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강모연, 뻔뻔한 년. 대체 동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늘 그 나쁜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어!" 허영애가 불같이 화를 내며 손에 든 채찍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넓은 저택에 채찍을 휘두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고, 하인들은 두려움에 몸을 흠칫 떨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나 강모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가녀린 몸을 흠칫 떨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피부가 찢기는 고통을 참아냈다.
"데려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더니, 고작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야?"
허영애가 분에 찬 목소리로 채찍을 연신 휘두르자, 강모연의 등은 금세 피로 물들었고 희고 작은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당당하기만 했다. 어쩌면 잔혹한 처벌에 습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연정이에게 당장 사과해!" 몇 번의 채찍질에 힘에 겨운 허영애가 숨을 헐떡이더니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강모연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사과해야 하죠?" 그런 허영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하는 강모연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에 분노가 극에 달한 허영애가 채찍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말했다. "네가 오늘 연정에게 사과할 때까지 가만두지 않겠어!"
바로 그때, 곁에서 잠자코 있던 허영애의 수양딸 강연정이 허영애의 팔을 꼭 잡고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애원했다. "엄마, 언니 때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언니한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연정아, 넌 어쩜 이렇게 착하니. 얘가 널 죽이려 했는데, 넌 따지지 않고 얘 편만 들겠다는 거야?" 한숨을 길게 내쉬며 강연정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는 허영애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강모연이 마음을 얼마나 독하게 먹었는데. 네가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망고 푸딩을 먹였잖아.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이렇게까지 모질게 먹을 수 있어?"
"저는 정말 몰랐어요!" 눈물이 가득 차 오른 얼굴로 반박하는 강모연이 서로를 다정하게 감싸 안은 두 사람을 올려다봤다. "망고 알레르기가 있는 줄 정말 몰랐단 말이에요!"
"아직도 변명할 셈이야?" 또다시 채찍을 휘두르는 허영애의 목소리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피부를 가르는 채찍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강모연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강모연이 강씨 저택에 들어와 지낸 후부터, 강연정과 관련된 모든 갈등은 강모연의 잘못으로 끝이 났다. 그녀가 아무리 증거를 내밀거나 변명을 해도 거짓 증거라는 말밖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얼마 전, 강연정이 스스로 계단에서 떨어졌는데도 강모연이 자신을 밀쳤다며 우겼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님은 강연정의 말만 굳게 믿을 뿐, 그녀의 해명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강씨 가문의 친딸인 그녀보다 수양딸인 강연정이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강씨 부부 두 사람의 눈에 강모연은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기 위해 일부러 강연정을 괴롭히는 못된 아이로 낙인 찍혔을지도 모른다.
강연정은 강모연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엄마, 저는 언니 마음 이해할 수 있어요. 필경 제가 언니 인생을 10년이나 차지했잖아요. 만약 제가 언니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저 역시 나쁜 마음을 먹었을 거예요. 제가 이 집을 떠나야만, 언니도 저를 원망하지 않고 집안이 화목할 수 있을 거예요."
항상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강연정은 강모연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구렁에 빠뜨리려는 계략이었고, 허영애는 그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럴수록 강모연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고, 가족에 대한 원망도 나날이 깊어갔다.
팍! 또다시 채찍이 날아들면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해지자, 강모연은 경멸로 가득 찬 눈으로 허영애와 강연정을 번갈아 노려봤다.
허영애의 자비 없는 목소리가 공기를 뚫고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연정이는 마음이 착할 뿐만 아니라 사려도 얼마나 깊은지. 네가 연정이 반이라도 닮았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넌 아직도 네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거야? 날 화나게 하려고 작정했어?"
강모연의 고집스러운 눈빛이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가 강연정에게 먹인 푸딩에는 망고가 없었어요. 제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쇼핑 목록을 확인하면 되잖아요."
"확인할 필요가 뭐 있겠어? 연정이 일부러 우릴 속일 이유도 없잖아?" 강연정의 말이라면 의심조차 하지 않는 허영애는 그녀의 쇼핑 목록을 확인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엄마..." 흐느낌 가득한 강연정의 목소리가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이렇게라도 언니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제가 언니를 오해한 것 같네요."
"연정아, 울지 마. 넌 이런 일로 상처받을 필요 없어. 저 은혜도 모르는 년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손에 쥔 채찍에 더욱 힘을 실은 허영애는 가문 안주인의 권위를 뚜렷하게 나타냈다.
"사과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3일 후, 강성에서 패션 디자인 대회가 열린다지? 네 디자인을 연정에게 양보하면 나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마."
결국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는 걸까?
정말이지 강모연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말만 골라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는 가족의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끝없이 양보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원래 그녀의 것이어야 했던 방도 강연정이 익숙하게 지냈던 방이라는 이유로 양보해야 했다.
심지어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아가씨라는 신분도 강연정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양보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작한 양보와 희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강모연은 강씨 저택에서 지냄과 동시에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허영애는 그녀의 헌신에도 만족하지 않고 대회 디자인 초안까지 양보하도록 협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 대회는 무려 그녀의 미래와 관련된 일인데도 말이다!
"대답해." 한참이 지나도 강모연이 대답하지 않자 인내심이 바닥난 허영애가 재촉했다. "벙어리야?"
"엄마 그만하세요." 강연정이 허영애의 팔을 잡고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도 이번 대회 참가자인데, 저한테 디자인 초안을 양보하면 언니는 어떻게 해요? 저는 제 실력으로 당당하게 우승을 거머쥐고 싶은데..."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그녀의 몸이 당장이라도 자리에 쓰러질 것처럼 떨리는 것이다. "몸이 허락하지 않네요..."
"강모연이 널 이렇게 만들었으니 당연히 책임져야지!" 허영애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강모연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디자인 초안 양보할 거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모연은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통증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저도 어머니 딸이잖아요." 인정을 바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세차게 떨려왔다.
"그래, 너도 내 딸이지. 그래서 이 엄마가 하는 말도 이제 듣지 않을 셈이야?"
허영애의 유별난 편애는 강모연의 마지막 남은 기대까지 모조리 짓밟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디자인 초안, 양보할게요."
입 꼬리가 희미한 곡선을 그린 강연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이 언뜻 비쳤다.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강모연이지만, 패션 디자인 만큼은 업계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다. 그런 강모연의 디자인 초안을 손에 넣는다면, 이번 대회 우승은 떼놓은 당상과 다름없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구나." 채찍을 한쪽에 내던진 허영애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더니 강연정을 돌아봤다. "강모연이 디자인 초안을 양보하겠다고 했으니 너는 대회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다. 집에서 편히 쉬다 상이나 받아 오면 되겠구나."
"엄마밖에 없어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영애의 품에 안긴 강연정이 시무룩한 눈빛으로 강모연을 돌아봤다. "제가 언니 디자인 초안을 가로챘다고 원망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일 없을 거야." 허영애는 강모연을 힘껏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을 가로챘다. "혹시라도 널 원망하면 집에서 쫓겨날 준비를 해야 할 거야. 우리 가문은 은혜도 모르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니 말이다. 아무리 내 친딸이라도 예외는 없어."
"만약 언니가 갑자기 내가 언니 디자인을 표절했다고 고발하면 어떻게 해요?" 강연정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난 디자인 초안이 완전히 네 것이 될 수 있게, 강모연의 흔적을 모두 지울 것이다."
애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허영애의 말에 강모연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감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지난 1년 동안, 가족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인가?
"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온 강모연은 이 집에 남은 한 가닥의 기대마저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다.
회차 2
"강모연, 뭐가 그렇게 웃겨?" 뒤이어 허영애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석었던 지난날의 저를 비웃는 거예요. 부당한 대우를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에 돌아오는 건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당신들의 약탈뿐이니." 잇새에서 비어져 나오는 실소에는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약탈? 언니가 되어 동생에게 디자인 초안 하나 양보하지 못한다는 거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날카롭게 반박하는 허영애는 강모연의 차갑게 식은 눈빛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모연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발씩 양보할 때마다, 당신들이 날 한 번이라도 바라봐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 생각은 틀렸고, 당신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날 무시하고 짓밟았어요."
절규에 가까운 호소가 넓은 저택에 가득 퍼졌다.
비굴하게 자리에 무릎 꿇고 있던 강모연이 반항심에 가득 찬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강씨 저택에 들어와 살면 부귀영화를 약속했잖아요. 하지만 내가 얻은 건 뭐죠? 지난 일 년 동안, 제대로 된 밥도 한 끼 먹지 못했어요. 당신들이 날 이용하고 짓밟는 것 외에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요?"
강모연은 가슴을 움켜잡고 처절하게 외쳤다. "나도! 나도 이 집 딸이에요. 당신들은 날 한 번이라도 딸이라고 불러준 적 있어요?"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피어 올랐다.
허영애는 그녀의 호소에도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딸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거 아니야? 딸아, 내 딸. 됐니? 만족해?"
강모연이 미친 듯이 웃었다. "사모님, 저한테 일말의 희망도 내비치지 않는군요."
순간 표정을 굳힌 그녀의 눈빛이 주위까지 얼려버릴 정도로 냉철했다. "저도 더 이상 당신들의 관심을 갈구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 이 시각부터 강씨 가문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내겠어요."
"너 정말 미쳤어?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것만 배워 갖고!" 허영애는 언성을 더욱 높이며 옆에 놓인 채찍을 다시 손에 쥔 뒤, 강모연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처음과 달리 날아오는 채찍을 단번에 손에 쥔 그녀의 얼굴에 한기가 가득 차 있었다. "또 채찍을 휘두를 생각이세요? 당신의 딸로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군말 없이 맞아드렸지만,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날 때리려는 거죠?"
입가에 반항적인 미소가 번진 강모연의 얼굴에 어느새 도도하면서도 당찬 모습이 묻어났다.
그녀는 허영애의 손에서 채찍을 낚아챈 뒤, 허공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사모님께서 날 때렸으니 저도 똑같게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무, 무슨 짓이야 이게!" 조금 전까지 얌전히 매를 맞던 강모연이 갑자기 위협적인 기세로 다가오자 허영애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허영애의 몸을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내려앉았다.
"네가, 감히 네가 날 때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비명을 내지른 허영애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했다.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언니, 어떻게 엄마를 때릴 수 있어?" 덩달아 충격 받은 강연정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강모연이 그녀를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봤다. 강연정은 그 눈빛에 몸을 흠칫 떨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이렇게 돌변할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니가 그렇게도 효녀였지, 그럼 니가 대신 맞으면 되겠네." 강모연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
그 말과 함께 높게 휘두른 채찍이 강연정의 몸을 힘껏 내리쳤다.
"아!" 채찍이 몸을 때린 순간, 극심한 고통과 함께 머리가 하얘지는 것을 느낀 강연정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강모연이 감히 그녀를 향해 채찍을 휘두르다니!
"강모연 멈추지 못해! 감히 우리 연정이한테 손을 대다니!" 허영애는 채찍이 살을 찢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연정을 품에 안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강모연은 허영애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채찍을 휘둘렀다.
허영애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저택 가득 울려 퍼졌고,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어대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눈을 뒤집고 기절할 것 같았다.
이러한 고통은 강모연이 지난 1년 동안 겪었던 고통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최대한 힘을 뺏으니 말이지 아니면 허영애는 이미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언니 제발 그만해! 엄마 죽는 꼴 보고 싶어? 다 내가 잘못했어. 때리려면 차라리 날 때려..." 강연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모연은 그녀를 허영애의 품에서 끌어냈다.
"강모연, 연정이에게서 손 떼!" 허영애는 자신의 살이 찢기고 있는 와중에도 강연정을 걱정했다. 정말이지 이토록 훌륭한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너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지?" 코웃음 치며 되묻는 강모연의 얼굴에 위험한 미소가 번졌다.
"뭘 어쩌려는 거야? 지금 당장 날 놓아주는 게 좋을 거야. 곧 아빠가 돌아올 시간이니, 언니가 엄마한테 한 짓을 알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두려움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강연정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강모연을 바라봤다.
"그 사람이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널 먼저 죽이면 되겠네."
강모연은 말을 하면서 탁자 위에 놓인 망고 푸딩 하나를 강연정의 입에 마구 쑤셔 넣었다.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강모연의 손아귀 힘을 버티지 못한 강연정은 망고 푸딩 하나를 그대로 삼키고 말았다.
"강모연 그만해! 연정이를 정말 죽일 셈이야!" 그 광경을 지켜본 허영애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제발, 누가 좀 말려줘. 빨리 저년부터 잡아!"
허영애의 악에 받친 비명을 들은 하인들이 빠르게 달려 나와 강모연을 둘러쌌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채찍을 휘두른 덕분에 하인들은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덤비려면 각오하세요." 강모연의 위험하게 반짝이는 눈빛을 발견한 하인들은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새어 나왔다. 평소에 매를 맞아도 신음 한번 내지 않던 그 강모연이 맞는 걸까?
"연정아, 괜찮아?" 허영애가 울면서 강연정을 품에 안았다. "엄마 놀라게 하지 말고 정신 좀 차려봐."
"사모님, 사모님의 착한 딸이 알레르기 반응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세요."
말을 마친 강모연은 실망만 가득 안겨준 저택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떠났다.
거실에 모인 하인들은 어쩔 바를 모르는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평소 바보같이 온순했던 강모연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거세게 반항할 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허영애에게 채찍질하고 강연정의 얼굴을 움켜잡고 망고 푸딩을 쑤셔 넣는 모습은 온몸에 소름 끼칠 정도로 섬뜩했다.
회차 3
강씨 저택을 나선 강모연은 텅 빈 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채찍을 맞은 몸에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해져 왔지만, 가슴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강씨 저택에서 지내는 1년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견뎠는지 모른다. 가족의 따뜻한 정이 그리워 자신의 날개를 접고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돌아오는 건 무관심과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요구들뿐이었다.
자리에 멈춰 선 강모연은 뒤돌아 저택을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봤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저택은 재벌 가문의 권위를 그대로 뽐내고 있었다.
"내 도움 없이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가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강모연 씨, 오늘 의외의 모습을 알게 됐네요."
다시 자리에 멈춰 선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경호원에 의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과 정교한 이목구비는 한눈에 봐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다. 더욱이 휠체어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주위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장애인만 아니었다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연정은 그를 안중에 두지 않았고, 강씨 가문 사람들은 강연정 대신 강모연을 데려와 정략결혼을 도모했다.
"박 도련님, 무슨 말씀이죠?" 눈을 가늘게 뜨고 캐묻는 강모연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박준성을 살짝 치켜 뜬 눈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사실 지금 강모연 씨 모습에 적지 않게 충격 받았어요. 평소 온순하고 자기주장도 펼치지 못했던 강모연 씨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죠. 오늘 모습은 예상 밖이었어요."
"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요?"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에 주먹을 세게 움켜쥔 그녀는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할 자세를 취했다.
박준성은 전혀 개의치 않고 경호원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강모연 씨가 내 약혼녀인 걸 고려했을 때, 이 정도 관심은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좋아요." 강모연은 공격 태세를 풀고 박준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박준성 씨는 저를 약혼자로 받아들일 준비됐나요? 제 기억이 맞다면, 박준성 씨는 저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저를 아주 싫어했었는데 말이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죠. 지금은..." 말을 하면서 강모연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박준성은 그녀의 두 눈에서 나약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강모연 씨는 제 약혼녀로 손색없네요."
싱긋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 바람이 가볍게 불어오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분명 눈이 부실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였지만, 차가운 기색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박준성 씨, 아무 이유 없이 저를 찾아오지 않았을 테고, 얘기하세요, 용건이 뭔가요?"
박준성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언뜻 비쳤다. 하룻밤 사이 강모연의 변화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저와 거래하죠."
"계속 말해 보세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도 강모연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했다.
"강모연 씨가 가족들과 연을 끊고 나왔으니 강 회장이 돌아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박준성의 묵직한 목소리가 유난히 기분 좋게 들려왔다. "저는 강모연 씨의 안위를 지켜주는 것과 동시에 강씨 가문의 압력을 견뎌내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끔 충분히 지원할 수 있어요. 강모연 씨는 지금 강씨 가문에 복수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눈을 가늘게 뜬 강모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박준성을 쳐다봤다. 짧은 시간 동안 정확히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강씨 가문은 그녀를 데려온 것이 은혜를 하사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강모연은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손에 넣을 기회까지 놓쳤다는 걸.
"박준성 씨가 원하는 건 뭔가요?" 그녀가 시종일관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혼인신고요. 내일 법원 앞에서 봅시다."
박준성의 말에 강모연은 잠시 넋을 잃은 듯하다가, 이내 싱긋 미소 지었다. "제안 기꺼이 받아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