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우정이한테 골수 기증을 하기 싫어서. 별 거짓말을 다 하는구나."

강신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롱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1년 동안 피임을 철저히 했는데 어떻게 임신을 했다는 거야?"

시아린의 표정이 순간 굳더니 이내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2개월 전. 시아린은 강신우의 비서에게 이끌려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날 밤, 강신우는 처음으로 커다란 붉은 장미 꽃다발을 그녀에게 선물했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날 밤은 많이 뜨거웠다.

콘돔을 써야 한다는 시아린의 말에 그는 웃으며 그녀의 귓볼을 깨물었다. 이어 그가 섹시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

"오늘은 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그날, 시아린은 너무 행복했다. 건강검진에 이어 꽃다발, 그리고 지금 그와 살결을 맞댄 이 순간까지... 시아린은 그가 끝내 자신에게 감정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며칠 동안 그의 평소와 달랐던 모습들은 전부 시우정 때문이었다.

항상 냉철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던 그를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만들 만한 사람은 시우정 밖에 없었다.

지금 보니 당시 술에 취한 탓인지, 그는 그날의 일을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침묵에 식탁 너머의 시우진은 그녀의 임신 고백이 단지 골수 기증을 거부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확신했다.

"시아린."

강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사촌 언니인 우정이한테 별 감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이어 그는 검은 색 카드 한 장을 식탁에 올려 놓았다.

"20억이야. 네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

세련 돼 보이는 검은색 카드 위에 금박으로 새겨진 'S' 이니셜이 유난이 눈에 띄었다.

시아린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결혼한 1년 동안, 그에게서 받은 생활비와 선물을 다 합쳐도 2억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20억을 선뜻 내 놓은 것이다.

"돈 말고도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만 해."

시아린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골수 기증만 해준다면, 무슨 조건이든 다 들어줄게."

시아린은 고개를 들어 강신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너무도 차가웠고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치 사업장에서 거래를 진행할 때나 보일 듯한 보습이었다.

'함께 지낸 1년, 애틋했던 순간들은 전부다 나의 꿈이었던 걸까?'

하지만 뱃속의 아이가 꿈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고 있다.

가슴이 먹먹해진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한참 뒤에 다시 눈을 뜬 시아린은 무슨 결심을 한 듯 강신우를 똑바로 바라 봤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던, 난 골수 기증은 하지 않을 거에요."

강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시아린은 굴하지 않고 더욱 단호하게 이어서 말했다.

"내가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로 보인다면 당장 이혼을 해도 돼요."

애초에 강씨 가문의 안주인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강신우의 마음 속엔 그녀의 자리가 없으니 말이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오직 뱃속의 아이 뿐이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강신우를 위해 뱃속의 아이를 포기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식탁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강신우의 마음 속에 밀려들었다.

여태 그에게 순종적으로 헌신했던 그녀다. 그가 뭐라고 하던 그녀는 군말 없이 따랐고 항상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마치 발톱을 드러낸 맹수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말을 거절한 건 물론이고 심지어 먼저 이혼을 입에 올렸다.

그때, 강신우의 전화기가 울렸다.

"응, 우정아."

상대가 시우정임을 확인한 강신우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고 눈빛 마저 다정해졌다.

"무슨 일이야?"

워낙 조용했던 터라 시아린은 둘의 통화 내용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시우정이 울먹이며 말했다.

"신우야, 나 너무 아파..."

그녀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침대에서 내리다가 부주의로 넘어지는 바람에 주사 바늘이 빠져서 피를 많이 흘렸어... 나...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니겠지?"

"조금만 기다려, 바로 갈게."

강신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는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며 한편으론 다정한 목소리로 시우정을 진정시켰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여전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시아린을 바라보았다.

"이혼은 네가 홧김에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니야. 이혼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말을 이었다.

"골수 이식은 신중하게 생각해 봐. 늦게라도 집에 들어 올 테니, 먼저 자."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시아린은 자신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우리 애기.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꼭 지켜 줄 게."

강신우가 자신 대신 시우정을 선택한 이상, 시아린 역시 강신우를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회차 3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다.

긴 밤, 시아린은 뒤척이며 잠에 들지 못했다. 지난 1년 동안 강신우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강신우의 할아버지와 시아린의 할아버지는 막역한 사이였다. 집안은 서로 왕래가 잦아, 그녀는 어릴 적부터 강신우를 알고 지냈다.

당시 8살 꼬마였던 강신우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검은색 슈트를 차려 입고 있었고 무뚝뚝한 얼굴로 일관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면, 5살된 시아린은 그를 볼 때마다 그의 주위를 맴돌며 같이 놀자고 졸랐다.

매너가 좋았던 강신우는 싫은 티를 내지 않고 그녀와 놀아 주었고 살뜰하게 챙겼다.

한번은 그녀가 장난치다 호수에 빠져 자칫 죽을 뻔 했다.

그때, 강신우는 주저 없이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그녀를 강가에 끌어내 인공호흡까지 한 끝에 겨우 그녀를 살려냈다.

그날, 간신히 눈을 뜬 그녀는 흐릿한 시선 속에서 천사를 보았다.

나중에 그녀의 부모님이 차 사고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녀는 시씨 가문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시아린은 시골로 내려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고 다시는 A시에 돌아 가지 않았다. 강신우를 다시 만날 기회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1년전, 큰아버지가 갑자기 그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사람들은 시아린이 가난한 시골 생활에 질려 부귀영화를 위해 강신우와 결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직 그녀만이 알았다. 1년 전 그날 밤, 강신우와 결혼하라는 말에 얼마나 기뻤고, 가슴은 또 얼마나 뜨겁게 뛰었는지 말이다.

이제야 깨달았지만 그건 모두 한낱 달콤한 꿈에 불과했다.

이젠 꿈에서 깨야 할 때가 되었다.

창 밖에선 거센 비바람이 몰아 쳤고 천둥과 함께 번개가 번쩍였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녀는 점차 마음이 차분해 졌다.

다음 날 아침, 시아린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더니 강신우의 어머니 정미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지금 때가 언젠데 너는 아직도 자고 있는 거니? 어쩌다가 너 같은 걸 며느리로 들였는지 참..."

결혼 내내 매일 같이 들어 왔던 모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묵묵히 인내했다. 그건 그녀가 나약해서도, 성격이 유해서도 아니다.

정미옥과 갈등이 생긴다면 강신우가 난처해 질 걸 알았기에 그녀는 여태 참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글로벌 기업의 대표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여 시아린은 사소한 집안일로 이미 힘든 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오늘, 시아린은 더 이상 참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정미옥은 계속해서 모진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1년 전,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너 같은 건 강씨 가문 문턱도 넘지 못했을 거다! 넌 내 아들한테 어울리지 않아, 어림도 없다고!"

시아린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결혼이 저 혼자만의 결정은 아니었잖아요."

시아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어머님,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제발 아드님을 설득해서 저와 이혼을 하게 해주세요. 나중에 더 좋은 며느리를 들이면 되잖아요. 1년 전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한 건 맞지만, 이제 위기도 다 지나갔잖아요? 아닌가요?"

시아린이 받아 치자 정미옥은 말문이 막혔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 갖은 폭언과 시비에도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던 그녀가 반발을 하자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년이 미친 건가?!'

"저기요. 이른 아침부터 이런 어줍잖은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거신 거에요? 그렇게 한가하시면 아드님한테 이혼하라고 설득하시지 그러세요. 전 피곤해서 좀 더 자야겠어요. 끊을게요."

정미옥이 뭐라 하기 전에 시아린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미옥은 화가 치밀어 눈이 뒤집혔다.

시어머니인 자신한테 이렇게 버릇없이 말하는 건 물론이고 나중에는 아예 '저기요'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하찮은 년이, 감히!'

정미옥은 부들거리며 강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아린, 그년 정말로 미친 거 아니니?"

통화가 연결 되자마자 정미옥은 대뜸 욕지거리부터 내뱉었다.

"깨우려고 전화를 했을 뿐인데 그년이 건방지게 감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널 설득해서 이혼을 시켜 달라고 하더라! 걔 머리가 어떻게 된 거 맞지? 이게 말이 돼?"

한편, 강신우는 병원 복도에 서서, 비에 젖어 한결 푸르른 나뭇잎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

"아린이가 정말 그런 말을 했어?"

"그렇다니까!"

정미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 내가 항상 말했지, 빨리 걔와 이혼하라고. 그때마다 넌 이런저런 핑계로 회피했잖아. 이번엔 걔가 먼저 이혼을 입에 올렸어. 네가 무슨 생각이던 중요하지 않아! 당장 이혼해! 네가 시골에서 올라온 계집애와 결혼한 뒤로 우리 가문이 얼마나 손가락질 받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 너..."

"엄마."

강신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린이가 어제 밤새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잠을 설쳐서 그러는 걸 거야."

그는 손목에 채워 진 값비싼 시계를 힐끔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이제 겨우 7시야, 오늘 무슨 중요한 일도 없는데 왜 자는 애를 깨우고 그래."

휴대폰을 귀에 댄 강시우가 몸을 돌리자 병원복을 입은 채 병실 문 앞에 힘없이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일단 끊을게."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시우정에게 다가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왔어?"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시우정이 문에 손을 짚은 채,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방금, 아줌마와 통화하는 걸 들었어. 이혼에 대해 말하는 것 같던데? 설마 나 때문이야?"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들었다.

"신우야... 나...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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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집착: 후회해도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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