하게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카메라를 박지민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그래, 맘껏 해봐. 이 도련님께 너의 진짜 모습을 한번 보여드리게."

박지민은 순간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여전히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네가 감히!"

곧이어 박지민은 억울한 척하며 소예라 쪽으로 바싹 다가가 고자질했다. "예라 언니, 새언니. 우린 가족이잖아. 나 좀 도와줘!"

박지민은 일부러 '새언니' 란 단어에 힘을 담으며 허윤아의 속을 긁으려는 듯했다.

"그래, 네가 외부인한테 괴롭힘 당하지 않게 내가 도와줄게." 소예라는 박지민이 친여동생이라도 되는 듯 그녀를 감싸 안으며 달랬다.

허윤아는 그 광경이 우습기만 했다. "할머니와 박 사모님은 어디 가셨나 봐요? 벌써부터 소예라 씨 같은 외부인이 박씨 가문을 좌우지하려 하다니."

그 말에 소예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허윤아는 박씨 가문에서 보모 같은 존재라며? 그런데 왜 이렇게 기세가 강해?"

"누가 외부인이라는 거야? 여기에 외부인은 너밖에 없어!" 박지민이 발끈하며 박재훈을 향해 말했다. "오빠, 다 들었지? 얘가 예라 언니 괴롭히잖아!"

소예라는 무고한 척하며 달랬다. "됐어, 지민아. 윤아 씨는 고아잖아... 그러니 말을 좀 거칠게 하는 것도 이해해. 재훈 오빠, 너무 뭐라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허윤아는 어이가 없어 눈을 굴렸다. 이건 뭐, 부모도 없이 자란 천덕꾸러기 취급이었다.

그런데 박재훈은 소예라가 억울함을 당하고도 남부터 걱정하는 모습에 더 감동받은 듯했다.

그는 재빨리 소예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허윤아를 향해 소리쳤다. "이딴 짓으로 내 관심 끌 생각하지 마. 역겨우니까! 당장 예라한테 사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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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없다,빛나는 천재 상속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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