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이혼하자."
화면에 비친 네 글자를 읽은 백이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혼 3주년을 기념해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던 백이슬은, 남편이 집에 오고 있다는 연락일 거라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차가운 네 글자가 그녀의 모든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TV에서는 연예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씨 그룹의 대표인 조운성 씨가 인기 배우 윤청여 씨를 위해 초호화 크루즈를 통째로 예약했습니다. 두 사람이 몰디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자, 항간에는 이들의 결혼설이 돌고 있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죠."
백이슬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조운성이 정말 다른 여자가 생겨서 이혼을 요구한 걸까?
얼굴도 보지 않고 문자 하나로, 이렇게 차갑고 무심하게 모든 걸 끝내려 하다니. 그동안 그에게 쏟아온 사랑과 정성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백이슬은 바로 전화를 넣었다. 긴 신호 끝에 마침내 전화를 받은 상대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조운성, 나한테 할 말 없어?" 백이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할 말?" 조운성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람 나서 나랑 이혼하려는 거잖아. 최소의 설명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백이슬, 유치하게 굴지 마. 바람 같은 거 안 피웠으니까. 우리가 어쩌다 결혼하게 됐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3년이면 충분해. 더는 강요하지 마. 기사를 보냈으니까, 법원으로 가. 집이랑 돈은 얼마든지 줄게. 원하는 액수만 말해. 그리고 바쁘니까 전화하지 마."
조운성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백이슬은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3년이란 시간 동안, 그를 기다리고 또 기대하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조운성이 결혼 전에 교통사고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당시 그의 여자친구이던 사람은 그를 버리고 떠났다. 결국 그의 곁을 묵묵히 지킨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녀는 조운성의 온갖 투정을 참으며 손수 밥과 빨래를 해주기도 했다.
심지어 의사는 그가 다시 일어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몰래 치료해 준 끝에, 반년 만에 조운성은 기적적으로 다시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걸은 첫걸음은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발걸음이었고, 그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3년 동안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연락을 취한 것이 이혼 때문이라니.
백이슬은 오늘을 위해 준비한 저녁을 바라보았다.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든 음식들, 그가 놀라길 바랐던 마음... 오늘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의 외모가 확실히 유명 배우인 윤청여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독극물로 인해 얼굴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호르몬 때문에 체중도 급격히 늘어 100kg에 가까운 거구가 되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뛰어난 의술 덕분에, 3년간 치료한 끝에 체내의 모든 독을 제거하고 본래의 모습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백이슬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랄 조운성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도 이제는 헛된 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남자를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백이슬이 밖으로 나가자, 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모님."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백이슬은 아무 말없이 차에 올라탔고, 차는 법원으로 향했다.
법원에 도착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백이슬은, 주저 없이 친구 민아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름아, 나랑 술 한잔할래?"
전화를 받은 민아름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오늘 결혼기념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특별히 준비할 게 있다며."
"나, 이혼했어."
한편 조운성도 그 소식을 들었다. 분명히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던 백이슬이, 그렇게 쉽게 이혼 도장을 찍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끝난 거야?" 조운성이 건조하게 물었다.
"네. 사모님이 이혼 절차를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운전기사가 말했다.
"돈은 가져갔나?"
"아니요,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사모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대표님, 귀국하셨는데 정말 사모님을 보러 가지 않으실 겁니까? 오늘을 손꼽아 기다리신 것 같던데요." 운전기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백이슬이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운성은 약간 놀랐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Dew는 소식 없나?"
엄청난 실력의 전설적인 의사 Dew는 3년 전부터 종적을 감췄고,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별 소식 없습니다. 지금까지 Dew의 얼굴은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답니다. 어딜 가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더군요."
"계속 찾아 봐. 지구 끝까지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야 해. 청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알겠습니다, 대표님."
회차 2
늦은 밤, 은은한 조명이 흐르는 나이트 클럽 안은,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 생기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클럽에 들어선 백이슬은 익숙한 얼굴이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손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름아."
백이슬은 조운성과 결혼한 후 몇 년 동안 민아름과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그런 상황에도 민아름은 그녀의 사업과 일들을 책임감 있게 관리해 주고 있었다.
백이슬을 본 민아름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꽉 껴안았다. "드디어 그 자식이랑 끝낸 거야?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민아름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떨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몇 년 전에 백이슬이 갑작스럽게 결혼 발표를 했을 때, 민아름은 그저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백이슬은 젊은 나이에 국제에서 명성을 얻은 신의일 뿐만 아니라, 유명 디자이너, 프로 게이머, 천재 해커까지, 수많은 재능을 지닌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스무 살에 은퇴를 선언하고,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조용히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네가 이렇게 예쁜데, 너 같은 여자를 몰라보다니, 조운성 그놈이 정말 눈이 어떻게 됐나 봐. 지금 모습은 본 적도 없겠네?" 민아름이 백이슬의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이슬의 얼굴은 우아하면서도 지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였고 그녀의 맑은 눈은 반짝이기까지 했다. 누구라도 반할 만한 미모였지만, 조운성은 그녀의 진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백이슬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답했다. "응, 본 적 없어. 그땐 내가 독극물 중독 때문에 살도 엄청나게 찌고 완전 몰라보게 변해 있었지. 몸의 독을 다 제거하고 난 뒤에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민아름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금 우리 사업은 다 네 복귀만 기다리면서 정지된 상태야.
그동안 전설적인 의사 'Dew'를 찾겠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몰라. 다들 네 치료를 받을 수만 있다면 거액을 지불하겠다고 했어. 다크웹에서는 팬텀마저 잠잠해졌고.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백이슬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지난 몇 년을 되짚었다. 왜 그동안 이토록 무기력하게 지내왔던 걸까. 자신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걱정 마. 이렇게 다시 돌아왔잖아."
"그럼 그때 너를 독살하려 했던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냈어?"
"응. 백영미였어." 백이슬이 감정 없이 대답했다. 백영미, 바로 그녀의 이복 동생이 모든 고통의 원흉이었다.
민아름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설마 그냥 두진 않을 거지?"
백이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당연히 아니지. 곧 지도 그 독이 어떤 맛인지 똑똑히 알게 될 거야."
둘은 술을 마시며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예쁜 얼굴과 화끈한 몸매를 가졌기에, 주위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었다.
잠시 후, 그녀들을 노리던 남자 몇 명이 자신만만하게 다가오더니 말을 거는 것이다. "예쁜 아가씨들, 우리랑 같이 한잔 어때?"
백이슬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저리 꺼져."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되받아쳤다. "성격 있네. 더 마음에 들어. 왜 그렇게 튕겨? 남자친구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오늘 오빠랑 하룻밤 같이 보내지 그래?"
이 말을 들은 백이슬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답했다. "두 번 말 안 해. 그냥 가."
그러나 남자는 전혀 겁먹지 않고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싫다면 어쩔 건데? 그렇게 차려 입고 온 게, 관심 좀 달라는 뜻 아니야? 그래서 관심을 보여줬으면, 감사합니다 하지는 못할 망정... 악!"
남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이슬이 그의 가슴을 발로 세게 찼다.
"네가... 네가 감히 날 때려? 얘들아, 이년 잡아!" 그가 소리치며 친구들을 불렀지만,
보안 요원이 소란을 듣고 출동했을 때는, 남자들이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뒤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술렁거렸다. 백이슬이 남자들을 한 방에 제압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백이슬은 손바닥에 묻은 먼지를 털며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2층의 룸으로 가서 계속 이야기하자."
한편, 2층에서는 두 남자가 아래층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며 방금 본 장면을 곱씹었다. "대단한 여자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보기도 전에 그새 다 쓰러뜨렸어."
그 옆에 서 있던 조운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게."
우성준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게다가 엄청 예쁘잖아. 네 와이프보다 훨씬 예쁜데?" 백이슬을 뚱뚱한 몸매에 얼굴에 발진 종기로 가득한 여자로 기억하고 있는 우준성이 말했다.
"전 와이프." 조운성이 무덤덤한 말투로 정정했다.
우성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잔을 들어 건배하듯 말했다. "맞네. 너희 오늘 이혼했지."
그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킨 후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근데 민아름이랑 같이 다니는 걸 보면 저 여자도 만만치 않은 것 같네."
민아름은 우성준과 사업적인 이유로 셀 수 없이 충돌해 온 라이벌이었다.
한편, 백이슬은 복잡한 심정으로 오늘 밤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아름이 자유를 되찾은 기념으로 한잔하자고 끈질기게 조르는 바람에 결국 백이슬은 주량 이상으로 술을 마시고 말았다. 술기운이 올라오며 그녀의 머리는 점점 몽롱해져 갔다.
민아름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백이슬은 바람이라도 쐬려는 생각으로 홀로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백이슬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조운성이었다.
혼란스러워진 백이슬은 혹시 자신이 술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조운성이 분명했다.
회차 3
3년이나 이 남자를 보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백이슬은 비틀거리며 걸어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통화 중이던 조운성은 백이슬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백이슬이 아래층에서 본 여자가 맞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그의 얼굴에 의심이 스쳤다.
'이 여자, 원나잇 상대를 찾으러 온 건가? 아까 그 남자들은 수준이 안 맞아서 무시했던 거군.'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를 보는 조운성의 눈에 혐오감이 스쳤다.
"여자라면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죠." 백이슬이 자신에게 접근하려 한다고 생각한 그가 겨울 바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백이슬이 그의 뺨을 세게 때렸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조운성은 잠시 얼어붙었다.
"이 나쁜 놈아!" 백이슬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술기운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지자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조운성은 본능적으로 백이슬이 땅에 쓰러지지 않도록 재빨리 붙잡았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조운성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흔들었지만, 백이슬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쁜.. 놈.."
조운성은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백이슬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우성준은 그녀를 들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우성준은 마시고 있던 와인을 뿜을 뻔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래층에서 본 그 여자 맞지? 아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백이슬이 남자들을 제압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우성준은, 그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잊히지 않았다.
"나도 몰라." 조운성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백이슬을 소파에 조심스레 눕히며 중얼거렸다.
다음 날 아침, 백이슬은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채로 눈을 떴다.
눈을 비비자, 이내 자신이 낯선 곳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처음 보는 검은색 옷을 덮고 있다는 사실도.
어젯밤의 기억이 조각조각 떠오르며, 백이슬은 자신이 조운성의 뺨을 때렸던 것이 진짜인지 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사람은 지금 해외에 있을 텐데.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였든, 아무 이유도 없이 뺨을 맞고도 어떤 보복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억을 더듬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하지운이었다. 하지운은 그녀의 대학 시절 선배이자, 지금은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였다.
"여보세요?" 백이슬이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슬아, 아름이한테 네가 복귀한다는 얘기 들었어." 하지운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벌써 소문이 퍼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 시간 되니? 긴급 환자가 있어. 열아홉 살 여자애인데, 교통사고를 당했어. 지금 아무도 손을 못 쓰고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해."
"곧 갈게요." 그의 급박한 목소리에 잠이 확 달아난 백이슬은,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병원으로 달려 나갔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휴대폰으로 환자의 상태를 미리 검토했다. 그러나 교통 체증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고, 그 사이 환자의 상태는 더욱 위급해졌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백이슬이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지운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네." 하지운이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슬이 왔어도, 이미 늦었을 거야."
"가족에게 결과를 알려드려." 하지운이 후배 의사에게 지시했다.
"하 선생, 지금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세요? 그 유명한 김씨 가문 사람들이라고요. 그 집안의 유일한 외동딸인데, 우리가 살리지 못했다고 말하는 순간, 병원에 큰 타격이 있을 겁니다." 동료 의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해. 다른 방법이 없어."
의사들은 마지못해 나가서 가족들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
소녀의 어머니인 한미숙은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부탁했다. "안 돼요, 제발! 돈이 얼마가 들든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또 다른 의사가 나서서 비통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따님이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심장이 거의 손상되었고, 머리와 다리에 입은 부상도 심각합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깨어나더라도 걷기는 힘들 겁니다."
의사의 말에 한미숙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남편이 쓰러지기 직전의 그녀를 붙잡았다.
"아니야... 우리 딸 괜찮을 거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미숙이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의 강단 있는 목소리가 전해왔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뒤를 돌아 본 하지운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왔구나."
백이슬은 단호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전부 준비해 줘요."
잠시 망설이던 하지운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심장이 거의 멈춘 상태야. 정말 가능하겠어?"
"해보기 전엔 알 수 없죠."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백이슬은 씻지도 못한 몸과 어젯밤 술 냄새가 밴 옷을 입은 채로, 마스크를 쓰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소녀의 아버지, 김국동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 정말 의사 맞는가? 학교를 갓 졸업한 신참내기처럼 보이는 데다, 술 냄새까지 나는군. 당신 같은 사람이 정말 우리 딸을 살릴 수 있겠어?"
"술은 마셨지만 일하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당장 비키시지 않으면 따님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백이슬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고 오로지 눈앞에 있는 환자에게만 집중했다. 환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백이슬은 마치 수만 번은 해 본 수술처럼 능숙하게 움직였다.
3년 만에 잡은 메스였지만, 손놀림은 여전히 정확하고 자연스러웠다.
다른 의사들은 경외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우와... 믿기 힘들 정도야... 대단한 기술이다..."
"기다려 봐...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은데? 우리, 지금 기적을 목격한 건가?"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수술실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마침내 하지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이슬은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의사였다.
하지만 3년 전,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와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는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때 하지운은 그녀의 재능이 그렇게 묻히는 게 아쉽기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