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레스가 몸을 돌렸을 때, 안우혁은 발코니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그의 얇은 입술에 걸쳐 있었고, 무표정한 옆모습은 흰 연기 속에 묻혀 있었다.
안우혁이 담배를 피우는 일은 드물었다. 레스가 마지막으로 그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본 것도 벌써 2년 전이었다.
레스는 조심스레 발코니로 다가가 상황을 보고했다. "육수연 씨께서 다행히 큰 이상은 없습니다. 비를 오래 맞은 데다, 정신적 충격까지 겹쳐서 오한이 온 거예요. 주사 맞고 약 복용하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말을 멈춘 레스는 잠시 고개를 들어 흐릿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기사를 확인했어요. 육씨 가문… 정말 비열하네요. 연을 끊을 거면 조용히 끊지, 꼭 육은설 생일 파티에서 공개적으로 수연 씨에게 망신을 줘야 했을까요?"
레스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수연 씨를 해외에서 데려올 때 유전자 검사도 안 했던 겁니까? 이건 누가 봐도 함정이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수연의 휴대폰이 침대 머리맡에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안우혁은 다가가 전화를 끊으려다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그는 스피커 모드로 전화를 받았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들려온 건 남자의 격한 분노였다.
"육수연,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무시하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죽은 척한다고 뭐가 달라질 줄 알아? 내일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그걸로 끝이야. 나 진짜 더는 못 참아. 제발 나랑 은설 사이에 더 이상 끼어들지 마. 그 동안 육씨 가문에서 덕 본 거 많잖아. 양심 있으면 조용히 사라져. 그게 은설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야."
"그동안 내 할머니랑 어머니 돌봐준 건 고맙게 생각해. 니 몫은 적당히 챙겨줄 테니까 더는 바라지 마."
"왜 아무 말도 안 해? 어디 있는 거야?"
지속되는 침묵에 허상철은 점점 불안해졌고, 그 순간부터 옆에서 모든 대화를 지켜보던 레스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누가 제발 좀 말려줘…!'
허상철이 첫 마디를 뱉은 순간부터, 안우혁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와 살기는 방 안의 공기를 숨 막히게 했다. 레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안우혁이 서늘하게 웃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조차 보기 힘든 잔혹한 미소였다. "허상철, 너 육수연한테 늘 이런 식으로 말했어?"
그 말에 허상철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움찔했다. "너 누구야? 육수연은 어디 있어?"
안우혁은 고개를 돌려, 침대에 잠들어 있는 육수연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낮게,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내 옆에서 자고 있어."
그 말을 듣자 허상철은 폭발하듯 소리쳤다. "뭐라고? 너 대체 누구야!"
하지만 안우혁은 성난 그의 고함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차가운 눈빛으로 휴대폰을 바라보며 조소 섞인 말투로 답했다.
"왜 그렇게 급해? 시간 좀 지나면 알게 되겠지. 네가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안우혁은 전화를 뚝 끊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내리던 비는 말끔히 그쳤고, 창밖으로는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육수연은 조용히 눈을 떴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허상철에게서 온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메시지들을 훑어보다가, 무심하게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 지금은 샤워가 더 중요했다.
욕실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한 그녀는 오랜만에 살아있는 눈빛을 느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자 그 미소엔 생기가 감돌았고, 더는 공허하거나 억지로 웃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열병이 육수연의 멍청했던 지난날, 그리고 가족에 대한 어리석은 충성심을 모두 태워 없애버린 듯했다.
'더 이상 바보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이 비극적인 연극은… 여기서 끝이다.'
샤워를 마친 육수연은 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 하나를 눌렀다.
전화가 한 번 울리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격한 외침이 터졌다. "비너스! 드디어 전화했네! 이혼한다는 소문 사실이야? 제발 사실이라고 말해줘!"
전화기 너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누가 봐도 스피커폰으로 그녀의 통화를 엿듣고 있는 게 뻔했다.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 찍으러 가."
순간, 폭죽이라도 터진 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휘파람, 박수, 술잔 부딪히는 소리까지. 그녀의 친구들은 이미 축하 파티를 시작한 분위기였다.
"꺄악!! 드디어 정신 차렸네!! 그 지긋지긋한 가정주부 코스프레는 끝났어. 우리 비너스가 돌아왔다!"
"이혼은 너한테 일생일대의 축복이야! 허상철 그 인간은 애초에 너랑 급이 안 맞았어! 한마디만 해. 내가 당장 달려가서 복수해 줄게!"
"맞아, 육씨 가문이 뭐가 대단하다고! 작년 금융 위기 때 너 아니었으면 걔네 기술주는 진작에 폭망했을 거야. 비너스, 돌아와. 에덴은 항상 네 편이야."
그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육수연은 저절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지금 나 데리러 와줄래?"
그러자, 흥분에 찬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신님이 귀환하는 날인데, 당연히 모시러 가야지. 챔피언 레이서를 보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