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강씨 저택을 나선 강모연은 텅 빈 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채찍을 맞은 몸에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해져 왔지만, 가슴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강씨 저택에서 지내는 1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견뎠는지 모른다. 가족의 따뜻한 정이 그리워 자신의 날개를 접고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돌아오는 건 무관심과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요구들뿐이었다.
자리에 멈춰 선 강모연은 뒤돌아 저택을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봤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저택은 재벌 가문의 권위를 그대로 뽐내고 있었다.
"내 도움 없이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가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강모연 씨, 오늘 의외의 모습을 알게 됐네요."
다시 자리에 멈춰 선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경호원에 의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과 정교한 이목구비는 한눈에 봐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다. 더욱이 휠체어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주위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장애인만 아니었다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연정은 그를 안중에 두지 않았고, 강씨 가문 사람들은 강연정 대신 강모연을 데려와 정략결혼을 도모했다.
"박 도련님, 무슨 말씀이죠?" 눈을 가늘게 뜨고 캐묻는 강모연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박준성을 살짝 치켜 뜬 눈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사실 지금 강모연 씨 모습에 적지 않게 충격 받았어요. 평소 온순하고 자기주장도 펼치지 못했던 강모연 씨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죠. 오늘 모습은 예상 밖이었어요."
"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요?"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에 주먹을 세게 움켜쥔 그녀는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할 자세를 취했다.
박준성은 전혀 개의치 않고 경호원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강모연 씨가 내 약혼녀인 걸 고려했을 때, 이 정도 관심은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좋아요." 강모연은 공격 태세를 풀고 박준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박준성 씨는 저를 약혼자로 받아들일 준비됐나요? 제 기억이 맞다면, 박준성 씨는 저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저를 아주 싫어했었는데 말이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죠. 지금은..." 말을 하면서 강모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박준성은 그녀의 두 눈에서 나약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강모연 씨는 제 약혼녀로 손색없네요."
싱긋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 바람이 가볍게 불어오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분명 눈이 부실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였지만, 차가운 기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박준성 씨, 아무 이유 없이 저를 찾아오지 않았을 테고, 얘기하세요, 용건이 뭔가요?"
박준성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언뜻 비쳤다. 하룻밤 사이 강모연의 변화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저와 거래하죠."
"계속 말해 보세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도 강모연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했다.
"강모연 씨가 가족들과 연을 끊고 나왔으니 강 회장이 돌아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박준성의 묵직한 목소리가 유난히 기분 좋게 들려왔다. "저는 강모연 씨의 안위를 지켜주는 것과 동시에 강씨 가문의 압력을 견뎌내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끔 충분히 지원할 수 있어요. 강모연 씨는 지금 강씨 가문에 복수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눈을 가늘게 뜬 강모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박준성을 쳐다봤다. 짧은 시간 동안 정확히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강씨 가문은 그녀를 데려온 것이 은혜를 하사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강모연은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손에 넣을 기회까지 놓쳤다는 걸.
"박준성 씨가 원하는 건 뭔가요?" 그녀가 시종일관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인신고요. 내일 법원 앞에서 봅시다."
박준성의 말에 강모연은 잠시 넋을 잃은 듯하다가, 이내 싱긋 미소 지었다. "제안 기꺼이 받아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