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나는 대한민국 IT 업계의 거물, 내 남편 강태준의 닻이었다. 혼돈으로 가득 찬 그의 영혼을 붙잡아 줄 유일한 사람.
하지만 내 동생이 죽어갈 때, 태준은 목숨과도 같은 치료비를 내연녀의 수십억짜리 고양이 보호소에 넘겨버렸다.
동생이 죽은 후, 그는 교통사고 현장에 피 흘리는 나를 버려두고 그 여자를 구하러 갔다.
이혼 서류를 내밀었을 때, 나는 마지막 배신을 마주했다. 우리의 결혼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혼인 신고서는 정교하게 위조된 가짜였다.
그는 내가 절대 떠나지 못하도록, 나만의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하도록, 기만으로 내 세상을 쌓아 올렸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 거절했던 유일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제국을 잿더미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시작하기 위해.
제1화
서은하 POV:
모든 괴물에게는 약점이 있다고들 한다. IT 업계의 가장 뛰어나고 변덕스러운 괴물, 강태준에게 그 약점은 바로 나여야만 했다. 나는 그의 닻이었고, 폭풍 같은 그의 영혼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였고, 그의 제국과 내 세상 전부를 세운 신화였다.
더 이상 내 세상이 아니게 되기 전까지는.
몇 달 전부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상류층의 화려한 새장 속에서 속삭이는 소문들, 내가 절대 읽지 않지만 ‘걱정된다’는 친구들이 보내주는 가십 사이트의 헤드라인들. 내가 모래 색깔이 예쁘다고 한마디 했다는 이유로 섬 전체를 사주던 강태준이, 이제는 어딜 가나 윤세라와 함께라는 것이었다.
윤세라. 그 이름은 혀끝에 닿는 순간 염산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유명해서 유명한 SNS 재벌 상속녀이자, 내 고등학교 시절의 끔찍한 악몽이었다. 내 손목에 희미하게 남은 은색 흉터, 내가 묻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내 남자, 강태준은 그런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첫 번째 공개적인 타격은 자선 갈라에서였다. 그는 내 파트너로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해 특별 제작한 드레스를 입고 세 시간을 기다렸지만, 결국 내 휴대폰에 떠오른 건 한 장의 사진이었다. 윤세라의 허리를 감싸 안은 태준의 소유욕 넘치는 손, 그리고 목을 젖히며 웃는 그녀의 모습. 사진 밑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IT 거물 강태준과 인플루언서 윤세라, 화려한 데뷔.’
나의 데뷔는 조용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실크 드레스의 감촉이 수의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는 더 작고 날카로운 상처들이 이어졌다. 그는 우리가 무일푼 시절 피자 한 조각을 나눠 먹을 때부터 지켜온 유일하고 신성한 전통이었던 주간 저녁 식사를 취소하기 시작했다. 그의 문자는 짧아졌고, 전화는 뜸해졌다. 그는 우리가 사는 거대하고 미니멀한 저택에서 유령처럼 굴었고, 침대 그의 쪽은 언제나 차가웠다.
한편, 윤세라는 집요했다.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란제리를 입고 태준의 전용기 위치를 태그한 채 DM을 보냈다. 그녀는 태준과 함께 찍은, 어이없을 정도로 다정한 셀카가 담긴 액자를 ‘실수로’ 우리 집으로 배송시켰다. 모든 행동은 내 불안감을 후벼 파기 위해 정교하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낸, 내 슬픔을 차갑고 단단한 복수심으로 바꾼 사건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건 내 동생, 은우에 관한 일이었다.
내 동생, 밝고 희망에 찼던 내 동생 은우가 죽어가고 있었다. 희귀 유전 질환이 서서히 동생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지만, 한 줄기 희망을 주는 새로운 실험적 치료법이 있었다. 그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일이었고, 오직 강태준만이 가진 자원과 인맥이 필요했다. 그는 내게 약속했다.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은하야, 내가 은우를 위해 하늘과 땅이라도 움직일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그를 믿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뗏목에 매달리듯 그 약속에 매달렸다.
지난주, 은우의 주치의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고. 즉시 치료 자금을 지원하고, 72시간 내에 장비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태준에게 전화했다.
“태준 씨, 지금이야. 자금이 필요해. 의사 선생님이…”
“나 지금 회의 중이야, 은하야.” 그는 차갑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배경에서 희미하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가 윤세라에게 막 사준 페르시안 고양이의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메일은 나중에 확인할게.”
그는 절대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이틀 후, 뉴스 알림이 내 휴대폰을 밝혔다. ‘강태준의 아낌없는 자선: IT 거물, 윤세라의 숙원 사업인 수십억 원대 유기묘 보호소에 자금 지원.’
구명뗏목은 수백만 조각으로 부서졌고, 나는 배신이라는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은우는 어제 죽었다.
지금, 텅 빈 병실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나는 연락처를 스크롤했다. 8년 동안 한 번도 누르지 않았던 이름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멈췄다. 이름도 없이, 그저 다른 길, 선택하지 않은 삶을 상징하는 숫자의 나열로 충동적으로 저장해 둔 번호였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자를 입력했다. ‘도움이 필요해.’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다. 허공에 지르는 절박한 비명, 마지막 발악이었다.
하지만 1분도 채 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
‘뭐든지. 어디인지 말해. 바로 갈게.’
뜨겁고 무거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화면 위로 떨어졌다. 이상하고 공허한 위안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방구석에 걸린 작은 텔레비전을 보았다. 음소거 상태였지만 24시간 뉴스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가 있었다. 강태준. 그는 고양이 보호소 기자회견장에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내가 몇 달 동안 보지 못했던, 드물고 진심 어린 미소였다. 그는 윤세라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속이 뒤틀렸다.
화면 하단의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삶의 시작: 윤세라,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다.’
내 시선은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작고 낡은 나무 오르골로 향했다. 차마 챙기지 못한 유일한 은우의 물건이었다. 오르골에서는 조악하고 음정이 맞지 않는 ‘반짝반짝 작은 별’이 흘러나왔다. 태준이 사준 것이었다.
그의 첫 번째 대형 알고리즘이 팔렸던 해, 먼지 쌓인 전당포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우리는 아직 세탁소 위, 축축한 옷과 락스 냄새가 진동하는 비좁은 원룸에 살고 있었다. 그때의 태준은 유령 같았다. 보육원에서 나이만 차서 쫓겨나 입고 있는 옷과 세상을 불태울 듯한 눈빛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똑똑하고 분노에 찬 소년이었다.
나는 그가 냅킨에 복잡한 코드를 그리며 한 잔의 커피로 몇 시간씩 앉아 있던 식당의 웨이트리스였다. 나는 그에게 남은 음식을 챙겨주기 시작했고, 그가 집에서 쫓겨났을 때 내 소파를 내주었다. 나는 그의 분노 아래 숨겨진 천재성을 알아본, 그를 믿어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우리는 라면 한 개를 나눠 먹던 사이에서 수십억 가치의 포트폴리오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의 삶은 변했지만, 우리 관계의 핵심은 그대로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 가족을 만들자, 은하야.” 몇 년 전, 우리가 이제 집이라고 부르는 철과 유리로 된 요새에서 그가 내게 속삭였다. “진짜 가족. 우리 둘 다 가져보지 못했던 거. 내가 너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줄게.”
그 약속은 이제 잔인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는 윤세라를 위한 세상을, 그녀의 고양이들을 위한 보호소를 짓고 있었고, 내 동생의 세상은 꺼져버렸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찢겨 나오는 듯한 오열에 몸이 떨렸다. 나는 은우의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값싼 나무의 차가운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그것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다시 휴대폰을 열었다. 무감각한 엄지손가락으로 태준과 나눈 마지막 문자 메시지를 스크롤했다. 병원에 전화해달라고, 내 전화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나의 절박한 간청들. 그의 답장은 드문드문했고, 무시하는 투였다.
‘바빠.’
‘회의 중.’
‘통화 못 해.’
그리고 고양이 보호소에 대한 뉴스 알림 날짜를 보았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가 제주도의 바람 부는 절벽에서 내게 평생의 헌신을 약속하며 청혼했던 날. 그는 그날을 그녀와 함께 보냈고, 그녀를 축하했고, 내 동생의 목숨을 구했어야 할 돈으로 그녀의 변덕을 채워주었다.
내가 그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이틀 전이었다. ‘은우 상태가 안 좋아. 제발, 태준 씨. 당신이 필요해.’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회차 2
서은하 POV:
그것은 기괴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강태준은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선물들을 윤세라에게 퍼부었고, 나는 은우의 짧은 생이 남긴 평범한 유품들을 정리했다.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립스틱과 똑같은 핑크색으로 특별 주문한 롤스로이스를 사주었다. 나는 내 신용카드로 은우의 소박한 나무 관 값을 치렀다.
그는 그녀와 그녀의 인플루언서 친구 스무 명을 즉흥적인 ‘콘텐츠 제작’ 주간을 위해 발리의 개인 리조트로 날려 보냈다. 나는 바람 부는 해안가로 홀로 운전해 가서 은우의 유골을 뿌렸다. 차갑고 무거운 회색 유골함이 내 손안에 있었다.
장례식은 조촐했다. 내 친구 몇 명과 은우의 간호사들만 참석했다. 물론 강태준은 없었다. 그는 너무 커서 외설적이기까지 한 화환을 보냈다. 내가 장례식장 직원에게 쓰레기통에 버려달라고 한, 그의 죄책감에 대한 천박한 기념비였다.
내 동생의 마지막 흔적이 먼지가 되어 파도 위로 흩어지는 것을 본 지 이틀 후, 마침내 내 휴대폰이 울렸다. 그였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저녁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묻는 것처럼 태연했다.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었네. 미안.”
며칠 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차가운 평정이 깨졌다. “정신이 없었다고?” 나는 위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은우는 죽었어, 강태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아, 은하야. 정말 유감이야. 전화하려고 했는데…”
“고양이 낙원을 후원하느라 너무 바빴나 보지?” 말은 얼음 같았다. “그 돈, 강태준. 그게 은우의 유일한 기회였어.”
“은하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그의 말투가 까다로운 이사회 멤버를 달랠 때 쓰는 톤으로 바뀌었다. “의사들도 실험적이라고 했잖아. 보장된 건 아무것도 없었어. 반면에 보호소는 확실한 홍보 효과가 보장되고, 윤세라가 그 일에 정말 열정적이었어.”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내 동생의 목숨을 홍보 전략과 비교하고 있었다.
그때, 들렸다. 배경에서 들려오는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웃음소리. “태준 씨, 아직 안 끝났어? 반지 보러 가기로 약속했잖아.”
윤세라.
그 하나의 태평한 소리가 마지막 기폭제가 되었다. 그것은 내가 한때 그에게 느꼈던 모든 미련, 모든 사랑의 조각을 날려버렸다. 남은 것은 오직 불타버린 폐허뿐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내 손은 이상할 정도로 냉정하고 목적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침실에 있는 로스코 그림 뒤에 숨겨진 금고로 걸어가 두꺼운 서류 봉투를 꺼냈다. 안에는 거의 잊고 있던 서류가 들어 있었다. 이혼 서류. 결혼할 때 그의 변호사들이 작성해 둔, 일종의 혼전 계약서였다. “혹시 모르니까.” 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었다. “내가 언젠가 널 잃어도 싼 괴물이 된다면.”
점선 위에 한 내 서명은 흔들림 없이 선명했다. 서은하. 갑자기 다시 내 것 같아진 이름이었다.
서명한 서류 사진을 차도윤이 알려준 번호로 보냈다. 런던에 있는, 신중하지만 악명 높을 정도로 무자비한 가사 전문 변호사의 연락처였다. ‘이거 접수해 줄 수 있어요?’
답장은 즉시 왔다. ‘처리된 걸로 생각하세요. 내일 저녁 7시에 차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개인 비행장으로 모실 겁니다.’
그렇게 정리가 되자, 이상한 공허함이 나를 집 밖으로 이끌었다. 세탁소 위, 우리의 옛날 아파트에 은우의 물건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어릴 적 그림들, 첫 번째 곰 인형. 그것들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동네는 기억보다 더 낡아 있었고, 가로등은 금이 간 보도 위에서 깜박였다. 옛날 집이 있는 거리로 모퉁이를 돌았을 때, 심장이 멎었다. 우리 첫 집 창문 바로 아래, 내 차보다 더 잘 아는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강태준의 단 하나뿐인, 무광 검정색 마이바흐.
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넘쳐나는 쓰레기통 뒤로 몸을 숨겼다. 시큼한 쓰레기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다. 차 안의 실내등이 켜져 있었고, 그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강태준과 윤세라. 그녀의 등은 조수석 문에 눌려 있었고, 그는 그녀 위로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에 엉켜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거칠고 굶주린 키스였다.
메스꺼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토하지 않으려고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 이미지는 눈꺼풀 안쪽에 낙인처럼 찍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떨어져 있었다. 윤세라는 완벽하게 관리된 손톱으로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도 왜 날 이딴 쓰레기장에 데려왔는지 모르겠어, 태준 씨.” 그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강태준의 목소리는 낮게 울렸다. 예전에는 나에게만 향했던 애정이 가득했다. “인내심을 가져, 내 사랑.” 그는 창밖을 가리켰다. 무너져가는 벽돌 건물들, 우리가 무에서부터 일궈낸 삶을. “6개월 후면, 여기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우리 회사가 이 블록 전체를 막 인수했어. 전부 허물고 새로운 에머슨 타워를 지을 거야. 그리고 펜트하우스, 도시가 360도로 보이는 그곳? 전부 네 거야.”
숨이 막혔다. 그는 우리의 역사를 불도저로 밀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는 우리의 기반 자체를 지워버리고 그 폐허 위에 그녀를 위한 기념비를 세울 작정이었고, 내게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내 슬픔과 분노는 하나의 절박한 충동으로 합쳐졌다. 도망쳐야 했다. 나는 뒤로 허둥지둥 물러나다 헐거운 쇠붙이에 발이 걸렸다. 그것이 보도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조용한 거리에서 총성처럼 울려 퍼졌다.
마이바흐 안에서, 열정적인 장면이 얼어붙었다. 두 개의 머리가 돌아섰고, 눈부시게 밝은 한 쌍의 헤드라이트가 쓰레기통 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 무자비한 빛 속에 나를 꼼짝 못 하게 가뒀다.
회차 3
서은하 POV:
한때 따뜻한 포옹 같았던 강태준의 시선은 이제 부서진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는 내가 얼어붙어 있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위험한 정적이 뿜어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그는 윤세라에게서 몸을 떼었다. 위협을 감지한 포식자처럼 몸이 긴장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헤드라이트 불빛 너머의 어둠에 시선을 맞췄다.
“은하?”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낮은 으르렁거림이었다. 그는 차 문을 밀어 열었다. 비싼 기계 장치가 조용한 거리에서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맞춤 정장은 골목의 더러움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의 말투는 걱정과 짜증이 이상하게 뒤섞여 있었다. “위험하잖아.”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건데, 강태준?” 나는 내가 가진 줄도 몰랐던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청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가 대답하기 전에, 윤세라가 차에서 나와 목에 실크 스카프를 둘렀다. 그녀는 태준의 곁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가 그의 팔짱을 꼈다.
“어머, 은하 씨였네.” 그녀의 목소리는 역겨울 정도로 달콤했다. “태준 씨가 자기가 자란 곳을 보여주고 있었어. 정말… 소박하네.” 그녀는 가짜 순수함으로 가득 찬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고등학교 때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정말 미안해. 난 그냥 어리고 질투 많은 소녀였을 뿐이야.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닥쳐.” 나는 그녀의 연기를 꿰뚫으며 쏘아붙였다. “그냥 닥치라고, 윤세라.”
그녀의 가면이 순간 무너졌다. 그녀의 눈에 승리감이 스쳤다가, 이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짜 흐느낌으로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그녀는 그의 비싼 정장에 대고 훌쩍였다. “난 그냥 모든 걸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에요.”
태준의 팔이 즉시 그녀를 감쌌다.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 너머로 나를 보았다. 그의 미간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은하야, 그만해. 사과하잖아.”
그 부당함은 물리적인 충격이었다. 이미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했던 내 심장이 다시 한번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를. 변호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고등학교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윤세라와 그녀의 친구들이 탈의실에서 나를 몰아세우고, 나를 억누르며 타일 벽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윤세라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컴퍼스 바늘로 내 부드러운 손목 피부에 한 단어를 새겼다. ‘쓸모없는 년.’
육체적인 상처는 희미한 은색 선으로 아물었지만, 감정적인 상처는 몇 년 동안 곪아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것을 숨겼다. 강태준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그 흉터를 어루만지며, 보호적인 분노로 어두워진 눈으로 나를 보았던 사람이었다.
“누가 너한테 이런 짓을 했어?” 그는 낮은 으르렁거림으로 물었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을 때, 그는 맹세했다. “내가 그 여자 망가뜨려 줄게, 은하야. 널 위해서. 네가 흘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 값을 치르게 해줄게.”
그것은 그가 지키지 않은 약속이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죽이겠다고 맹세했던 바로 그 괴물에게 빠져버렸다. 그 아이러니는 너무나 써서 독약처럼 느껴졌다.
“은하야?” 태준의 목소리가 나를 현재로 끌어당겼다. 그는 익숙한 짜증 섞인 찌푸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냥 거기 서 있을 거야?” 그는 마이바흐를 가리켰다. “차에 타. 집에 데려다줄게.”
“아, 네, 제발 같이 가요.” 윤세라가 그의 가슴에서 눈물 젖은 얼굴을 들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차갑고 날카로운 승리감으로 가득했다. “우리 다 친구가 될 수 있잖아요.” 그녀는 마치 나를 일으켜주려는 듯 손을 내밀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내 팔을 잡으려 할 때, 완벽하게 관리된 그녀의 손가락이 내 오랜 흉터 주변의 민감한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녀의 손톱이 주는 날카로운 통증은 의도적이었고, 오직 나만을 위한 잔인하고 사적인 메시지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내 입술에서 새어 나왔고, 나는 팔을 확 뒤로 뺐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윤세라는 균형을 잃었다. 그녀는 연극적인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거리다, 디자이너 옷과 거짓 고통의 더미가 되어 더러운 보도 위에 쓰러졌다.
태준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보았고, 내가 팔을 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그녀에 대한 열병으로 흐려진 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을 내렸다.
그는 내가 그녀를 밀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