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낮게 드리워진 구름 사이로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밤. B시의 하늘에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세차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폭우에 온몸이 젖은 강은정이 케이크 상자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드림 클럽에 도착했다.

VIP 룸 앞에 선 그녀가 손잡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한예은, 네가 갑자기 사라진 3년 동안 박세훈이 널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알아? 이제야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네."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다시 룸 앞에 멈춰 서야만 했다.

한예은? 설마 박세훈이 아직까지 잊지 못한 전 여자 친구 한예은인 걸까?

"세훈 씨 결혼했다고 했잖아?" 뒤이어 나긋한 목소리의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은아, 넌 그 여자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세훈이 아빠가 네 목숨을 담보로 세훈이를 협박했어. 세훈이가 그때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네 목숨이 위험해졌을 거야. 세훈이는 널 지키기 위해 그 여자와 결혼한 거고."

"정말이야?" 한예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그렇지 않으면 박세훈이 강은정과 결혼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 돼지처럼 뚱뚱한 데다 생긴 건 얼마나 못생겼는지. 게다가 사생아 출신에, 박세훈이 아버지한테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강은정과 결혼했잖아."

본의 아니게 VIP 룸 밖에서 가만히 엿듣게 된 강은정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3년 전, 박세훈이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설레는 마음에 밤새 눈도 붙이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이렇게 잔혹한 진실이 숨겨져 있을 줄 누가 알기나 했을까.

그때의 그녀는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지냈었다. 못생기고 뚱뚱한 데다 사생아인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다니...

하얗게 질린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 강은정은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으나 문손잡이를 꽉 잡고 다시 몸을 가다듬었다.

"그나저나 다섯 시간이 다 돼가는데 강은정은 안 오는 거 아니야? 게다가 딜라 디저트는 동교 부근에 위치해 있잖아. 왕복 3시간도 넘는 거리에 대기가 어마어마할 텐데. 강은정이 아무리 멍청해도 폭우를 뚫고 다녀올 만큼 멍청하진 않겠지."

"박세훈의 요구라면 딜라 디저트가 아니라 이웃 나라까지 다녀왔을 거야. 강은정이 박세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서 그래?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안에서 들려오는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강은정은 태연한 얼굴로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문고리를 힘껏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소파에 기대앉은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편안한 모습으로 소파에 기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남자의 몸에서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흘러 넘쳤다.

짙은 이목구비에 오만한 표정까지, 어느 각도로 보나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했다.

이 남자가 바로 강은정의 남편이자 전황 재단의 대표인 박세훈이다.

강은정이 룸 안으로 들어오자 떠들었던 룸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때, 조롱 섞인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예은아, 세훈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여기 있네. 이렇게 생겼어."

강은정의 현재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폭우에 흠뻑 젖은 옷은 그녀의 몸에 꼭 달라붙어 울퉁불퉁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축축한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에 자리한 검은 반점도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진 것 같았다.

강은정은 그녀를 무시하는 박세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케이크를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세훈 씨, 당신이 부탁한 케이크 사 왔어요."

박세훈은 그녀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케이크를 한예은에게 내밀었다. "얼른 먹어."

한예은은 쑥스러운 듯 싱긋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 은정 씨한테 부탁할 줄 몰랐어요."

그의 말에 강은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날카로운 비수가 그녀의 심장에 날아와 마구 난도질해 놓은 것 같은 통증이었다.

그녀가 다섯 시간이나 고생하며 포장해 온 케이크가 한예은을 위한 것이었다고?

"예은아, 세훈이 널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이제 알겠어? 네가 원한다면 케이크가 아니라 하늘의 별까지도 따다 줄 수 있는 놈이야."

"그래,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 말고 얼른 먹어. 은정 씨가 다섯 시간이나 고생하며 포장해 왔는데, 무시할 수는 없잖아."

소매 아래로 떨군 강은정이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광대가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박세훈이 긴 다리를 이용해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거실 탁자 위에 이혼 서류가 있을 거야. 집에 돌아가자마자 사인부터 해."

회차 2

"이혼 서류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얼굴에 핏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 강은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입술로 되물었다.

박세훈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답할 뿐이다. "애당초 당신과 결혼을 결심했던 건,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는 것과 동시에 예은이를 지켜주기 위함이었어. 이제 예은이가 안전하게 돌아왔으니 내가 잘 지켜줄 거야."

강은정은 그의 말 속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아버지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체면만 깎는 아내를 곁에 둘 필요는 없다는 것.

여기까지 생각한 강은정의 입 꼬리에 어느새 자조적인 미소가 번졌다. 다만 그 미소에는 체념과 씁쓸한 아이러니가 가득할 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박세훈을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절망과 아주 작은 희망의 끈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대가 차 있었다. "세훈 씨, 우리가 함께한 지난 3년 동안. 당신은 정말, 정말 날 이용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서 차가운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예요? 설마 세훈이가 은정 씨를 좋아하길 바랐던 거예요?"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돼지처럼 생겼잖아."

강은정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잔인한 모욕에도 불구하고 박세훈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고집스럽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바로 그의 입술을 비집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녀의 두 눈에 순식간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그녀는 누군가 그녀의 심장을 도려내 바닥에 내던져 짓밟는 것 같은 느낌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허탈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집에 돌아가면 바로 사인할게요."

"내일 오전 10시. 법원에서 만나." 박세훈은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소파에 돌아가 앉았다.

강은정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려 천천히 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한예은의 애교 가득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세훈 씨, 나 과식했나 봐요. 케이크 버려도 돼요?"

그 말을 들은 강은정은 다시 자리에 얼어붙어야만 했다.

"마음대로 해."

박세훈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눈을 꼭 감자 뜨거운 눈물이 빗물과 함께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일 빠른 속도로 클럽을 나선 그녀는 신혼집인 리베리 빌라로 돌아왔다.

박세훈이 클럽에서 말했던 것처럼, 거실 탁자 위에는 이혼 서류가 놓여져 있었다.

가슴이 바닥에 내려앉는 것을 느낀 그녀가 서류에 적힌 합의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이혼에 동의하면 위자료 600억에 고급 별장 두 채를 그녀에게 선물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박세훈은 그룹 대표의 명성에 걸맞게 대범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3년 동안 이용한 대가를 아주 톡톡히 지불하려는 것 같았다.

3년이라는 결혼 생활과 600억에 고급 별장 두 채를 맞바꾼다면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씁쓸하게 미소 지은 그녀는 망설인 끝에 이혼 서류에 사인했다.

"똑." 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 것을 본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한 것을 느낀 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하자 담당 교수님께서 그녀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내온 것이다.

"은정아, 아직도 결정 못 내린 거야? 이번 유학 신청은 인생에 다신 없을 좋은 기회야. 후회하지 말고 잘 선택해."

강은정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여태껏 내리지 못했던 결정을 내리고 답장했다. "선생님, 저 유학 가겠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망설였다.

이제 망설일 이유도 필요도 없어진 지금 반드시 기회를 붙잡을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도 새로운 삶에 발을 내디딜 기회가 생겼고, 앞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 것이다.

메시지에 빠르게 답장한 그녀는 휴대폰을 챙기고 필요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전날 폭우를 맞은 탓에 고열에 시달린 그녀였지만, 몸이 불편한 것을 꾹 참고 약속 시간인 10시에 법원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11시가 넘어도 박세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박세훈에게 전화를 건 강은정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한예은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훈 씨, 나 좀 도와줘요."

뒤이어 박세훈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한 일이 생겨 법원 일정을 다시 조절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통화는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이미 어두워진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는 강은정은 단전에서부터 쓴 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무거운 마음으로 박세훈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송한 그녀는 SIM 카드를 빼서 가장 가까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휴대폰만 주머니에 넣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오늘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 그녀가 M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강은정은 비행기에 탑승하면서, 박세훈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회차 3

3년 후, B시 차씨 가문.

화려하고 커다란 연회장에는 한껏 치장하고 참석한 사람들로 붐볐다.

B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4대 가문 중 하나인 차씨 가문은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화려하기 그지없는 연회는 차씨 가문 가주 수양딸이 해외에서 돌아오는 것을 축하해 주는 자리였다.

연회장에는 B시의 명문 가문 인사들이 거의 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세훈, 강은정이 오늘 귀국한다던데, 사실이야?" 연회장 구석진 자리에 앉은 이문철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박세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와인잔을 손에 쥔 박세훈이 조금 멈칫 하는 것 같더니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이내 고개를 끄덕여 사실을 인정했다.

몸에 꼭 맞춘 듯한 파란색 정장을 입은 박세훈은 웅장한 연회장 속에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며 주눅들지 않았다.

"드디어 돌아왔네." 이문철은 박세훈의 곁에 선 한예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더 빨리 이혼할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 됐어. 한예은 축하해. 네가 박씨 가문 사모님이 되는 건 시간문제겠네."

그 말에 한예은은 쑥스러운 듯 싱긋 미소 지었다. "세훈 씨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녀의 말과 달리 박세훈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이 그녀가 그와의 결혼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세훈은 손에 쥔 와인잔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면만 주시했다.

한예은의 기대 가득한 눈빛을 알아차린 이문철이 계속해서 설명을 보탰다. "세훈이 너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데, 강은정과 이혼하면 바로 너와 결혼할 거야. 내 말 맞지?"

박세훈은 두 사람의 대화에 대꾸하지 않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한 한예은이 막 입을 떼려 할 때, 연회장 입구가 웅성거리는 것이다.

하이힐 굽이 바닥에 떨어져 청아하면서도 맑은 소리를 낼 때마다 사람들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깊은 V넥에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앞으로 걸을 때마다 우아하면서도 매혹적인 몸짓이 그대로 드러났다.

화려한 드레스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몸매와 자태는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주먹만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눈은 짙은 아이라이너로 더욱 강조되었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에게 정신이 홀딱 팔려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상에, 저 여자 누구야? B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존재했었어? 왜 난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지?" 이문철이 놀란 얼굴로 감탄하자 곁에 선 한예은도 그의 말을 찬성했다.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네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 박세훈의 두 눈이 크게 떠지는 것 같더니 이내 가늘어졌다.

"내 마음을 이렇게까지 설레게 한 여자가 얼마만이야. 지금 당장 연락처를 알아내야겠어. 좋은 소식 기대해." 한껏 들뜬 얼굴인 이문철은 옷 매무새를 다시 하고 여자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예쁜 아가씨 반가워요. 제 소개부터 하죠. 저는 이씨 그룹 회장의 아들 이문철이라고 해요. 아가씨와 친구가 될 기회가 있을까요?"

강은정은 온몸에 페로몬을 뿜어내며 다가온 이문철을 보더니 싱긋 미소 지었다.

박세훈의 친구들 중에서 그녀에게 모진 말을 뱉으며 조롱하고 무시했던 사람이 바로 이문철이다.

그가 그녀에게 지어준 모욕적인 별명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었는데.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먼저 작업을 걸어오고 있다니.

이 상황을 가만히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흥미진진한 미소가 번졌다.

이문철은 강은정의 입 꼬리가 매혹적으로 곡선을 그린 것을 보고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강은정이 빨간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입을 떼려 할 때,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낮고 두꺼운 남자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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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아내, 세상이 탐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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