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네가 벗을래, 아니면 내가 도와줄까?" 남자의 경멸 어린 말투는 정하진의 연약한 신경을 정면으로 자극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웨딩드레스 지퍼가 풀리는 소리에 정하진은 깜짝 놀라 황급히 드레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마주한 것은 남자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였다.
"이 드레스를 입고 있어야 할 사람은 네 여동생이어야 했어. 네가 아니라." 남자의 날 선 말에 정하진은 숨이 턱 막혔다.
심재현은 해성시 최고 재벌가의 후계자로, 원래는 정하진의 여동생 구예린과 결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신부는 정하진이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구예린이 결혼식 당일 도망친 탓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거의 연락조차 없었던 정하진의 엄마 최미자는 어느 날 불쑥 찾아와서 꺼낸 말이, 동생 대신 결혼하라는 이야기였다.
최미자는 정하진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 "하진아, 네 월급으로는 너희 아빠 요양원 비용을 감당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예린이 좀 도와줘. 그러면 앞으로 너희 아빠의 병원비는 구씨 가문에서 책임질게."
정하진은 단번에 거절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의 아버지는 실종되었고, 구씨 가문은 이미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인질 삼아 정하진더러 이 드레스를 입으라고 협박했다.
정하진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비록 힘든 삶을 살아왔지만, 아버지는 세상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만 했다.
씁쓸한 기억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인 정하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심재현 씨, 어차피 이번 결혼은 사업을 위한 계약 결혼이잖아요. 그러니 상대가 저라도 달라질 건 없죠."
"고개 들고 말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명령이 그녀의 귀를 찔러왔고, 동시에 심재현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정하진은 마지못해 심재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심재현의 오른쪽 귀에 낀 작은 기기를 보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인공 와우였다.
'귀가 안 들리는 거야? 구예린이 도망친 이유가... 이거였구나.'
"네 여동생이 왜 도망쳤는지 이제 알겠지? 그런데도 나랑 결혼할 거야?" 심재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심재현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열네 살에 사고로 청력을 잃었다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네, 그래도 결혼할 거예요." 정하진은 눈 속의 망설임을 감췄다.
"이유는?" 심재현은 장난이 어린 표정을 거두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하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뉴스를 보도하는 기세로 정중히 입을 열었다. "저희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이번 결혼은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유효하다고 하셨어요. 이후 심씨 가문에서 고액의 위약금을 지급하기로 했고, 그건 전부 제 몫이래요. 그리고 저는 그 돈이 필요하고요."
심씨 가문이 이 결혼을 통해 얻게 될 이익은 분명 돈 이상의 것이었지만, 정하진은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응당 받아야 할 몫만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돈이면 아버지의 병원비를 지불할 수 있을 테니까.'
심재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욕심이 크네."
돈을 밝히는 여자야 수도 없이 봐왔지만,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거래라면 나도 먼저 물건을 확인해야겠지?"
그 말에 정하진의 몸은 순간 굳어버렸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결혼은 반드시 잠자리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순간, 정하진의 마음속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4년간 연애했던 전 남자친구와는 키스조차 하지 못했는데 이제 만난 지 1시간 쯤 되는 남자와 밤을 보낸다고?'
그 압박감에 정하진은 숨이 턱 막히며 시야가 흐릿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질 뻔했다.
그 순간,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 안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신기하게도, 막혔던 숨이 서서히 트이기 시작했다.
정하진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와 어떤 남성과도 신체 접촉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접촉하면 호흡이 막히고 그대로 쓰러지는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재현의 손길은 오히려 그녀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정하진은 심재현의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댄 채,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드러난 살결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정하진이 그가 이대로 강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찰나, 심재현은 갑자기 손을 거두었다.
"이런 증상, 언제부터였어?" 심재현이 물었다.
정하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도 잘 몰라요..."
의사 말로는 신체적인 이상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라고 했었다.
심재현은 우스운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구씨 가문에선 이걸 알고 나 같은 장애인한테 떠넘긴 거겠군. 참 기가 막힌 장사를 했네."
정하진은 말없이 웨딩드레스를 움켜쥐었고 가슴 속 깊은 곳이 꽉 막힌 듯,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설마, 지금 날 되돌려 보내려는 건가? 그럼 우리 아빠는 어떡하지? 의료비는커녕, 구씨 가문은 아빠 얼굴조차 못 보게 할 텐데…'
회차 2
"당장 그 촌스러운 옷이랑 싸구려 액세서리 다 벗어. 나랑 결혼하면 결혼식은 필요 없어." 머리 위로 차갑게 떨어지는 심재현의 목소리에 정하진은 고개를 들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재현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조건을 덧붙였다. "이 결혼은 우리 두 가문의 사람들 외엔 아무도 몰라야 해. 개발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혼은 물론이고 다른 스캔들도 절대 안 돼. 이 모든 조건을 지켜야 네가 원하는 돈을 받을 수 있어. 이해했어?"
심재현이 인내심을 완전히 잃기 전에, 정하진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이건 구예린 대신 나랑 결혼하겠단 뜻이야?'
그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워진 정하진은 황급히 목걸이와 귀걸이를 빼내고, 웨딩드레스를 벗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는 속옷만이 남았다.
"이대로 다 벗은 채 나가고 싶어?" 심재현은 가볍게 비웃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정하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어쩔 바를 몰라 그대로 멍해졌다.
심재현은 무심히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들더니,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 순간, 정하진은 어쩐지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반지가 마치 그녀의 손가락을 위해 특별히 맞춰진 것처럼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정하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반지 값비싼 거죠? 소중히 간직했다가 이혼할 때 돌려드릴게요."
심재현은 아무 말 없이 정하진이 자신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들은 결혼식도, 가족의 축복도 없이 그렇게 혼인신고를 마쳤다.
심재현은 정하진에게 신혼집의 열쇠를 건넸고 비서 문시우에게 그녀를 직접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정하진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심재현은 그제야 친구 육현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육현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작전, 결국 성공했네.잘 속여서 데려온 거지?"
심재현은 결혼반지를 천천히 돌리더니 손바닥을 펼쳤고 그 위엔 정하진의 도톰한 입술이 남긴 붉은 립스틱 자국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합법적인 부부 사이에, 속였다고 할 수는 없지."
한편, 심리상담실
"그러니까 네 말은, 한 남자가 널 만졌는데 오히려 공황 증상이 가라앉았다고?" 정하진의 친구이자 담당 심리상담사 윤수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하며 물었다.
정하진은 소파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에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심재현이 그녀를 구했고, 둘은 그대로 혼인신고까지 해버렸으니까.
벌써 두 달이나 지났지만, 정하진은 여전히 자신이 결혼했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정하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현아, 나 정말 나을 수 있을까?"
정하진은 오랫동안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언젠가는 정상적인 연애와 결혼에 이어 아이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목표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결혼한 사람은 심재현이었다. 절대 그녀를 건드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윤수현은 정하진의 손에 낀 결혼반지를 슬쩍 흘겨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네 트라우마는 14년 전의 기억 상실과 관련이 있어. 그 기억만 돌아오면 치료는 어렵지 않아. 그런데 네 친구이자 심리상담사로서 충고 하나 하자면, 우선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진부터 받아봐."
정하진은 벌떡 일어나며 불안한 눈빛을 보였다. "왜?"
윤수현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넌 나랑 상의도 없이 갑자기 낯선 남자랑 혼인신고를 해버렸잖아. 나는 지금, 네 뇌에 정체불명의 이상이 생겼다고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있어."
정하진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고 윤수현의 독설이 마음을 콕콕 찔렀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윤수현은 정하진의 아버지의 담당 주치의를 직접 소개해줬을 뿐만 아니라, 몇 달치 치료비도 대신 내줬었다. 친구로서 윤수진은 이미 그녀를 위해 너무 많은 걸 해줬다.
그러니 정하진은 더 이상 윤수현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구씨 가문은 약속을 지켜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다시 보내줬고 이제 정하진이 할 일은 단 하나, 개발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 후에는 심재현이 알아서 이혼을 요구할 테니까 계약도 자동으로 종료될 것이다.
상담이 끝난 뒤, 정하진은 윤수현과 작별 인사를 하고 곧장 근처에 있는 NTV 방송국 건물로 향했다.
정하진은 기상 캐스터로 일하고 있었고, 오늘은 당직이라 긴급 기상 보도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방송 준비 구역에서는 야간 뉴스의 메인 앵커 하예진이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거 들었어? 심씨 가문, 얼마 전에 귀국한 그 후계자 말이야. 그 심재현이 오늘 인터뷰 때문에 방송국에 온대."
메이크업 수정을 하던 정하진의 손은 순간 멈칫했고, 입가에 바르던 립스틱이 휙 비뚤어졌다. '심재혁이 방송국에 온다고?'
결혼한 지 두 달, 그는 단 한 번도 신혼집에 오지 않았다.
모든 건 심재현이 원하는 대로 되었고 그들의 결혼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게다가 정하진은 업무 일정 때문에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출근해야 했고, 둘 사이에는 삶의 교차점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장에서 그와 마주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예진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후계자는 무슨. 그 얘기 못 들었어? 심재현은 예전에 사고 나고 나서 두 귀 다 들리지 않게 됐다잖아. 그런데 심씨 가문에서 그 거대한 심씨 그룹을 한 장애인한테 넘기겠어?"
그러자 누군가가 비아냥거리듯 덧붙였다. "그럼 그냥 해외에 계속 있으면서 부모 돈이나 쓰지, 뭐 하러 굳이 돌아왔대?"
하예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동생한테 회사 뺏기긴 싫었나 보지. 그래서 명예 회복하겠다고 돌아온 거 아니겠어? 근데 좀 안타깝긴 해. 생긴 건 진짜 잘생겼잖아. 귀만 안 멀었어도… 한 번 꼬셔볼 만 했는데."
"예진아, 잘 생각해 봐. 그렇게 큰 사고였는데, 귀만 다쳤을 리가 있겠어?"
그러자 여자들 사이에서 키득키득 웃음이 퍼졌다.
한편, 반쯤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던 심재현은 아무런 표정 없이 그 모든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런 비웃음과 조롱은 이제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일이었다.
옆에 있던 비서 문시우는 순간 얼굴을 굳히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제가 바로..."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메이크업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정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파운데이션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쾅 하고 내려쳤다.
그 순간, 왁자지껄하던 공간이 정적에 휩싸였고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정하진에게로 쏠렸다.
회차 3
하예진은 팔짱을 낀 채 비꼬는 눈빛으로 정하진을 훑어봤다.
"평소엔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나서?"
정하진은 담담하게 응수했다. "인터뷰 게스트의 사생활을 뒷담화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하예진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 심재현이랑 친하기라도 한 거야?"
정하진은 하예진의 앞으로 다가갔고 키가 한 뼘은 더 큰 탓에 기세부터 한 수 위였다.
"아니요, 안 친해요." 정하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 하나쯤은 있잖아요. 그런 일을 겪고도 당당하게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솔직히 저는 그 의지가 존경스러워요."
하예진은 혀를 차며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정하진, 너 보기랑 다르구나? 네가 심재현 같은 스타일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
정하진은 잠시 말이 막혔고 눈앞에 심재현의 날카롭고도 잘생긴 얼굴이 아른거렸다.
심재현의 차가운 눈빛과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는 솔직히 정하진의 이상형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심재현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날 그녀가 공황 증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억지로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심재현이 그녀의 대리 결혼을 받아들였기에, 그녀의 아버지도 무사히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정하진은 누군가 심재현을 모욕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정하진의 반응이 재밌기라도 한 듯, 하예진은 입꼬리를 비틀며 한껏 신난 얼굴로 말했다. "근데 어쩌나? 너처럼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는 옷을 다 벗고 심 도련님을 꼬셔도, 눈길 한 번 못 끌걸?"
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하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재현이 언제부터 문 앞에 있었던 거지? 방금 하예진이 한 그 모욕적인 말들을 다 들은 걸까?'
"NTV 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이 이 정도였나요?" 심재현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고 온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하예진은 심재현을 보자마자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심... 심 도련님... 죄송합니다. 계신 줄 모르고..."
해성시 최고의 상업 제국으로 불리는 심씨 그룹은 NTV 방송국에도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심재현이 장애를 지녔다 한들, 일개 아나운서 따위가 감히 그의 험담을 할 자격은 없었다.
조금 전 하예진과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도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하예진은 두려움에 조심스레 앞으로 다가가며 애써 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우린 그냥 농담이었어요."
심재현은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매만지며 무심한 듯 정하진을 힐끗 살피고는 물었다. "저기 기상캐스터 분, 그쪽도 저 농담들이 웃겼어요?"
갑자기 이름 대신 호칭으로 지목 당하자, 정하진은 당황한 듯 흠칫했다. '내가 기상캐스터인줄은 어떻게 알았지?'
정하진은 곧장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심재현은 싸늘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과해."
하예진은 급히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 도련님,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다시는..."
하지만 심재현은 단호하게 하예진의 말을 잘랐다. "저한테 하지 말고, 저 기상캐스터 분한테 사과해요."
정하진은 그 말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재현이... 지금 내 편에 서준 거야?'
하예진은 정하진보다 더 놀란 표정이었다. '항상 조용하기만 하던 정하진이 대체 언제 심재현이랑 알게 된 거야?'
하예진은 표정이 굳은 채,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난 NTV 방송국의 메인 아나운서야. 그런데 지금… 하루 10분도 채 안 되는 방송 분량을 맡은 기상캐스터한테 내가 사과를 하라고?'
하예진은 이런 굴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심재현의 눈빛이 너무도 매서워, 결국 하예진은 이를 악문 채 사과했다. "정하진 씨, 미안해요. 제가 경솔했어요."
하예진은 정하진을 향해 독기 어린 눈길을 날렸고 이 굴욕을 반드시 되갚아주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바로 그때, NTV 방송국의 프로듀서 임준서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버렸다.
그는 심재현에게 마이크와 대본을 건네며 말했다. "심 도련님, 준비가 다 되셨으면 리허설 들어가도 됩니다."
심재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준서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정하진을 불렀다. "하진아, 네가 심 도련님께 마이크 좀 달아드려."
정하진이 그 말에 반응도 하기 전에, 문시우가 신속히 마이크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임준서를 따라 하나 둘씩 빠져나갔고, 방 안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정하진은 앞으로 다가가 심재현의 셔츠 깃에 조심스레 핀 마이크를 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제외하면 그녀를 이렇게까지 지켜준 남자는 심재현이 처음이었다.
심재현은 시선을 내려 정하진의 가느다란 손이 자신의 셔츠를 스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이 간질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앞으로는, 누구도 너의 매력을 부정하게 두지 마."
정하진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까 그 사람들은 원래 좀 독설적이에요. 그리고 하예진이 한 말이 틀린 말도 아닌걸요."
하예진의 말은 비록 듣기 거북했지만, 정하진은 남자들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심리적인 이유로, 어떤 남성과도 가까운 신체 접촉을 할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4년을 사귀었던 첫사랑과도 헤어졌으니까.
그때, 심재현이 갑자기 정하진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의 뜨거운 숨결이 정하진의 뺨을 스치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 결혼 첫날 내가 네 유혹을 받아주지 않아서 그래? 네 매력이 거부당했다고 생각해서, 서운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