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붉게 물든 석양이 꽃무늬 박힌 창살 사이로 스며들어 심가연의 여윈 몸을 비추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심가연은 주름진 손수건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자잘한 기침을 연달아 터뜨렸다.

비단 손수건에 묻은 핏자국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후작 부로 시집을 온 지가, 어느덧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긴 세월 동안 후작의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곁을 지켜줄 혈육도 하나 없었다.

반평생을 후작부의 안주인으로 지내며 모든 열정을 후작 부에 쏟아 부은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작 부에서 그녀는 그저 뿌리 없는 부평초와 같았고, 의지할 곳조차 하나 없는 외로운 존재였다.

그녀는 자신의 곁에 조용히 서 있는 시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작님을 모셔 오도록 하여라. 내가 후사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다."

문간에 기대어 졸고 있던 어린 시녀는 귀찮은 듯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마님, 후작님께서는 지금 이 부인 처소에 계십니다. 노비가 가봤자 허탕일 뿐입니다."

심가연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본 어린 시녀는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지킨 심가연이 마른 손가락으로 침상 모서리를 잡자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나를 부축하거라. 내가 직접 후작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어린 시녀는 마지못해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몸을 살며시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심가연은 병든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별채의 문이 살짝 열려 있는 틈새로, 맑고도 즐거운 웃음소리가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밀어젖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온몸의 피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 소승욱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이연아의 옥 같은 발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따뜻한 물에 담그고 있는 모습이었다.

"후작 나리. 이러시는 모습을 하인들이 보기라도 하면, 분명 웃음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평소 결벽증이 심하기로 소문난 소승욱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부드러운 수건으로 이연아의 발목을 살살 닦아주며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부부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느냐?

네 이 발을, 내가 평생을 닦아준다 한들 전혀 짜증 나지 않고 오히려 바라는 바이다."

"누가 부부라는 겁니까?" 이연아가 교태를 부리며 발끝으로 그의 손등을 살짝 문질렀다. "후작님께서 정식으로 맞이하신 부인께서는 본채에 누워 계시지 않습니까."

소승욱의 목소리에 짜증과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그 여자는 우리 소씨 가문을 위한 돈줄에 불과하다! 내 마음속의 진정한 아내는 오직 너 하나뿐이다."

그는 말을 이어가면서, 이연아의 옥처럼 고운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문 밖에 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심가연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과거 소씨 가문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후작 부의 안주인인 그녀는 혼수도 팔고 여러 사람들에게 굽신거리며 도움을 청했다.

그 후, 소승욱이 섭정왕의 심기를 건드려 감옥에 갇히게 되자, 심가연은 화려한 옷차림과 비녀를 벗어 던져버리고는, 홀로 섭정왕부 앞의 차가운 돌계단에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빌었다.

살을 에는 듯이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그녀는 백 번이 넘도록 머리를 조아렸고, 눈물이 다 마르고 피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섭정왕부에서 사흘 밤낮을 섭정왕의 갖은 희롱을 견뎌낸 후에야 비로소 소승욱은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한 그녀가 이 몹쓸 아이를 낳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심가연은 평생을 소씨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해왔으니, 설령 소승욱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헌신에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승욱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이토록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니!

심가연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참, 나리, 오늘 아침에 언니를 진찰한 의원의 말에 의하면, 언니가 곧 숨이 멎을 것 같다는데 한번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승욱의 웃음소리가 뚝 그치더니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를 보러 가라고?

전에는 그 자가 후작 부를 지탱해 주어야 했으니, 겉으로나마 상경여빈(相敬如賓)하는 체라도 했지. 이제 곧 죽을 목숨이나 다름없는 자에게 쓸데없이 공을 들이고 시간을 낭비해서 무엇 하겠느냐?"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더욱 냉혹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그 늙어빠진 얼굴은 보기만 해도 역겹다! 경성 제일 미인은 무슨, 이젠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는 주름지고 늙은 할망구에 불과할 뿐이다!"

심가연은 자신의 바싹 마르고 주름진 늙은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후작 부를 위해 애를 태우며 살아왔기에, 자신을 돌보고 가꿀 여유와 시간조차 전혀 없었던 것이다.

60이 채 되지도 않은 그녀의 얼굴은, 마치 80이나 90세 노파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녀보다 겨우 두 살 어린 이연아는, 여전히 꽃처럼 아름다운 자태와 용모를 뽐내고 있었다.

별채 안에서 이연아의 달콤한 목소리가 독약처럼 들려왔다.

"나리께선 정말 마음이 모질기도 하시옵니다.

심가연도 한때는 수많은 남자들의 추앙을 받던 아름다운 미인이었거늘, 나리께서는 그 자에게 몰래 절사약을 먹여 불임으로 만드셨지요."

이연아는 소승욱의 목에 팔을 감싸 두르며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멍청한 여인은 후작님께서 저를 정식으로 들일 수 있도록 직접 앞장서 나섰을 뿐만 아니라, 마치 후작부에 큰 죄나 진 듯이, 평생을 소나 말처럼 고되게 일만 해왔지 않았습니까."

절사약, 그 세 글자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처럼 심가연의 상처투성이인 마음에 깊이 내리꽂혔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것이 단순히 물에 빠진 사고 때문이 아니라 소승욱이 치밀하게 계획한 음흉한 모략이었다니!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피눈물을 흘렸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오직 뼈를 저미는 듯한 배신감뿐이었다.

소승욱!

소승욱!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친 심가연은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릿한 피 맛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입에서 쏟아져 나온 선혈이 그녀의 가슴께 옷자락을 붉게 물들였다.

몸이 바닥에 무겁게 쓰러지면서 의식이 흐려져 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이연아의 가식 가득한 비명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어머나, 후작 나리! 언니가 피를 토했어요! 이러다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심가연이 평생을 사랑하고 헌신한 남자는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구나, 참 잘됐어! 마땅히 죽어야지. 그래야 그 여자 병수발에 후작부 은자를 낭비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회차 2

비단 장막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심가연이 번쩍 눈을 뜨자, 눈앞에 연꽃색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코끝에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는 병상에 누워 매일 맡았던 쓰디쓴 약 냄새와는 사뭇 달랐다.

심가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깨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산적의 칼에 맞아 숨져 버렸던 그녀의 시녀 서향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다급한 눈빛으로 서향을 돌아보았다.

"지금이 무슨 해며, 어느 날이냐?"

심가연의 심각한 표정에 서향이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고 대답했다.

"마님, 지금은 대운 백이십삼 년, 삼월 초열흘날이옵니다."

심가연은 비로소 소승욱과 혼례를 올린 지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 냈다.

이때의 소승욱은 후작이 아니라 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고, 지금의 후작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소진충이다.

시아버지가 다른 황자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얼마 전 신임 황제에게 숙청당하면서 가문이 급격하게 몰락했던 것이다.

심가연은 이불을 걷어내고 옷을 입으며 서향에게 명령했다. "장부에서 은자 오만 냥을 빼내오너라."

앞으로 몇 달 후, 경성에 큰 역병이 돌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약재와 식량의 가격이 폭등하여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전생에 그녀는 역병이 돌기 시작할 때부터 상업적 기회를 발견했다. 하지만 어렵게 모은 약재와 식량을 소씨 가문의 명의로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가문의 명성을 높였고, 이를 통해 소씨 가문이 새 황제에게 다시 눈도장을 찍을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어리석지 않은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오롯이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울 작정이었다.

서향이 지체 없이 답했다. "예, 마님.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서향이 떠나자 심가연은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답고 앳된 얼굴을 보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소승욱, 전생에 네가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하나도 빠짐없이 치르게 하고 말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향이 빈손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뒤에는 마르고 홀쭉한 몸에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후작 부의 재산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장부 선생 주성덕이었다.

"주 선생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소? 내가 선생을 부른 기억은 없는데 말이오."

주성덕이 거만한 태도로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작은 마님, 소인은 명을 받들어 마님께 후작부의 규율을 조금 가르쳐 드리러 왔습니다."

"은자 오만 냥은 실로 막대한 금액이기에, 새로 들어오신 마님께서는 함부로 취하실 수 없사옵니다. 반드시 노부인의 윤허를 받으신 후에야 가능하옵니다."

심가연은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주성덕을 차갑게 쏘아봤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구나! 내가 가져온 혼수를 내가 쓰겠다는데, 어찌 다른 이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이냐!"

"자네가 똑똑히 계산해 보거라. 지금 후작 부 창고에 쌓여 있는 은자 중, 얼마가 내 것이고, 얼마가 후작부의 재산인지를 말이다!"

여자의 혼수야 아무리 많아 봤자 얼마나 되겠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주성덕은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장부를 펼쳐 들었다. "계산해 보면 그만이지요."

'노부인께서도 함부로 나를 다루지 못하시는데, 새로 들어온 부인이 이렇게 버릇이 없을 줄이야.'

오늘 이 자리에서야말로 새로 들어온 이 둘째 부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후작 부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줄 작정이었다.

심가연은 냉소를 지으며 서향을 돌아봤다.

"내 혼수 목록을 가져오너라. 이 후작 부에 있는 은자 중 얼마가 내 것이고, 얼마가 소씨 가문의 것인지를 똑똑히 알게 할 거다."

주성덕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혼수 목록을 받아 들고, 품에서 주판과 장부를 꺼내 차례차례 계산하기 시작했다.

후작 부는 얼마 전 가문이 몰락했으니, 은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계산할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갔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심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내려다봤다.

"후작 부는 이제 빈털터리나 다름없다. 너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이 다 내 은자에서 나가는 것이고, 자네가 받는 봉록 또한 내 돈에서 나가는 것이다!"

"계속 후작 부에 남고 싶거든, 내 말을 잘 따르는게 좋을 지 싶구나."

주성덕은 상황을 판단할 줄 아는 자였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약간의 수완으로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번 생에서도 그리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주성덕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예, 마님. 소인 잘 알았사옵니다!"

"금일부터 소인은 오직 마님의 명에만 따를 것이며, 결단코 두 마음을 품지 않겠나이다! "

주성덕은 빠르게 물러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은자 오만 냥을 심가연의 처소로 보냈다.

전생과 이번 생은 너무 오랜 시간을 두고 있는 탓에, 심가연은 자신의 혼수 목록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해, 혼수 목록을 펼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승욱이 이레마다 자신의 혼수에서 은자 백 냥을 빼내 외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생에 그녀는 장부에서 이 지출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소승욱은 그 은자가 후작부의 옛 부하들을 위로하는 데 사용된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소승욱의 말을 믿고 은자를 더 많이 가져가 절대 옛 부하들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후작부가 몰락하기 전부터 이미 쇠퇴의 조짐이 보였는데 위로해야 할 옛 부하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은자의 행방은 참으로 묘연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날이 바로 소승욱이 은자를 꺼내는 날이다. 심가연은 서향과 함께 소승욱의 뒤를 몰래 밟았다.

후작 부를 나선 소승욱은 곧장 성남에 있는 한 저택으로 향했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저택의 문을 열었다.

안에서 이내 교태 섞인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승욱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긴 심가연은 문틈으로 저택 안을 조심스럽게 엿보았다. 저택 안에는 분홍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우아하게 서 있었다. 요염한 눈매를 가진 그 여인, 바로 이연아였다.

이연아는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소승욱의 팔짱을 끼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소승욱은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너를 보러 오겠다고 약조했으니,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건 네게 줄 은자다. 네가 좋아하는 물건이라도 사거라. "

은자를 건네받은 이연아의 미소가 더욱 달콤해졌다.

"역시 오라버니께서 저를 제일 아끼시는군요."​

문 밖에 몸을 숨긴 심가연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한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행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녀가 시집오기 전부터 정을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승욱, 이연아. 이 간악한 놈들이! 감히 나를 이토록 처참하게 기만했단 말이냐!'

회차 3

담장 밖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은 심가연은 손수건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연아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나와 그녀의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승욱 오라버니, 심가연이 경성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 불릴 정도로 예쁘다는데, 그런 여인과 매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면서 정말 단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으신가요?"​

소승욱은 이연아가 오해할까 봐 황급히 변명했다.

"연아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내 마음속엔 오직 너 하나뿐이다. 심가연은 그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만약 이씨 가문과 소씨 가문이 그 여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했겠느냐?"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연아를 달래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거라. 지금 아버님께서 옥에 계시고, 너희 집안 역시 심가연의 재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니, 당분간은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없어."

소승욱은 이연아를 자신의 품에 꼭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어머니께서 약조하셨다.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심가연에게 절사약을 먹여 영원히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기로."

"그때가 되면 심가연은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임을 깨닫고, 분명히 스스로 네가 후작 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직접 나설 거다."

소승욱의 잘생긴 얼굴에 혐오스러운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이리 하면 후작 부가 은혜를 모른다는 소문도 피할 수 있고, 그 여자는 후작 부에 대를 잇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빠져, 소씨 가문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되겠지!"

소승욱은 잠시 멈추더니 이연아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더욱 낮게 속삭였다.

"나 소승욱의 아이는 오직 너의 배에서만 태어날 거다."

심가연은 문틈을 통해 소승욱이 이연아의 배를 어루만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의 손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애틋했다.

이연아는 수줍은 얼굴로 그의 품에 파묻힌 듯 안겼다. 누가 보아도 깊은 정을 나누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입술을 세게 깨문 심가연은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고 나서야 저것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녀는 절사약에 관한 음모가 소승욱 혼자 꾸민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어머니까지 이 더러운 계획에 가담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 전체가 나를 속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등이 나무에 부딪히자, 통증에 눈앞이 아찔해지며 어지러웠다.

"마님!" 서향이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씨 가문의 저자들이 정말로 너무합니다! "

"마님께서 후작부에 시집오지 않으셨다면, 성상께서 심씨 가문의 체면을 봐 주시지 않았다면, 후작부는 진작 유배를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마님을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님, 이대로 가만히 계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성상께 고하여 저들을 엄벌에 처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

심가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눈빛에 서린 연약함은 이내 차가운 증오로 대체되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 그녀는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성상께 고해봤자 결국 우리를 그저 이혼시키실 뿐이다. 그 자들에게는 너무나 가벼운 벌에 불과하지."

그녀는 서향을 돌아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소씨 가문이 내게 진 이 모든 빚을, 나는 하나하나, 원금에 이자까지 더하여 반드시 돌려받을 것이다!"

심가연의 눈빛에 서린 깊은 증오를 본 서향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인은 오로지 마님의 명령만을 따를 뿐입니다! 마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침묵을 지키며 작은 정원을 나서자, 길을 걷는 행인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공중에 퍼져오고 나서야, 두 사람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길 한가운데에 거친 베옷을 입은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검은색 비단 도포를 입은 남자의 다리를 꽉 끌어안고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섭정왕 전하! 제 아버지가 큰 잘못을 저질렀나이다. 다시는 전하께 맞서지 않을 것이니, 부디 성상께 한 말씀만 해주시어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검은색 비단 도포를 입은 남자는 바로 섭정왕 하운철이었다.

하운철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힘껏 발길질로 그를 걷어찼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하운철은 앞으로 다가가 한 발로 그 사내의 다리뼈를 내리 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남자는 심장을 찢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감싸쥔 채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의 비명 소리는 듣는 이의 머리털을 쭈뼛 서게 할 정도로 처절하고도 끔찍했다.

하운철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태연한 모습으로 곧장 자기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가 천천히 지나가며 바퀴가 다시 한번 그 사내의 다리를 밟자, 사내의 비명 소리가 더욱 커지고 처절해졌다.

심가연과 서향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겁에 질린 서향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심가연의 손을 잡고 뒤로 숨었다.

"마님, 어서 이리로 숨으십시오! 절대로 섭정왕 전하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옵니다!"

서향의 손에 이끌려 담장 뒤에 숨은 심가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가 왜 숨어야 하지?"

서향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마님, 잊으셨습니까? 예전에 마님께서 둘째 도련님과 혼인하시겠다고 고집하셔서, 섭정왕 전하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섭정왕 전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시니, 이럴 때 눈에 띄었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서향의 말에 전생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전생에 시아버지 소진충이 감옥에 갇힌 후, 소승욱은 사방으로 도움을 청하러 다녔지만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했고, 돌아올 때마다 깊은 한숨만을 내쉬곤 했다.

소승욱이 안쓰러웠던 그녀는 자신의 혼수품을 내어주며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치라고 했다.

은자를 본 관료들은 모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하운철의 허락을 받아야만 일이 해결될 수 있다고 얼버무렸다.

시아버지를 구하고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는 하운철을 찾아갔고, 하운철에게 적지 않은 모욕을 당했다.

심가연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굳게 다짐했다.

'이번 생에는 절대 나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 거다. 더더욱 소씨 집안의 그 배은망덕한 자들을 위해 하운철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고 오히려 하운철이 후작 부를 물고 늘어지게 만들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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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망덕? 절대 용서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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