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맹유신의 긴 손가락이 연소연의 가면에 닿으려는 찰나, 곤히 잠들어 있던 연소연의 입꼬리가 슬며시 호선을 그리더니,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장난꾸러기 같으니라구. 또 아버지 얼굴을 몰래 보려 하는 것이냐!" 연소연은 말을 하면서 침상 바로 옆에 선 사람을 잡았다. '음? 어찌하여 이리 굵고 단단하단 말인가? 손에 잡힌 것이 보아의 얼굴이 아닌 것이더냐?'
낯선 감촉에 연소연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어 쥐고 싶어졌다.
그때, 머리 위로 불쾌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엄하군!"
일순간 방 안은 살기로 가득 차올랐다. 곧이어 강력한 강기(罡氣)가 사방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어깨 한쪽으로 강렬한 통증이 밀려오자, 연소연은 순식간에 온몸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허공에서 세 바퀴나 빠르게 회전한 뒤에야 가까스로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그 손은 이미 가루가 되어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연소연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연달아 손을 들어 올린 맹유신의 손에서 하얀 빛이 터져 나왔지만 무자비한 공격은 그칠 줄 몰랐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행궁은 마치 지진을 당한 것과도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연소연은 침착함을 유지한 채 일부러 맹유신에게 말을 걸며 그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원하는 것이 재물이라면,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으니라. 나는 결코 막지 않을 것이니라."
"마음대로 가져가도 된다 하였더냐? 본존 행궁의 물건을 감히 함부로 가져가도 된다 하였느냐? 누가 허락하였느냐!"
"설마! 난 여기가 우리 집인 줄 알았는데…?"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연소연과 맹유신은 이미 십여 차례 주먹다짐을 벌였다.
맹유신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다. 비록 삼계 통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삼계에 내려올 때, 스스로 세 겹의 대경지 내공을 억제하긴 했지만 눈앞 이 맹랑한 녀석의 무공 실력은 실로 대단했다. 연이은 공격에도 상처 하나 내지 못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맹유신의 눈에 흥미가 피어 오르더니 장심에 영력을 가득 모았다.
가볍게 손가락을 한번 휘두르자, 산을 가를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덮쳤다.
쿠궁쿵!
삼척 두께의 벽이 맹유신의 공격에 일고여덟 개의 구멍이 뚫려 나갔다.
희미한 먼지 사이로, 온몸이 부서졌어야 할 연소연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모습이 드러났고 한 마리 날렵한 제비처럼 단숨에 맹유신의 등 뒤 대들보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입술을 꼭 깨문 그녀는 날카로운 기세 속에서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무리 눈이 보이지 않아도 눈앞의 남자의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중삼계와 하삼계를 돌아다닌 그녀가 이렇게 실력이 강대한 강자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상삼계(上三界)의 고수일까? '하지만 상삼계의 인물들이 어찌 그리 쉽게 강림할 수 있겠느냐. 설마, 내가 이리까지 재수 없을 리가 있겠느냐!'
'됐도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이니라.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니라. 쳇! 그냥 잠깐 지나가다 하룻밤 묵었을 뿐인데, 저 개 같은 남자, 너무도 쪼잔하도다!'
'게다가 자기가 부순 것은 내가 한 것보다 훨씬 심하더이다. 대체 무슨 인간이란 말인가, 참으로!'
"태일(神龍)!"
손바닥을 하늘로 들어 올린 연소연이 맑은소리로 누군가를 소환하자, 그녀의 손바닥에 밝은 빛이 피어 올랐다.
아우!
하늘을 뒤흔들며 진동하는 용의 울음소리가 창공에 울려 퍼졌다.
우르릉, 쾅!
곧바로 어둠이 가득 깃든 하늘에 일곱 빛깔을 뿜어내는 거대한 용이 지붕을 부수며 나타났다.
거대한 몸에 빛을 발하는 용이 저택 주위를 맴돌더니, 지붕만큼이나 거대한 머리로 저택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압감이 넘쳤던지, 태산이 머리 위로 무너질 듯한 모습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단숨에 용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연소연은 두 개의 용뿔(龍角)을 손에 꽉 움켜잡았다. 황금빛으로 감싸인 그녀의 치맛자락과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마치 하늘에서 신이 강림한 듯한 위엄을 자아냈다.
거대한 용연행궁에 수천 명의 비녀(婢女)와 시위(侍衛)들은 믿을 수 없는 모습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지켜봤다.
신, 신룡이다!
게다가 상삼계의 최강 신수(神獸) 구천신룡의 혈통(血脈)이라니!
순간, 맹유신의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에 밝은 빛이 언뜻 비쳤다. 곧이어 싸늘하게 식은 입꼬리에 옅은 미소가 슬며시 번졌다. '맹랑한 녀석이 신룡도 조종할 수 있다니, 흥미롭군.'
용의 등에 올라탄 연소연은 맹유신과 협상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보아를 찾은 뒤 바로 행궁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맹유신을 발견한 구천신룡은 신룡의 위엄도 잊은 채 더없이 무서운 존재를 본 듯 당장에 등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다.
아우, 아우, 아우!
"태일 기다려. 보아가 아직..."
"아버지!"
익숙한 보아의 목소리가 바로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신룡 태일은 연소연을 등에 태운 채, 이미 백 리 너머 먼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신룡 태일을 통제한 뒤, 다시 행궁에 돌아가 보아를 찾아야 한다.
행궁으로 다시 돌아가는 동안, 그 난폭하기 그지없는 남자가 보아를 괴롭히는 광경이 자꾸만 머릿속을 뒤덮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제는 자신의 전부가 된 보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각,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맹유신은 빨개진 눈시울로 보아의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한 번 더 불러보거라..."
"아, 아버지..."
"승아(承兒)!"
그의 아들 맹요승(封耀承)은 3년 만에 드디어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맹유신은 단번에 보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작은 눈을 연신 깜박인 보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태일의 울음소리(龍吟)를 듣고 황급히 뒷간(茅房)에서 달려 나온 그녀는 태일의 등에 올라타 있는 연소연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다. '혹 이 잘생긴 아저씨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들이 있는 걸까? 아니면 아저씨도 어머니처럼 눈이 좋지 않아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몰래 이곳에 잠입해 지낸 것도 모자라, 어머니와 아저씨가 지붕까지 부숴가며 다투던 광경까지 떠올랐다. 만약 자신이 이 남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작은 눈망울에 빛이 언뜻 스친 보아는 얼렁뚱땅 넘어가기로 했다. 우선 목숨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니 말이다.
아저씨의 아들이 말하기 싫어한다니, 그녀도 말을 많이 할 수 없다. 더 말을 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안 되니 말이다.
두 사람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낮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사람들 틈에서 마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어멈이 달려 나와, 얼굴 가득 불쾌한 기색을 띤 채 보아의 팔을 홱 낚아챘다.
"소인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소전하(小殿下)께서 어찌 신황 폐하(神皇陛下) 계신 곳으로 오신 것이옵니까? 폐하의 정무를 더 이상 방해치 않도록, 소인과 함께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들어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소, 소전하, 어찌 말을 할 수 있게 되신 것이옵니까?"
화들짝 놀란 조 어멈은 이내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말씀까지 하실 수 있게 되시다니,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우리 군주께서 아신다면, 기쁨에 병마도 순식간에 물러가실 터이옵니다…"
조 어멈은 말을 하면서 또다시 보아의 손을 잡아 끌려 했다.
소전하를 신존(神尊)의 곁에 데려온 날, 군주께서 신신당부까지 하셨다. 소전하의 곁에서 한 발짝도 멀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소전하가 신존과 가까워질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천한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 어멈은 온화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띠었으나, 보아의 손을 쥔 채 힘껏 잡아끌어, 하마터면 팔이 뚝 부러질 뻔했다.
만약 순순히 조 어멈을 따라간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잘생긴 아저씨가 신황(神皇)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보아의 눈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어머니께서 그러셨지. 신황은 신족의 왕으로, 상삼계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 하셨거늘. 그런 신황이 사람을 착각하다니. 어머니처럼 하늘이 만든 이들도 눈은 먼 것이 분명하도다!'
진짜 승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아무의 손을 잡고 가지 않을 것이었다. 마음을 굳힌 그녀는 맹유신의 목을 꼭 끌어안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애원하였다.
"승이 무섭사옵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도 되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