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소박하게 꾸며졌지만 은은한 고급스러움이 풍기는 침실 안에는, 여자의 숨죽인 신음소리와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했다.
임유정은 침대에 엎드린 채, 두 손으로 실크 시트를 꽉 움켜쥐고 점점 더 거칠어지는 남자의 움직임을 받아내고 있었다.
남자의 한 손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침대에 고정한 채, 한 달간의 출장으로 쌓인 욕망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임유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억눌린 신음을 터뜨렸고, 남자는 마지막으로 강하게 밀어 넣으며 억눌러왔던 열기를 모두 쏟아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절정의 여운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태민아, 할아버지께서 또 우리더러 아이 가지라고 재촉하셨어." 임유정은 어둠 속에서 그의 손가락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그녀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엔 아직 식지 않은 온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임유정의 귓가에 닿았고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싹 돋았다.
"아이?" 우태민은 되묻더니,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그가 즉시 거절하지 않은 것을 느낀 임유정의 마음 한편에 희미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응. 난 아직 젊으니, 출산 후 회복도 더 쉬울 거야. 그리고 나중에 더 낳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일찍 낳는 게 좋을 것 같아."
방금까지 임유정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손이 갑자기 얼굴로 내려오더니,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래서 나를 아이로 묶어둘 생각이야? 네가 감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우태민은 망설임 없이 몸을 떼어냈고, 임유정은 침대 위에 힘없이 남겨진 채 떨고 있었다.
놀라고 당황한 그녀는 급히 변명했다. "그건… 할아버지 뜻이었어. 난 그런 생각 안 했어…"
오랜 침묵이 흐른 후, 우태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일 가족 모임 자리에 나오지 마."
"왜?"
임유정은 그를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단지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고 이렇게 화낼 일인가?'
내일은 그들의 결혼 3주년 기념일이었고, 모든 가족이 본가에 모여 함께 식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우태민의 얼굴 윤곽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연이가 돌아왔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 위 조명이 번쩍 켜지며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임유정은 본능적으로 얇은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을 가린 채,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우태민은 그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고, 이내 샤워하는 물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임유정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서서히 아릿한 통증이 번졌다.
이불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진 그녀는,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기억에 잠겼다.
3년 전, 임유정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우태민의 할아버지 우진환이었다.
임유정이 치료를 마친 뒤, 우진환은 그녀에게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그의 손자 우태민과 결혼해달라는 것이었다.
임유정은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자 망설임 없이 3년 간의 결혼 계약서에 서명했다.
3년 후, 계속 함께할지 아니면 갈라설지는 두 사람의 선택이었다.
그때부터 임유정은 우태민의 아내로서 헌신적으로 그를 간호했다.
정성스럽게 간호한 끝에, 우태민은 결국 의식을 되찾았고,
그리고 어느 순간, 임유정의 마음은 조용히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실제로 함께한 시간은 고작 1년 반 남짓이었다. 우태민은 단 한 번도 임유정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그의 마음속엔 늘 첫사랑 손시연이 있었다.
우태민이 혼수상태에 빠지자마자, 손시연은 곧장 그를 버리고 해외로 떠났다는 사실을 임유정은 우진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손시연은 겉으로는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겠다며 떠났지만, 실상은 미련 따위는 전혀 찾아 볼수 없었고 남자친구를 계속 바꾸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하필이면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손시연이 돌아온 것이다.
3년간의 헌신과 정성은, 유태민의 마음속 손시연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임유정의 사랑은, 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지 못했다.
샤워 소리가 멈췄고, 욕실 문이 열리자, 우태민은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나왔다.
그는 날렵하고 조각 같은 몸매를 지닌 남자였다. 또렷한 복근, 탄탄한 근육, 긴 다리와 단단한 몸. 그의 모든 것을 임유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본 우태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방을 가로질러 옷장을 열고, 셔츠와 정장을 꺼낸 그는 수건을 벗고 천천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 몸이 안 좋아서 가족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해." 우태민이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날카로운 이목구비와는 다르게,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얼리는 듯했다.
무언가 생각난 듯 우태민은 몸을 숙여 바닥에 놓인 재킷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은 약 봉지를 꺼내 침대 위에 툭 던졌다.
"피임약 챙겨 먹어."
임유정은 그 약 봉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알았어."
우태민은 언제나 관계 후 직접 그녀가 약을 먹는 걸 확인했다. 단 한 번의 실수조차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진환이 임유정에게 임신을 권한 건, 단지 우태민과 그녀를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고 우씨 가문에 그녀가 머물도록 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우태민은 타인에게 늘 차가운 태도였지만, 예외는 두 명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우진환, 그리고 손시연.
"이제 이 결혼을 끝낼 때가 됐어."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운 우태민은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서류 한 장을 꺼내 임유정 앞에 툭 내려놓았다. "사인해. 이걸로 너랑 나는 끝이야."
서류 맨 위에 적힌 '이혼 합의서'라는 글자가 마치 불도장처럼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임유정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었고, 종이의 날카로운 끝이 손끝을 베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회차 2
이 결혼을 끝낼 순간이 왔지만, 임유정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임유정은 고개를 들어 우태민을 바라보았고 부드러운 조명 아래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붉은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고, 결국 조용히 물었다. "정말… 나랑 이혼할 생각이야?"
침대 옆에 서 있는 우태민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잘생긴 얼굴엔 일말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넌 애초에 내 아내가 될 사람이 아니었어. 하지만 내 곁에 있고 싶다면, 섹스 파트너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의 입가에 잠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고, 무심한 눈빛에 장난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침대 위에서 둘은 예상외로 잘 맞았고, 그녀가 원한다면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우태민은 생각했다.
임유정은 그의 말에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을 받았고, 그녀가 품고 있던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두 사람이 처음 관계를 맺은 건 계획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한 어느 밤, 충동적인 열정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술이 깨고 난 후 우태민은 분노하며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의 충혈된 눈엔 자책과 후회가 서려 있었고, 임유정은 그가 그 밤을 손시연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진환 어르신 때문에 우태민은 임유정에게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지만, 그날 이후, 침대 위에서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둘은 진정한 의미의 부부가 아니었다. 우태민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을 챙겨 떠났고, 임유정은 혼자 별장에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우태민이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오직 '그 일'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섹스 파트너와 다를 바 없었다.
우씨 가문에서 임유정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우진환 어르신뿐이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그녀를 우태민의 아내로 여기지도 않았다.
분노가 임유정의 가슴속에서 뜨겁게 치솟아 올랐고,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사라졌으며, 그녀의 입술에서 쓰디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당신 섹스 파트너가 되고 싶어 안달 난 여자들이 줄 섰을 껄. 전처인 나 따위가 기회나 있을까?"
우태민은 어두운 눈빛으로 임유정을 바라보았다. 울고 난 듯 붉게 물든 눈가, 조롱 섞인 웃음을 띤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아름다웠다.
임유정이 아내로선 정말로 괜찮은 상대라는 것을 우태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자신이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매번 임유정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처럼 맞이해주었다.
그녀는 우태민을 보물처럼 아껴주었고, 그녀가 있는 곳은, 자신이 도망쳐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태민에게 여자는 많았다.
임유정 하나쯤, 없어도 괜찮았다. 그에겐 아직 손시연이 있었고, 공허함을 메워줄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우태민은 무심하게 말했다. "이혼 합의서 살펴 보고, 문제 없으면 바로 서명해."
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 9시 10분.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임유정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넘기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60억, 자동차 한 대, 집 두 채. 정말이지 후한 보상이었다.
임유정이 놀란 표정을 짓자, 우태민의 눈빛엔 경멸이 스쳤다.
욕심이란 건 아무리 감춰도 결국은 드러나게 돼 있었다.
"부족하면 말해. 더 얹어줄 수도 있어."
그동안 우태민이 병상에 누워있을 때 임유정은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왔었기에, 이 정도 돈은 푼돈에 불과했다.
"충분해." 임유정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펜을 들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고, 거기에는 이미 우태민의 서명이 있었다.
임유정은 또박또박 자기 이름을 써 내려갔다.
펜을 내려놓자, 임유정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듯 무너져 내렸고, 눈을 감는 순간,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3년간의 꿈, 이제는 깨어날 때다.
우태민은 그녀의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을 보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임유정이 이혼 서류에 서명만 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일 아침 9시. 법원에서 보자."
우태민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혼 합의서를 들고 돌아섰다.
방 안에는 임유정 혼자 남았고, 그녀는 몸을 웅크려 무릎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마지막 눈물이 떨어졌을 때, 그녀는 마음속에서 우태민에 대한 마지막 감정도 묻어버렸다.
3년이면 충분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더 이상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8시 50분쯤, 우태민의 차량이 이미 법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검은색 링컨 뒷좌석에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노트북으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차갑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조수석에 앉은 비서 임경학은 백미러로 우태민을 몰래 힐끔 바라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 아침, 우태민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그는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혼? 우 대표님과 사모님이 오늘 이혼을 한다고?'
임경학은 우태민이 열두 살 때부터 그의 옆에서 비서로 일해왔었다.
우태민이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우진환 어르신이 나서서 그와 임유정의 결혼을 추진했었다.
그때만 해도 임경학은 우태민이 다시 깨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임유정이라는 여자에게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깨어났고 결혼 생활은 3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혼이라니…
무엇보다도, 임유정은 우진환 어르신이 직접 고른 며느리였다. 이 사실을 우진환 어르신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몇 시야?"
차가운 목소리가 임경학의 생각을 끊었다. 그는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8시 55분입니다, 대표님. 여기 도착한 지 20분 됐습니다."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고 두 사람의 잔잔한 숨소리만 들렸다.
임경학은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혹시 회장님께는… 말씀드렸어요?"
그 말을 들은 우태민은 시선을 내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진환 어르신이 임유정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이혼 소식을 알게 되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그래서 우태민은 할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이혼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우태민의 침묵은 곧 대답이 되었다. 임경학은 점점 조여오는 긴장감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우태민이 결정을 내린 일이라면, 우진환 어르신 외에는 아무도 그의 뜻을 바꿀 수 없었다.
회차 3
임경학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임유정의 모습을 찾다가, 익숙한 인물을 보고는 눈빛이 반짝였다. "우 대표님, 사모님 오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우태민이 고개를 들었다. 차창 너머로 바라보자, 임유정이 우아하게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몸에 딱 붙는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무릎 위까지 과감하게 올라온 길이였다.
장미꽃처럼 주름 잡힌 치맛자락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가느다란 허리, 등 아래로 흘러내린 긴 흑발은 자연스럽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고, 임유정이 걷는 인도는 마치 그녀만의 런웨이처럼 보였다.
임경학은 그 모습에 넋을 잃고 감탄을 내뱉었다. "와, 연예인 같네요."
우태민은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이런 옷차림으로, 이혼 첫날부터 누구를 유혹하겠다는 거지?'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의자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우태민이 전화를 받자마자 짧은 몇 마디가 오갔고, 통화를 마칠 무렵 그의 표정은 먹구름처럼 어두워졌다.
"본가로 가."
임경학의 눈이 커졌다. "그럼 사모님은요?"
"같이 데려가."
임유정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길가에 세워진 링컨을 알아봤다. '직접 가서 불러달라는 건가?'
임유정이 차로 다가가 창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뒷문이 열리고 남자의 긴 팔이 그녀를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바로 다음 순간, 차량은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급격한 가속으로 중심을 잃은 임유정은 그대로 우태민의 무릎 위로 넘어졌다.
손이 먼저 반사적으로 닿은 곳은 남자의 민감한 부위였고, 그곳은 그녀의 손길에 반응이라도 하듯 살짝 움직였다.
손바닥에 뜨거운 열기가 번지자, 임유정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가 머리를 천장에 세게 부딪쳤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방금 전까지의 우아하고 기품 있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임유정은 머리를 감싸며 숨을 몰아 쉬었다. "이혼하러 온 거 아니었어?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운전석에 앉은 임경학은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 대표님께서 마음이 바뀐 건 아닐까?' 수년간 함께 지낸 아내에게 정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임경학은 생각했다.
하지만 우태민은 방금 전의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가보면 알아."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박하사탕을 꺼내 느릿하게 포장을 벗기더니 입에 넣었다.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려는 듯했다.
임유정은 그가 더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고 고개를 숙이며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차는 한 시간 넘게 달려 대저택에 도착했다.
광대한 부지에 전통 건축 양식과 정교한 조경이 조화를 이룬 저택에는 다리, 시냇물, 정자, 복잡한 오솔길이 어우러져 있었다.
문자를 막 보낸 임유정은 익숙한 풍경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왜 날 본가에 데려온 거야?"
오늘은 두 사람의 결혼 3주년 기념일이었고, 우씨 가문에서는 그들의 결혼기념일마다 기념 만찬을 열었다.
하지만 전날 밤까지만 해도 우태민은 임유정에게 가족 모임에 오지 말라고 단호히 말했었는데, 이혼을 앞둔 상황에서 그녀를 여기에 데려온 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차가 호수 옆에 자리한 별장 앞에서 멈춰 섰고, 우태민은 임유정의 손목을 붙잡고 차에서 내려 급히 2층으로 향했다.
뒤따라온 집사는 헐레벌떡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노부인께서 오늘 아침에 깨어나시더니 곧바로 쓰러지셨어요. 다행히 어르신께서 빨리 발견하셔서... 안승원 의사가 진료 중이십니다."
집사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노부인께서 이번이 두 번째 쓰러지신 건데, 이번엔 코와 입에서 피까지 흘리셨고 장기 부전 증상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2층 안방 앞에는 이미 많은 가족이 모여 있었다.
우진환 어르신과 그의 아내 이경숙 노부인은 세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장남 우주태는 군에서 일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군대에서 보냈다.
차남 우택철은 우태민의 아버지로, 예전에는 우씨 그룹의 임원직을 맡았지만, 현재는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다.
막내 우창석은 경성 시장으로, 출장 중이라 오늘 참석하지 못했다.
우태민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계모인 손효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롱하듯 말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의 생사엔 관심도 없고, 돈에만 눈이 멀었나 봐."
손효연은 우태민 뒤에 서 있는 임유정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어머,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사람 보고도 인사 한마디 없네."
실크 드레스를 입고 팔짱을 낀 손효연은 얼굴에 원망이 가득했다.
우택철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민아,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아끼셨는데, 좀만 늦었으면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릴 뻔했어. 회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짐을 좀 내려놔야 하지 않겠어?"
가족들의 끝없는 말다툼에 지친 우태민은 우진환 어르신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할머니 상태가 어떠세요?"
하얀 머리와 수염, 지친 표정의 우진환 어르신은 닫힌 방문 앞에 축 늘어진 듯 서 있었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구나." 우진환 어르신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게 강한 힘으로 우태민의 손목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민아,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해."
그 손의 힘은 마치 천근만근 같았고, 우태민은 이를 악물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없어요. 할머니는 평소에도 건강하셨고, 이번에도 괜찮으실 거예요."
임유정은 문 앞에 모인 어른들께 일일이 인사한 후, 우태민 뒤에 자리를 잡고 두 손을 모은 채 방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노부인은 우진환 어르신처럼 임유정을 손주며느리로 진심으로 아껴주던 분이었다.
이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태민이 이런 가족 일에 그녀를 부른 건 그만큼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안승원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부인께서 지금 매우 위중한 상황입니다. 가능한 모든 치료를 시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