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서지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가슴이 설렘으로 요동쳤다. '이 남자가 그래도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구나. 나한테서 마음이 완전히 떠난 건 아니었어.'
그녀의 기대에 찬 눈빛과 달리 배혁준의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이 스쳤다. "서지하, 착각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내가 이혼을 거부할 거라고 생각해?"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기억해, 서지하. 이혼을 요구한 건 너야. 후회해도 소용없어. 나중에 질질 짜면서 다시 기어들어오려고 꿈도 꾸지 마."
그 말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서지하는 침대에 누운 채 절망에 빠졌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배에 손을 올리자 작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원래는 이 기쁜 소식을 남편에게 전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몇 시간 만에 이혼얘기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잠시 생각한 끝에 그녀는 결국 배혁준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헤어지더라도 혼자서 아기를 키울 생각이었다.
한편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갑자기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녀의 직업은 배혁준의 "비서"였다. 배혁준의 할머니가 두 사람을 맺어주기 위해 그렇게 안배한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렇게 된 이상 비서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서지하가 부영 그룹 본사에 도착하자마자 수다쟁이 동료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지하 씨, 아침 내내 기다렸어요! 배 대표님과 임예정 두 사람 무슨 사이에요? 둘이 사귀는 건가요?"
"슈퍼모델 임예정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배 대표님이 파티를 열었다는 소문이 밤새 파다하게 퍼졌어요. 심지어 수많은 친구들도 초대했다면서요. 조만간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려는 건가 봐요!"
"파티가 끝나고 둘이 뜨거운 밤을 함께 보냈다고 들었어요. 두 사람이 결혼까지 갈까요? 지하 씨는 더 아는 게 없나요?"
서지하는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잘 몰라요."
동료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럴 리가요, 지하 씨! 배 대표님의 비서인 지하 씨가 어떻게 내막을 모를 수가 있어요?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서지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다들 그녀가 배혁준의 비서라는 것은 알지만, 그녀가 배혁준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배혁준은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는 것을 꺼려했다.
서지하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몰라요. 이제 됐죠? 그리고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각자 할 일이나 해요."
동료들은 가십거리를 캐내지 않고서는 순순히 물러날 눈치가 아니었다. 서지하는 그들이 뭐라고 더 하기 전에 말을 잘라버렸다. "말할 게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더 묻지 말아요. 다들 잡담하려고 회사에 왔나요? 어서 일하러 가세요!"
그녀의 딱딱한 표정에 동료들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그녀의 말이 맞으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알았어, 알았어요."
서지하가 자리를 뜨자 그들은 뒤에서 낮은 소리로 숙덕거렸다.
"쳇!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거만하긴. 흥! 비서가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맞아. 그녀가 3년 전에 낙하산으로 입사했을 때, 얼굴도 예쁘고 해서 대표님의 비밀 애인인 줄 알았지. 근데 배 대표님은 저 여자한테 아예 관심도 없더라고. 회의나 미팅에 데려가는 것도 한 번도 못 봤어. 그저 잡무나 처리하는 말단 비서일 뿐이야. 그게 다지, 뭐!"
"사실 여기서 일할 날도 얼마 안 남았어. 배 대표님과 임예정이 결혼하면, 서지하가 제일 먼저 쫓겨날 걸? 하긴, 누가 자기 남편 주변에 예쁜 비서를 두겠어?"
"맞아!"
그들의 웃음소리와 거침없는 대화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지만, 서지하는 무시하고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일에 몰두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과 맞붙어 논쟁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처지가 참 우습게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다른 비서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서지하도 퇴근하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그녀의 절친인 함은서에게 전화가 왔다.
"지하야, 오늘 아침 뉴스 봤어. 도대체 혁준 씨랑 임예정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냥 소문일 뿐이지?"
함은서의 불신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서지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이야."
"뭐라고?!" 전화기 너머로 함은서의 충격에 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하루 종일 많은 생각을 한 서지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우리 결혼은 정략 결혼이었어. 그가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나와 결혼했을 뿐이야. 이제 그의 첫사랑이 돌아왔으니, 나도 이 결혼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어. 그들이 함께 하도록 놔줄 거야."
함은서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아기는 어쩌고? 혁준 씨에게 깜짝 기쁨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
"깜짝 기쁨? 아마 그에게는 끔찍한 충격일 걸?" 서지하는 본능적으로 평평한 배를 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결심했다는 거야. 이혼하고 혼자서 이 아이를 키울 거야. 그 사람이 알 필요는 없어."
"너 진심이야? 정말 이혼할 거야?" 함은서는 매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임신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면 일도 그만둬야 하잖아. 부영 그룹에 계속 있다간 조만간 들통날 거야. 배가 점점 불러올 테니까."
"걱정 마, 이미 대비하고 있어. 곧 사직할 거야. 그리고 내 꿈을 다시 시작할 거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꿈을 떠올리자 서지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세상에! 지하야, 너 다시 디자이너로 복귀하기로 결심한 거야?" 함은서는 제 일처럼 기뻐했다. "잘 생각했어! 난 항상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었어! 넌 천재 디자이너이니까! 덤벼라, 세상아! 패션 디자인계의 전설인 해오름이 온다! 넌 배혁준의 비서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아까운 애야. 그 동안 고생 많았어!"
"해오름⋯" 서지하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을 듣고 멍해졌다.
배혁준을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왔다.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서지하."
그때 갑자기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 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란 서지하가 몸을 돌리자 무표정으로 서 있는 배혁준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