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권민덕과 진미화의 놀란 표정을 뒤로한 채, 권서연을 돌아보는 허영찬의 두 눈에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어서 가자. 네 엄마가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다."
허영찬의 말에 권서연은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을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손끝에 스친 따사로운 햇살이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피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문 원장은 권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끌며 물었다. "서연아, 허 대표님이 너를 데리러 왔는데 대표님과 함께 갈래?"
권서연의 맑게 빛나는 두 눈이 허영찬의 깊은 눈동자를 한참이나 응시하더니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아저씨의 집에 가면 갑자기 쫓겨나는 날이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허영찬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초에 그는 딸을 입양한다는 사실에 큰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단지 아내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함일 뿐이었다. 더욱이 국가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허씨 가문에서 아이를 한 명 더 키우는 것은 그리 큰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권서연의 얼굴에서 허영찬은 아내의 젊은 시절을 엿보았다. 이 순간, 그는 권서연을 딸로 인정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허리를 약간 숙인 그가 엄숙하지만 부드러운 눈빛으로 권서연을 바라봤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는 허씨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이 사실은 절대 변함없을 거야."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음 졸인 문 원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영찬은 한 번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사람이다.
권서연은 그제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허영찬과 함께 고급 세단을 향해 걸어갔다. 권씨 가문 사람들은 권서연이 고급 세단에 타는 모습을 충격에 빠진 얼굴로 지켜봤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녀는 누구나 함부로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허씨 가문의 일원으로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자랄 것이다.
권씨 가문 사람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권서연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드디어 눈엣가시 같은 권서연을 쫓아내는 이 순간이 축제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재벌 가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권서연같이 성격이 괴팍한 아이는 머지않아 다시 보육원에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보육원에 버려진 사람의 운명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급 세단 몇 대가 빠르게 거리를 가로질러 시내 방향에 들어섰다.
세단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권서연은 작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가방 안에는 몇 벌의 갈아입을 수 있는 옷과 작은 노트북, 그리고 디자인이 독특한 휴대폰 한 대가 전부였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에 권서연이 빠르게 휴대폰을 잠금 해제하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문 원장이 새로운 가족을 소개시켜 줬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그녀의 답장은 짧고도 간단했다. "맞아."
상대방은 그녀의 무심한 답장이 익숙한 듯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허씨 가문은 결코 호락호락한 가문이 아니에요. 애초에 우리 계획에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권서연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새로운 메시지가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알겠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권서연은 이번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권씨 가문의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도록 해. 그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잘 해낼 수 있다고 했으니 우리가 더 이상 도와줄 필요도 없지."
권수연이 처음 권씨 가문에 입양됐을 때, 당장이라도 몰락하는 권씨 가문에 엄청난 양의 자금을 투자해 권씨 가문이 재벌 가문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했다.
바로 그때, 곁에 앉은 허영찬의 휴대폰이 울렸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육순희의 들뜬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여보, 딸을 데리고 오는 길이예요? 우리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려주면 주방 아주머니한테 미리 만들어 놓으라고 할게요."
허영찬은 룸미러로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권서연을 흘깃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래, 지금 데리고 가는 길이야. 우리 딸은 정말 특별한 것 같아."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3시간 달리고 나서야 겨우 목적지 가까이에 도착하는 듯 차가 속도를 줄였다.
허씨 저택은 황금 지역이라고 불리는 도시 중심의 운정원에 위치해 있다. 운정원은 엄청난 영향력과 자금을 보유한 사람들이 모여 지내는 곳으로 진정한 재벌 가문의 영역을 그대로 보아낼 수 있었다.
땅 한 조각만 있어도 3대가 부유하게 지낼 수 있는 지역에 허씨 저택은 넓은 정원과 오후 햇살에 빛을 반짝이는 인공 호수가 펼쳐졌다.
몇 년 전, 권민덕도 이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지만, 문턱도 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고급 세단이 정원을 천천히 가로질러 지나자 권서연은 창문을 통해 황성에 버금가는 화려한 건축물을 바라봤다.
먼저 차에서 내린 허영찬이 직접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며 정원으로 안내했다. 구불구불한 정원을 지나는 그녀는 갖가지 꽃이 만발하여 곱게 핀 모습을 천천히 살펴봤다.
허씨 가문 사람들은 일찍이 저택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 모인 사람들의 중심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부인이 앉아 있었다. 노부인이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기세를 뿜어냈다.
잔머리 하나 없이 완벽하게 빗어 넘긴 은빛 머리카락과 조명에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를 한 노부인은 모든 허씨 가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심영실이다.
심영실의 오른쪽에는 큰아들 허태성과 그의 가족이 앉아 있었다. 허영찬은 노부인의 둘째 아들이고, 막내 허미란은 남편과 줄곧 해외에서 지내고 있었다. 깔끔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노부인의 곁에 선 심슬기는 노부인의 친정에서 허씨 가문에 보낸 가까운 친척으로 노부인이 키우고 있었다.
"어머니, 이 아이가 바로 제 딸 서연이에요." 허영찬은 평소에 듣기 어려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거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우아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낸 권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태연한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나 불안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난한 흰색 블라우스는 화려한 조명과 저택에서도 눈에 띄었으며 가냘픈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한 분위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허씨 가문 사람들은 의외라는 듯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보육원에서 자란 것도 모자라 몇 번이나 파양 당했다는 말에 분명 볼품없는 소녀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온몸으로 뿜어내는 권서연의 자신감에 모두들 말문이 막혔다.
고급스러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육순희가 빠르게 앞으로 다가오더니 권서연을 품에 꼭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서연아, 소중한 내 딸.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엄마는 지금 이 순간이 정말 꿈만 같아. 앞으로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바꿀 수 없을 거야."
육순희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사실 그녀는 권서연이 다시 고아가 되어 그녀가 입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육순희의 품에 안긴 권서연은 은은한 향수 냄새와 따뜻한 온기에 온몸에 잔잔한 물결의 파도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처음으로 가족의 정이 어떤 느낌인지 똑똑히 느껴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