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박지효의 시점:
"더 할 말이라도...?" 나는 믿을 수 없는 듯이 물었다.
"내일 은혜 보러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해." 김현빈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알았어."
나는 혼란스러웠다. 겨우 이 말을 하려고 돌아온 건지 의심이 들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잘게." 그가 덧붙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정말 여기서 밤을 보내도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말을 삼키기로 했다.
"시차 때문에 네가 늦잠을 잘까 봐 걱정이 돼서." 그는 설명했지만 내 혼란스러운 얼굴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알겠어. 그럼 객실을 청소해야겠네."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섰고, 짐 가방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다가와 내 앞을 막아 섰다.
"왜 피하려는 거지?"
나는 그의 차가운 눈을 바라보며 그를 일깨웠다.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것 뿐이야. 3년 전에 나한테 그랬잖아. 너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기억 안 나?"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서려 있었다.
"여기서 자."
그의 시선에 나는 가방을 놓칠 수밖에 없었고, 가방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내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그는 거기 앉아 셔츠를 풀고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난 소파에서 잘게."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나는 상상의 펼친 스스로의 머리를 때리고 꾸짖었다. 방금 응큼 세포가 깨어난 것이다. 나는 말 없이 짐 가방을 집어 들어 옆에 놓았다.
나는 김현빈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가 옷을 벗고 옷장을 열어 새 옷을 꺼내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마침내 그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다. 내 꿈의 남자, 나의 법적 남편이 지금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다. 화장실에 갔지만, 여전히 그의 향기가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그 향기는 정말 좋았고, 나를 안달 나게 만들었다.
나는 침대로 가서 조심스레 누워 몸을 움츠리고 욕실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마침내 소리가 멈추자, 나는 얼른 눈을 감고 잠을 자는 척했다. 일부러 숨도 천천히 쉬며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도록 노력했다.
객실이 많이 있는데 그는 왜 굳이 나와 같은 방을 쓰려고 하는 것일까? 3년 동안 보지 못했더니, 이 남자는 정말 점점 더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침묵이 오랫동안 유지되자 나는 몰래 눈을 떠 김현빈을 바라봤다. 그는 소파에 누워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침내 몸의 긴장을 풀었다. 오늘 밤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실망감이 들었다.
***
내가 일어났을 때 김현빈은 이미 떠났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벌써 오전 10시였다!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려와 최대한 빨리 씻고 방 밖으로 나오자, 김현빈이 거실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왜 안 깨웠어?!" 나는 격렬하게 소리쳤다.
"깨웠어. 찬물을 뿌릴까도 생각했지." 김현빈은 말을 하면서도 읽고 있는 책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목소리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미안해. 어제 조금 피곤했거든. 이제 가자." 나는 미안한 듯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너무 푹 잔 것 같았다.
"먼저 뭘 좀 먹지."
"네? 그럼 은혜 씨가..."
"서두를 필요 없어. 점심 때 만날 거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어쩌면 그는 나를 속이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한 뒤, 얼른 가자고 그를 재촉했다. 이은혜를 만나고 싶어서 서두른 것이 아니고 그저 이 일을 가능한 빨리 끝내기를 원했을 뿐이다.
나는 레스토랑으로 가는 내내 침묵을 유지했고 김현빈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서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지금 남편과 함께 그의 약혼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차가 드림 레스토랑에 멈췄다. 이곳은 별이 3개 달린 미슐랭 식당이었다. 사실, 나는 이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고 김현빈은 내가 김 씨 부인이 된 후에도 나를 이곳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웨이터가 다가와 인사했다. "김현빈 님, 이은혜 님이 2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웨이터의 인사로 보아 김현빈은 아마 이곳의 단골 손님일 것이다.
나는 말없이 김현빈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은혜를 만나면 웃어. 시무룩한 얼굴 하지 말고." 김현빈이 차갑게 명령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효 씨, 오랜만이에요!" 우리가 룸에 들어서자마자 이은혜가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나이가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히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 붓고 있을 것이다. 인상적이게도, 그녀의 얼굴은 영화에서 나온 것과 똑같았다. 오랜 시간 병으로 앓은 환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시차는 적응했어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돼서 약속 시간을 정오로 했어요."
"네, 고마워요. 어젯밤에 아주 푹 잤어요. 어쨌든 고향에 돌아온 거니까요."
"지난 3년 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전부 내 탓이에요. 현빈 씨가 여기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이은혜는 기침을 했다. 그러자 신호를 받기라도 한 듯, 김현빈이 그녀에게 물이 든 잔을 건넸다.
그는 오늘 이은혜를 만나자 마치 그의 몸을 얼린 얼음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나를 대하는 태도와는 완전히 천양지차였다.
오늘의 메인 메뉴는 스테이크였다. 김현빈은 이은혜의 접시에 있는 스테이크를 신중하게 자르고 있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사려 깊은 그의 모습은 흔치 않았다.
"난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잘 지내는 걸요. 사실, 얼마 전에 졸업장을 받았어요." 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스테이크를 자르려고 애쓰면서 이은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프랑스에 3년 동안 있었잖아요. 남자친구 있어요? 우리는 올해 간 영화제로 신혼여행을 갈 거예요."
남자친구? 나는 헌신적인 김 씨 부인으로서, 결혼 중 다른 남자와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여전히 김현빈에게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 네, 사실 있어요. 거기서 남자를 만났어요. 그 사람은 예술가예요." 나는 곧 그녀에게 소개해줄 남자를 떠올렸다. 어제 김현빈이 했던 말처럼, 이은혜를 안심시켜야 했다.
나는 곁눈질로 그를 봤다. 그는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는 손이 살짝 떨었고 잠시 몸을 굳혔다.
"사진 있어요?" 이은혜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녀의 호기심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김현빈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음,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서 핸드폰에 그 사람 사진을 저장하지 않았어요." 나는 이유를 설명하며 계속해서 스테이크를 잘랐다.
"그 사람, 페이스북 해요? 어쩌면 거기에 사진을 올려뒀을지도 모르잖아요. 보고 싶어요." 이은혜가 재촉했다. 그 사람을 직접 보기 전까지 이 얘기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 확인해 볼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동기 중 누구를 보여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먼저 떠오른 사람은 피에르 마틴이었다. 나는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방문하여 곧바로 그가 에펠 탑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다. 그는 헝클어진 긴 머리에 젊고 잘생긴 남자였다. 피에르 마틴과 김현빈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전자는 예술적이고 물 흐르듯 유연한 성향이었고, 후자는 냉정하고 내성적이었다. 나는 이은혜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화면에 있는 피에르 마틴의 사진을 보였다.
사진을 보자마자 그녀의 눈이 행복으로 반짝였다. "오! 예술적이고 자유분방한 파리 남자 같네요. 정말 잘 됐어요, 지효 씨. 결국 현빈 씨와 나는... 미안해요." 그리고 그녀는 김현빈에게도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사진을 힐끗 봤다. "어울리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내 이은혜는 내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그 분도 여기로 올 계획은 있는가요?" 그녀는 들뜬 듯이 물었다.
"이 사람은 아직 유럽에 있어요. 리옹에서 예술 전시회를 개최 중이거든요. 하지만 경력을 쌓기 위해 다음 달에는 여기로 올 거예요." 내 입에서 나온 모든 것은 허구일 뿐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은혜를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튼 나랑 김현빈이 이혼 합의서에 서명만 하면 다시는 이 여자를 볼 일이 없을 것인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피에르 마틴을 여기로 데려와야 할지 고민까지도 해야 한다.
"그 사람을 사랑해요?" 이은혜는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물론이에요." 나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답하면서, 그녀가 나를 꿰뚫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다행이네요! 현빈 씨, 지효 씨 걱정할 필요 없겠어. 지효 씨의 행복을 빌어 주자고!" 이은혜는 신이 나 잔을 들어올렸다.
김현빈도 잔을 들어올렸다.
"지효 씨, 나와 약속해줘요. 꼭 행복할 거라고." 이은혜는 그 말을 하면서 진지하게 나의 눈을 바라봤지만 난 무언가를 깨닫고 말았다. 보기에는 친절하고 천진한 것 같지만 그 가면 뒤에 숨겨진 것은 추악한 마음이라는 것을.
"물론이죠. 당신도 행복하길 빌어요."
우리는 약속하는 의미로 와인을 들이켰다.
잔을 내려 놓자, 나는 갑자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뿐만 아니라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식사가 얼른 끝나기를 바라며 더 이상 이 위선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화장실 좀 다녀 올게요."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양해를 구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메스꺼운 속을 누그러뜨리고 싶었다.
잠시 후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혜 몸이 안 좋아. 데려다 주고 올게. 그런 다음 내가..."
"괜찮아. 혼자서 갈 수 있어."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나는 무력하게 두 사람이 서로 안기며 식당을 나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갑자기 긴장되어 있던 몸의 근육이 풀렸다.
회차 3
김현빈의 시점:
나는 은혜를 집에 보내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이 되자, 정원의 문자를 받았다..
"현빈아, 너도 올래? 다들 같이 있어."
"그래. 금방 갈게."
나는 사무실을 나서면서 문자를 써 내려갔다.
민트 바는 정원의 소유였다. 거기는 이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 중 하나였고, 오늘 밤에 특히 붐볐다. 들어가자마자, 정원과 수빈이가 보였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지효는 만났어?" 내가 앞에 서자마자 묻기 시작했다.
"응." 나는 그에게 대답하며 바텐더에게 위스키 한 잔을 부탁했다.
"정말 이혼하는 거야?"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맞아." 나는 불만스럽게 대답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지효 얼마나 착한데, 우리 같이 자랐는데도 모르겠어? 너랑 이은혜는 참 독한 사람이네."
바텐더가 음료를 내 앞에 놓아주자, 난 천장으로 연기를 뿜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제 그녀와 이혼 얘기를 하면서 갑자기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화하는 동안 그녀는 계속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 3년을 보지 못한 사이에 그녀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소녀로 부터 성숙하고 나름 생각이 깊은 어른으로 자란 것 같았다.
차분한 태도의 그녀를 다시 보니 마음이 조금 답답했다.
"지효도 동의했어?" 정수빈이 궁금한 듯 물었다.
"응, 동의했어."
이쯤 되자, 나는 이 사람들을 만나러 온 것이 후회됐다. 나는 그냥 술만 조용히 마시고 싶었는데 이 자식들은 심란하게 만드는 질문만 하고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말 은혜랑 결혼하는 거야?"
"응."
"진짜로? 은혜가 너를 구해줬다고 해서 네 행복까지 희생하려는 거야?" 나의 대답을 들은 수빈은 감정적으로 나왔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실수로 와인을 내 옷에 쏟았다.
"야!" 나는 화를 내며 욕을 했다.
"쏘리." 정수빈이 즉각 사과했다.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그곳에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집에 가기로 생각하면서 기사에게는 가든 거리로 가 달라고 요청했다.
***
내가 도착했을 때, 집에는 불이 밝게 켜져 있었고, 열린 창문으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차가 차고에 주차되어 있었다.
나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방문한 것 같았다.
난 빠르게 문으로 걸어갔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벌컥 열었다.
"어디에 있었니? 전화는 왜 안 받아?" 어머니가 다가와 나를 꾸짖었다.
"회의 중이었어요, 어머니."
"그리고 웬 술 냄새니? 술 마셨니? 세상에, 엉망이구나. 가서 옷 갈아입어." 그녀는 코를 찡그리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는 할머니와 박지효가 보였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과일과 사과 파이가 있었다.
"할머니." 나는 인사하러 가서 사과 파이 한 조각을 집어 들었지만 할머니는 내 손을 내려쳤다.
"손 대지 마라. 그건 지효 거야."
"현빈 씨, 무슨 일 있었어? 이리 와. 옷 갈아입어야지." 박지효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왔다.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 됐는데 왜 아직도 현빈이를 이름으로 부르니?" 할머니는 박지효에게 물으며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호칭에 문제가 있나요?" 그녀는 몸을 멈추고 질문했다.
"너희처럼 젊은 부부들은 배우자를 '자기야' 같은 애칭으로 부르지 않니?"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자... 자기야.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게."
그녀는 나를 도와 양복 재킷을 벗겨주고 진심 어린 미소를 보였다.
"그래야지."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매우 만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박지효를 아주 좋아했다. 박지효가 해외에 가 있던 몇 년 동안 할머니는 그녀에 대해 내게 자주 물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잠시 후, 할머니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빈아, 이번 주에 의사와 약속을 잡았다. 그때까지는 술 마시지 말아라. 정기 검진 받으러 가야 해."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건강 검진 받은 지 얼마 안 됐어요, 할머니. 아주 건강하대요."
"건강 검진을 또 받으라는 게 아니야. 좀 더 전문적인 검사란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 내 손자 손녀들은 어디 있지? 그리고 이건 절대로 지효 탓이 아니야. 네 탓이지."
박지효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씁쓸했지만, 또 웃고 싶은 것 같았다.
내가 변명을 하기 전에 핸드폰이 울렸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재킷을 들고 있던 박지효가 가슴 주머니에서 내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 명을 확인했다. 갑자기 바뀌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는 은혜에게서 온 전화라는 것을 알았다.
"그 여자니? 오, 제발 좀!" 어머니가 소리쳤다.
나는 박지효의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 들어 전화를 거부했다.
"이은혜니? 현빈아, 넌 이제 유부남이잖니. 왜 아직도 그 여자와 얽혀 지내는 거니? 지효한테 최선을 다 해야지. 이은혜가 웨딩 드레스를 입어보는 사진, 뉴스에서 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할머니가 잔소리를 했다.
"할머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전화는 왜 거절한 거냐?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라도 있는 거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할머니한테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꿰뚫어 봤다.
할머니가 분노에 손이 떨기 시작한 모습을 보고 박지효는 재빨리 물 한잔을 따라드렸다.
"할머니, 현빈 씨가 해명할 거예요. 그러니까 급하지 마세요. 우선 먼저 현빈 씨 옷부터 갈아입게 해주세요." 박지효가 말하며 나를 위층으로 이끌었다.
"세 번째 캐비닛에 흰색 셔츠가 몇 벌 있어."
그녀가 깨끗한 셔츠를 가져오는 사이 난 정수빈 때문에 더러워진 셔츠를 벗고 맨몸으로 서 있었다. 정수빈, 이 자식.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때, 뒤에서 소름 끼치는 정적을 느껴졌다. 나는 뒤를 돌았다.
박지효가 거기 서서 내 셔츠를 한 벌 들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뭘 봐?"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급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번에야 난 그녀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소녀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보낸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꽃봉오리에서 섬세한 장미로 변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떨리고 입술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일자로 꾹 다물어져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셔츠를 빼앗아 재빨리 입었다.
새 셔츠로 갈아입은 후, 우리는 함께 거실로 돌아갔다.
"나한테는 시간이 많지 않다, 현빈아. 왜 그냥 지효와 평화롭게 살 수 없는 거니? 왜 언제나 내 화를 돋우는 거냐, 응?" 할머니는 아직도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할머니, 다음에 오실 때는 전화하고 오세요. 제가 모시러 가면 되잖아요. 알겠죠?" 나는 아직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주제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아니, 됐다. 넌 늘 바쁘잖니. 폐는 끼치고 싶지 않다. 그저 네가 우리 지효를 잘 대하는지 보고 싶은 것 뿐이야."
"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박지효가 말했다.
"그럼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내일은 김 씨 그룹의 60주년 파티가 열리는 날이다. 현빈아, 지효가 파티에 입고 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드레스를 사줘라. 저렇게 예쁜 아내를 둔 네가 얼마나 행운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또 나를 언짢게 하지는 말고."
"네, 할머니."
할머니와 엄마와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에야 중지시키고 그들을 보냈다.
그 상황에서 나는 큰 소란을 일으킬까 봐 이혼을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