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지석훈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원시연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애초에 그 방향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넌 아무 일도 없었어!"
지석훈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원시연의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죽은 척 연기하는 거 꽤 그럴싸하네."
원시연은 그런 지석훈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에 두껍게 감은 붕대 사이로 붉은 피가 스며 나왔고, 왼쪽 다리는 깁스로 단단히 고정된 채, 공중에 높이 매달려 있었다.
몸에는 심전도 모니터링 장비가 연결되어 있었고, 코에는 산소 호흡기가 꽂혀 있었다.
그런 원시연의 상태를 보고도, 지석훈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단정했다.
이 남자는 마음이 눈이 먼 정도가 아니라, 두 눈까지 완전히 멀어 버린 게 분명했다.
심미희는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지석훈의 소매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시연 언니, 다 내 잘못이에요. 언니를 화나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언니한테 무릎 꿇고 사과할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지석훈은 그런 심미희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 품으로 끌어당기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희야! 왜 저 여자한테 사과하려는 거야? 저 여자가 네 사과를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러고는 원시연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여 최후통첩을 내렸다.
"원시연,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지금 당장 미희한테 사과해! 그렇지 않으면, 절대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병실은 순식간 적막에 휩싸였고 심전도 모니터링 장비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삐, 삐' 소리만이 공기를 맴돌 뿐이었다.
지석훈은 턱을 치켜들고 원시연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모습을 기다렸다.
매번 그랬듯이, 파혼을 언급할 때마다 원시연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두려움에 떨었다.
원시연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뭐라고?" 지석훈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원시연은 어렸을 때부터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마음을 꺼내 보일 듯이 그들에게 온 정성을 바쳤던 그녀가 오늘 처음으로 '그래'라고 대답했다.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래, 결혼하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지석훈은 멍하니 자리에 멈춰 섰고, 그의 품에 안긴 심미희의 몸도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원시연은 병상에 누워 하얀 천장을 올려다봤다.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은 이미 세 사람에 의해 한 조각 한 조각 도려내져 더 이상 남은 게 없었다.
자신의 피를 강제로 뽑아 냈고, 개 집에 가둬 놓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교통사고가 났을 때는 자신을 밀쳐서 트럭에 치이게 했다.
그녀에게 몇 개의 목숨이 더 있어야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이번 생에는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살고 싶었다.
정신을 차린 지석훈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원시연의 코끝을 가리켰다.
"이런 개수작은 집어치워! 네가 나한테 화 났다고 해도, 배준상과 육승철은 어쩔 건데? 네가 고열로 정신 못 차리고 헛소리할 때, 그들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고상한 척이야?"
"난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어!" 말을 마친 원시연은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지석훈을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보는 것 자체가 더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는 온통 심미희 생각뿐이다. 그들과 결혼하는 여자는 그저 필요할 때 피를 뽑아내는 혈액 팩에 불과했다.
지석훈이 계속해서 욕설을 퍼부으려 할 때, 병실 문이 열렸다.
당직 간호사가 치료 도구를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마세요! 여기는 중환자실이에요. 계속 떠들고 싶으면 밖으로 나가서 떠드세요!"
심미희는 억울한 듯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간호사 언니, 저도 환자예요. 발이 너무 아파요…"
그러자 간호사는 눈을 흘기며 원시연의 수액을 갈아 끼우면서 냉정하게 말했다. "발목 한 번 삐끗한 것 뿐인데 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찰과상 환자는 진작에 퇴원하셨어야죠. 중환자실 앞에서 뭐 하는 거예요?"
"뇌과는 3층에 있어요. 문을 나서서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심미희는 간호사의 말에 얼굴이 빨개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지석훈은 안색이 순식간에 어둡게 가라앉더니, 심미희의 손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면서 병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원시연을 향해 독설을 내뱉었다.
"그래! 원시연, 평생 그 병실에 누워 있어. 미희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기 전까지, 우리 집에 돌아올 생각하지 마!"
보름 후.
원씨 가문에서 보낸 차가 병원 주차장에 멈춰 섰다.
원시연은 아직 다리에 깁스를 풀지 못한 상태라, 휠체어에 앉아 추기태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병원을 나섰다.
로비를 나서자마자 지석훈과 심미희가 차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심미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시연 언니, 미안해요. 석훈 오빠가 오늘 언니도 퇴원하는 줄 몰랐나 봐요. 차에 자리가 부족해서 저부터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어요."
지석훈은 팔짱을 끼고 휠체어에 앉은 원시연을 내려다보며 은혜를 베푸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건 너한테 주는 교훈이야. 원시연, 네가 미희한테 사과할 때까지, 아무 사람도 보내지 않을 거야."
원시연은 아무 말 없이 휠체어 손잡이 위에 손가락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3년 전, 그녀는 가족과 재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귀국했지만, 돌아온 건 비둘기가 남의 둥지를 차지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원씨 가문의 큰 아가씨는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는 악녀가 되어 버렸고, 하인의 딸은 세 명의 도련님에게 사랑받는 공주님이 되었다.
추기태 아저씨는 옆에서 손을 비비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늘 큰 아가씨를 데리러 왔지만, 지 도련님과 심미희가 차를 빼앗으려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원시연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지석훈은 추기태 아저씨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운전해. 미희는 집에 가서 약을 챙겨 먹어야 해!"
추기태 아저씨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큰아가씨께서 아직…"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석훈이 가로채듯 말했다. "원시연이 기다리겠다고 하잖아!"
"원시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미희가 너와 함께 햇볕을 쬐길 바라는 거야?"
원시연은 눈을 번쩍 뜨더니 지석훈을 지나쳐 추기태 아저씨를 쳐다봤다.
"아저씨, 저를 차에 태워주세요."
그 말에 추기태는 서둘러 앞으로 다가와 휠체어를 밀고 차 문 옆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원시연을 조심스럽게 부축해 뒷좌석에 앉혔다.
"큰 아가씨, 이제 출발할까요?" 말을 마친 추기태는 운전석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원시연은 옆자리에 앉은 지석훈과 심미희를 쳐다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회차 3
"뭘 기다려? 원시연, 자기 분수를 잘 알아야지!" 지석훈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원시연은 가죽 시트에 편안히 몸을 기댄 채, 지석훈의 뒤에 숨어 있는 심미희를 쳐다봤다.
심미희는 지석훈의 옷깃을 꼭 움켜쥐고 그의 등 뒤로 몸을 움츠렸다.
원씨 가문은 지석훈 세 사람을 입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최고의 생활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심지어 그들을 해외로 유학 보냈고, 회사 주식까지 나누어 주었다.
그 모든 건 오직 그들이 원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원시연을 지켜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정작 그 세 사람은 원씨 가문의 모든 자원을 심미희에게만 쏟아부었다.
심미희는 원씨 가문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딸에 불과할 뿐인데 원씨 가문 아가씨에 못지않은 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외출할 때마다 고급 세단이 그녀를 데리러 왔고, 원씨 가문의 진짜 아가씨인 원시연은 오히려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원시연은 시선을 거두고 지석훈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렷하게 말했다. "당연히 기다려야지."
지석훈은 심미희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햇빛을 가려주며 원시연을 향해 소리 질렀다.
"원시연, 내가 차에 태워주겠다고 한 걸 고맙게 받아들여야지. 왜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야?"
원시연이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창문 제어 버튼을 살짝 누르자, 창문이 조용히 올라가면서 지석훈의 팔을 그대로 끼워 버렸다.
지석훈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팔을 거두어들였다.
원시연이 비아냥 섞인 어조로 덧붙였다.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은 사람이 있잖아."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운전석 쪽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추 아저씨, 이 두 사람을 차에서 내쫓아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추기태 아저씨는 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어 뒷좌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지석훈의 팔을 확 잡아당겨, 단번에 차 밖으로 끌어내 버렸다.
방심한 지석훈은 몇 걸음 비틀거리더니 옆에 있는 화단 울타리에 부딪히고 말았다.
심미희는 깜짝 놀라 비명 섞인 목소리로 지석훈을 부르며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하이힐이 꺾이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추기태는 반대편 차 문을 열고 심미희가 뒷좌석에 던져둔 명품 가방을 꺼내 그녀의 발밑에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차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가 기어를 넣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자동차 엔진이 굉음을 내며 배기구에서 회백색 연기가 뿜어져 나와 지석훈의 얼굴을 제대로 덮쳤다.
지석훈은 손을 휘저어 연기를 쫓아내며 몇 차례 기침을 쏟아 냈다.
점점 멀어지는 차량을 바라보며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원시연이 오늘 약이라도 잘못 먹은 걸까?'
평소 자신이 눈살을 찌푸리기만 해도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조마조마했다.
그런 그녀가 오늘 감히 운전기사에게 자신을 밀쳐 내라고 지시하다니.
'설마 이런 어설픈 밀당으로 내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심미희는 발목을 문지르며 지석훈을 올려다봤다. "석훈 오빠, 언니가 나를 탓하지는 않겠지?"
심미희의 빨개진 눈시울을 내려다본 지석훈은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원시연이 감히 그럴 자격이 있어? 지금은 화가 나서 저러는 거야. 며칠 지나면 다시 우리한테 아양을 떨며 찰싹 달라붙을 거야."
그는 소매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심미희의 손을 잡았다.
이곳은 산 중턱에 있는 개인 병원으로 택시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산 아래까지 걸어가야 했다.
게다가 원씨 가문의 산 중턱 별장은 외부 차량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즉, 두 사람은 더 먼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원씨 가문 별장.
원시연은 현관문 앞에 앉아 지친 걸음으로 겨우 산 중턱까지 올라온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석훈의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등에 달라붙었다.
심미희는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손에 꺾인 하이힐을 들고 맨발로 아스팔트 도로를 걷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숨을 들이마셨다.
"원시연, 너 정말 양심도 없는 사람이야?" 지석훈은 현관문에 들어서기 전에 원시연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원시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햇살을 완전히 차단했다.
"양심?" 원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차가운 어조로 되받아쳤다. "이 차는 원씨 가문의 차고, 나는 원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이야. 내가 우리 집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건데, 도대체 누구한테 양심을 지키라는 거지?"
지석훈은 말문이 막히더니 심미희를 앞으로 끌어당겨 그녀의 상처 난 발가락을 가리켰다.
"미희가 너 때문에 이렇게 고생했는데, 너는 여기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 네가 대회에 참가하려고 준비한 디자인을 미희한테 보상으로 줘. 그 디자인을 내주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할게."
원시연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줘야 하는데?"
지석훈은 그 한 마디에 다시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원시연이 예전에 이런 질문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입을 열기만 하면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원시연은 아무 조건 없이 내놓곤 했다.
"그건… 그건…"
한참을 고민한 끝에 지석훈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네가 우리를 정말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미희한테 그 디자인을 줘야지."
원시연은 이 모든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7년 전, 막 성인이 된 세 사람은 반년 가까이 심씨 가문 모녀를 찾아다녔다.
그때 겨우 15살이었던 원시연은 오빠들이 좋은 일을 하는 줄만 알고 졸졸 따라다니며 오히려 그들을 도와 소식을 알아보기도 했다.
심미희의 어머니인 오순화는 지석훈 세 사람이 고아원에 있을 때 그들을 돌봐 주던 보육사였다.
전기 고장으로 불이 났을 때, 그녀는 지석훈 세 사람을 품에 안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 과정에서 두 손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후로 10년이 넘도록 세 사람은 그 은혜를 잊은 적이 없었다.
드디어 심씨 가문의 모녀를 찾은 그들은 두 사람을 원씨 가문으로 데려와, 의식주를 원씨 가문의 기준에 맞춰 제공해 주었고, 은혜를 갚는 빚을 원시연에게 떠넘겼다.
오순화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준 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키우고, 해외 유학을 보내 주며, 원씨 가문의 주식을 그들 손에 쥐어준 건 원씨 가문이었다.
처음에 원시연은 그들이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지금 보니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애초에 구분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원시연은 차가운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안 줘."
지석훈은 낯설게 변한 여자를 바라보며 마음속에 짜증이 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원시연은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