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뭐야? 이제 와서 치료는 유선생께서 책임진다고?'
박주안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 들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절친 유의사가 이 분야의 전문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눈앞에 있는 여자 외에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박씨 가문은 규모가 크고 내부 관계가 복잡했다.
그러니 박씨 가문의 후계자인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수많은 사람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남자의 존엄과 관련된 은밀한 병이 소문으로 퍼지면, 아무리 사소한 흠집이라도 흑심을 품은 자들이 그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고, 심지어 그룹 내에서의 그의 지위마저 흔들릴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문내의 전속 의료팀에게 맡기면 어떨까?
그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의료팀은 가문 전체를 위해 봉사하고 있었고, 인원수도 적지 않으니 누가 누구의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의료팀에 비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그에게 자신의 절친인 유의사를 찾아가라고 한 이유도 바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가장 은밀하고 수치스러운 비밀을 소시은이라는 여자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유의사 한 명 더 늘어나면 위험도 한층 더 커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단 과정부터 검사, 그리고 보고서 작성까지 모두 그녀가 완성했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유의사를 찾아가 처음부터 다시 그 수치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말인가?
박주안은 그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출력했습니다." 소시은은 몇 장의 A4 용지를 정리하고 병력과 검사 결과지를 함께 서류 봉투에 넣어 그에게 건넸다. "환자분, 이건 환자분의 모든 검사 자료입니다. 이 자료를 가지고 내일 유선생님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흰 가운을 벗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됐네요." 가방을 챙긴 그녀는 퇴근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박주안은 서류 봉투를 받지 않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당신, 퇴근할 수 없습니다."
소시은은 그 말에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환자분, 제 근무 시간은 이미 끝났습니다."
"제가 퇴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박주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압도적인 기세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진료실 문을 쾅 닫은 것도 모자라 잠그기까지 했다.
좁은 공간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소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환자들을 많이 봤지만, 박주안처럼 기세가 강하고 막무가내인 환자는 처음이었다.
팔짱을 낀 그녀는 태연한 모습으로 그를 쳐다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분,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의사를 불법 감금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는 있습니까?"
"결과?" 박주안은 그 말에 실소를 터뜨리더니 그녀 앞에 다가가 차갑게 내려다봤다. "저의 병을 진단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그래서요?" 소시은은 전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박주안은 낮은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마치 최후통첩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그러니 저의 후속 치료는 마땅히 당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소시은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여태껏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무례하고 억지스러운 요구는 처음이었다.
"환자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병원이지 환자분의 회사나 집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더욱이 환자분의 부하 직원이 아니고요."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반박했다. "저는 진료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니 제 책임은 이미 끝났습니다. 후속 치료는 더 전문적인 유의사가 진행할 겁니다. 이게 최적의 방안이기도 하고요. 이제 비켜주세요. 전 이만 퇴근해야 하니까요."
"당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박주안은 그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자신의 약점과 비밀을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의 손에 넘기는 것을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밉살스럽지만, 적어도 비밀은 그녀 한 사람의 손에만 쥐어져 있었다.
"소선생." 박주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더니 위협적인 기색이 묻어났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제일병원의 최대 주주가 박씨 그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죠? 당신한테 저의 치료를 책임지게 하거나, 내일부터 이곳에 출근하지 못하게 하는 건 나한테 있어서 전화 한 통이면 결정 지을 수 있는 일입니다."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이 직장이 필요한 젊은 의사라면 아마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시은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그의 앞에 마주섰다.
팔짱을 낀 그녀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를 천천히 올려다봤다.
"박주안." 그녀는 대놓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째,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건 그야말로 치사한 짓이죠. 둘째, 저는 단지 의사일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특별 초빙한 객원 교수입니다. 제가 없으면 병원의 손실이 더 커질 겁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았다.
그리고 진술에 가까운 말투로 넌지시 말했다. "지금 저를 필요로 하는 건 박주안 씨이지 제가 박주안 씨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 명심하세요. 그리고 타인에게 부탁할 때는 그에 걸맞은 태도를 갖춰야죠."
박주안은 완전히 멍해졌다.
'객원 교수였어?'
그는 눈앞에 있는 지나치게 젊은 얼굴을 보며 한동안 그녀와 교수라는 직함을 연결하지 못했다.
게다가 남한테 부탁할 시 그에 걸맞은 태도를 갖추라는 그녀의 따끔한 충고는 마치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손바닥 같았다.
헌데, 천하의 박주안이 언제 남한테 부탁을 해본 적이나 있었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말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환자의 입장이고, 그를 위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그리고 능력까지 겸비한 의사가 필요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어찌 보면 그의 유일한 선택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