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안서영의 담담하지만 날이 선 말에, 마치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박경한은 그녀의 손을 놓고 말았다.
분장실의 공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안서영은 더 이상 박경한을 상대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박경한은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서서,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박경한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서영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지키지 못한 약속이 너무 많아..."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거울에 비친 안서영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시간을 좀만 더 줘. 반년 안에 박씨 가문의 경제 위기를 꼭 해결할게."
"그때가 되면, 예전 네게 했던 약속들을 전부 다 지킬게. 모든 사람들한테 우리 관계를 당당하게 공개하고 결혼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안서영은 화장을 고치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말을 그녀는 너무 많이 들어왔다.
그녀와 박경한이 몰래 연애를 시작한 날부터, 그는 곧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하곤 했다.
그렇게 그녀는 3개월, 반년, 1년… 3년 동안 그를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녀에게, 박경한은 아직도 실현 불가능한 약속을 하고 있다.
탁, 소리와 함께 쿠션 팩트 뚜껑이 닫혔다.
고개를 든 안서영은 거울에 비친 박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고하청 씨는 어떻게 할 거야? 반년 후면 그 여자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뜻이야?"
고하청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자 분장실 안은 다시 한번 냉기 가득한 적막에 휩싸였다.
고하청은 박경한의 옛 연인이었다.
고하청은 한때 박경한을 버리고 유학을 떠났고, 귀국 후 박경한을 찾아와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당시 박경한은 안서영과 사귀기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는 고하청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그러나 그날 밤,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던 고하청은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박경한은 고하청이 겪은 모든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3년 동안 그녀를 돌봐왔다.
상태가 좋지 않은 고하청의 감정을 자극할까 봐 그는 자신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공개할 수 없었다.
고하청의 병세가 위중했기 때문에, 연애 기념일이든 안서영이 정성껏 준비한 데이트든, 그는 언제나 안서영을 버리고 고하청의 곁으로 달려가곤 했다.
3년 동안, 고하청은 안서영과 박경한 사이에 놓인 깊은 골짜기 같았다. 안서영이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골짜기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골짜기를 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후, 안서영은 몸을 돌려 박경한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서영아."
그녀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박경한이 다가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약속할게. 반년 동안만 고하청을 돌볼게."
"반년 후에 네가 유현우와 이혼하고 박씨 가문으로 돌아오면, 그 여자 일은 절대 신경 쓰지 않을게!"
뒤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체온에 안서영은 눈을 꼭 감고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그 여자가 코피 났을 때, 39도 고열에 시달리는 나더러 혼자 운전해서 병원에 가게 했을 때도 마지막이라고 했어."
"그리고 우리 기념일에. 나 혼자 룸에서 꽃과 선물을 바라보며 밤을 새웠을 때도, 다시는 그 여자 신경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을 감싼 그의 손가락을 한 마디 한 마디 굳게 떼어냈다.
"박경한, 유현우 씨와 나의 결혼을 허락한 사람이 바로 너야. 그리고 똑똑히 기억해 둬. 오늘부터 난,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완전히 밀쳐내고는 차갑게 말했다. "자중해 주세요."
박경한의 눈빛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서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박경한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업무용으로 설정한 벨소리였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드는 순간, 가까이 있던 안서영의 눈에 화면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 '유현우'라는 세 글자가 들어왔다.
박경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안서영이 도망칠 것을 우려한 그는 손을 뻗어 문을 잠그고 자신의 몸으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박 도련님." 전화 너머에서 장난기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약혼식 준비는 잘 돼가나요?"
박경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정식 예식은 10분 뒤에 시작됩니다. 모든 준비는 마쳤고, 잠시 후 비서를 통해 예식 영상과 사진을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전화 너머에서 남자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씨 가문이 내 약혼녀를 홀대하거나 절차를 대충 넘기진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럴 리 없습니다. 유 대표님, 염려 놓으십시오."
"내 약혼녀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잘 챙겨주세요."
박경한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두 남자의 통화 내용을 들은 안서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전화 너머 유현우의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통화를 마친 박경한이 안서영과 대화를 이어가려 할 때, 분장실 문이 밖에서 두드려졌다.
이어서 박태준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서영아, 화장만 고치면 되는데 왜 문을 잠갔어? 빨리 문 열어."
안서영은 미간을 찌푸리고 문을 가로막은 박경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켜."
박경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문 옆으로 비켜섰다.
이것은 그와 안서영이 3년 동안 지켜온 불문율과도 같았다.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은 절대 누구 앞에서도 함께 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경한이 익숙하게 몸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안서영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도둑질하듯 몰래 연애를 한 지 벌써 3년이라니.'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문을 열고 문 앞에 선 박태준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왜? 아저씨랑 아주머니께서 날 기다리셔?"
"아니, 그건 아니고." 박태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차에서 네 남자친구한테 연락해서 널 데리러 오라고 했잖아. 그 사람 지금 어디쯤이래?"
"그 사람, 이제 안 와." 안서영은 분장실에 숨은 박경한을 흘깃 쳐다보며 입 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우리 헤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