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축하드립니다, 산모님. 임신이세요. 아기도 아주 건강합니다."
멍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선 고유일의 손에 쥔 임신 진단서가 꼭 쥐어져 있었다.
가느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진 그녀의 입가에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 그녀와 부도현의 아이다.
고유일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 기쁜 소식을 직접 전하기 위해 부도현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
그때 마침,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남편 부도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지금 당장 힐튼 호텔로 와.' 힐튼 호텔?
왜 갑자기 힐튼 호텔로 오라는 거지?
고유일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택시를 타고 바로 힐튼 호텔로 향했다.
부도현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직접 만나 임신 소식을 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도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호텔에 도착한 고유일은 호텔 곳곳에 놓인 장미꽃과 바닥에 깔린 새빨간 카펫을 발견했다. 호텔은 축하 준비로 한창인 것 같았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고유일은 오늘이 그녀와 부도현의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부도현이 그녀를 호텔로 부른 건,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주기 위해서일까?
호텔 로비에는 많은 손님들이 모여 있었고,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고유일의 수수한 차림은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부도현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자, 미래에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다.
고유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부도현의 곁에 선 여자를 발견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부도현의 첫사랑 임서아?
언제 귀국한 거지?
몸이 뻣뻣하게 굳은 고유일은 멀지 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처럼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의 주위에는 친구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서아야, 귀국 축하해! 오늘 내가 한 잔 제대로 산다!"
"도현아, 너네 드디어 만났는데 러브샷 한번 가야지?"
환호성이 점점 커졌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임서아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잉, 너네 그만해. 나랑 도현이가 무슨 러브샷이야? 도현이 유부남이잖아. 러브샷은 와이프 분이랑 해야지."
임서아가 고유일을 언급하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고유일? 걔가 무슨 아내야? 그냥 할머니 달래기용 도구일 뿐이지!"
"맞아. 도현이가 진짜 결혼하고 싶었던 건 너잖아. 안 그래, 도현아?"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부도현은 고급스러운 수트를 입고 차갑고도 독특한 우월한 기질을 드러냈다.
"그만들 해. 서아 술 못 하잖아. 흑기사는 내가 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친구들은 더욱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오, 부도현. 서아 챙기는 거 보소? 좋아! 서아 술 못 마시게 할 거면, 걔 몫까지 네가 다 마셔! 다 마시기 전엔 못 간다!"
친구들의 환호성 속에서 부도현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출 수 없었다.
그의 곁에 선 임서아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은 고유일의 눈을 찌르는 것 같았고,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가 언제 호텔을 빠져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닿고 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호텔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가 고유일의 몸을 적셨다. 순식간에 바람이 거세게 불고 빗소리가 더욱 커졌다.
고유일은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빗줄기를 바라봤다.
그녀는 부도현이 왜 그녀를 호텔로 불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그녀에게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부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임서아에게 양보하라고 부른 걸까?
고유일은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끼고 뻣뻣하게 발을 들어 앞으로 걸었다.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익숙한 집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2년 전, 파산 위기에 처한 고씨 가문은 부씨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부도현은 정략결혼을 거부했지만, 부씨 가문 할머니가 병세가 위중한 상황에서 그에게 결혼을 강요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결혼을 약속했다.
이제 부씨 가문 할머니의 병세도 많이 호전되었고, 임서아도 해외에서 돌아왔다.
아무래도, 그녀라는 이 철저한 이방인은 이제 부도현의 곁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유일. 너 여기서 뭐 해? 왜 꼴이 이래?"
회차 2
고유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 멍하니 굳어버렸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부도현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지? 임서아가 막 귀국했으니, 그가 사랑하는 여자 곁에 계속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부도현은 그녀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미간을 은근히 찌푸렸다.
지금 고유일의 모습은 마치 물속에서 방금 헤엄쳐 나온 사람 같았다.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이 핏기 없는 뺨에 달라붙어 있었으며, 머리끝에서는 물이 계속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비 오는 날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는 젖은 고양이처럼 가련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꼴이 이게 뭐야?" 부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주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고유일은 그가 얼마 전 호텔에서 임서아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이 욱신거렸다.
부도현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부도현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설명했다. "오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요. 우산을 안 가져가서 젖었어요."
말을 마친 고유일은 코가 간지러워지더니, 이내 크게 재채기를 했다.
부도현의 꽉 찌푸린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유일, 너 몇 살이야? 비를 맞았으면 집에 오자마자 몸부터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지, 이런 것까지 내가 알려줘야 해?"
고유일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죄송해요……"
"빨리 가서 씻어. 감기 걸리지 말고." 부도현은 그녀와 더 이상 긴 말 섞기 귀찮다는 듯, 짜증 섞인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감기? 고유일은 문득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절대 아프면 안 된다.
그 생각에 그녀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뜨거운 물로 빠르게 샤워를 했다. 그제야 온몸의 한기가 서서히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고유일이 열기로 가득 찬 욕실 문을 열고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걸어 나왔는데, 뜻밖에 부도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유일은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지르며 무의식적으로 가슴 앞의 수건을 움켜쥐었다.
부도현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다가, 그녀의 동작을 눈치채고는 표정 변화 없이 되물었다. "가리긴. 네 몸, 내가 안 본 데라도 있어?"
고유일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머릿속에 부도현과 함께했던 지난 밤들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부도현은 느긋하게 감기약 하나를 까서 물 한 잔과 함께 고유일에게 다가왔다.
"자, 약 먹어."
고유일은 그가 든 약을 보고 뱃속의 아이를 떠올리며 망설였다.
"저기…… 저 별일 없는 것 같은데, 약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부도현의 말투는 단호했다. "너 지금 네 안색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아? 내일 할머니 뵈러 가야 하는데, 이럴 때 아프다고 쓰러지지 마."
고유일은 임신 때문에 함부로 약을 먹을 수 없어 협조하지 않으려 했다. "따뜻한 물 많이 마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안 아플 거예요."
부도현의 미간에 짜증이 서렸다. 그는 앞으로 다가와 직접 물컵을 집어 들고는 감기약을 미지근한 물과 함께 입에 머금었다.
"도현 씨, 그…… 읍!"
고유일이 입을 열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부도현의 커다란 몸이 기울어지더니 거친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턱을 꽉 움켜쥐고 분홍빛 입술 위로 입을 맞췄다.
감기약이 물과 함께 고유일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고, 부도현의 큰 손이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입안의 약과 물을 억지로 삼키게 만들었다.
뜨거운 숨결에 고유일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녀는 무방비 상태로 부도현의 격렬한 키스에 휩쓸렸다.
욕망이 가득 담긴 깊은 키스는 부도현의 욕구를 자극했고, 두 사람은 겹쳐진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부도현은 아쉬운 듯 고유일의 힘 풀린 입술을 쪼아대다가 상체를 일으켜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깊은 눈동자에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욕망이 가득했다.
고유일은 흐릿한 시야로 그의 위험한 눈빛을 마주하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도현이 다시 덮쳐오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 돼요!"
고유일은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건장한 몸을 밀어냈다.
"뭐?" 부도현은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다시 한번 키스하려 다가오자, 고유일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부도현 씨, 우리…… 이혼해요."
그 한마디에 부도현의 눈에 서려 있던 욕망의 불꽃이 순식간에 꺼졌다.
그는 차갑게 고유일의 턱을 쥐고 얼굴을 똑바로 돌려세웠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의 맑은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천천히 물었다. "다시 말해봐."
고유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마음속에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부도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반복했다. "우리 이혼하자고요."
그 순간, 부도현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고유일은 그 말에 멍해졌다. 부도현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이유가 뭐겠어?
당연히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지. 부 사모님 자리를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여자, 임서아에게 양보하려는 거잖아.
"당연히……" "고씨 집안에 또 무슨 일 생겼어?
돈 필요해?" 고유일이 말을 잇기도 전에 부도현이 먼저 짜증스럽게 말을 끊었다. "고유일, 얌전히 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말하고. 이런저런 수작 부리지 말고, 나한테 투정 부리지 마."
고유일은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알고 보니 부도현은 자신이 이혼을 꺼낸 걸 투정 부리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이 기회에 조건을 걸고 이득을 취할까 봐 걱정하는 건가?
고유일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이혼만 하면 돼요. 부도현 씨, 어차피 우리, 언젠간 헤어질 사이잖아요. 지금 헤어지나 나중에 헤어지나,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난 후에도 부도현은 아무 대답 없이 기묘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고유일은 마음이 불안했지만, 왠지 모르게 헛된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아니면…… 이혼하기 싫은 거예요? "
회차 3
부도현이 이혼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유일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더니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부도현은 그녀의 기대에 찬 눈빛을 마주한 채 차갑게 비웃음을 터뜨렸다.
"고유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고유일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착각하지 마. 내가 이혼을 원하지 않을 것 같아?"
부도현은 고유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고유일, 똑똑히 기억해. 이혼은 네가 먼저 제안한 거야. 나중에 후회하고 나한테 매달리지 마."
말을 마친 부도현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거칠게 닫고 떠났다.
고유일은 차갑게 식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가슴 가득 차오른 실망감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손을 들어 배를 어루만지자 뱃속에 있는 생명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원래는 부도현에게 임신 소식을 알릴 생각이었는데, 이제 두 사람은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도현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고유일은 혼자서도 우리 아기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현재의 직업을 떠올린 고유일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당시 부도현과 그녀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들기 위해 부 여사님은 특별히 그녀를 부도현의 비서로 배치했다.
이제는 비서도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글로벌 그룹.
고유일이 회사에 출근하자 몇몇 동료들이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유일 언니,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부 회장님과 그 임서아 씨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한테도 자세히 좀 말해줘요."
"뉴스에 난리가 났어요. 우리 부 회장님이 국제적인 톱모델 임서아 씨를 위해 환영 파티를 열고, 지인들도 많이 초대했다던데. 부 회장님이 임서아 씨랑 공개 연애라도 시작하려는 건가?"
"환영 파티 끝나고 부 회장님과 임서아 씨가 밤도 같이 보냈다면서요. 어쩌면 임서아 씨가 글로벌 그룹 사모님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 고유일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는 일이에요."
동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유일 언니, 농담하지 마세요. 언니는 부 회장님 수행비서잖아요. 회사에서 부 회장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언니인데 어떻게 내부 소식을 모를 수 있어요?"
고유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모두가 그녀가 부도현의 비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녀가 부도현이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숨겨진 아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녀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담담하게 말했다. "저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헛소문 좀 그만 내요."
동료들이 계속해서 캐물으려 하자 고유일은 그들의 말을 가로채고 진지하게 말했다. "말씀드렸죠. 드릴 말씀 없습니다. 더 이상 묻지 마세요. 그리고 회사에 수다 떨러 오셨어요? 일하러 안 가십니까?"
고유일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동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얌전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네, 유일 언니. 알겠습니다."
고유일이 자리를 떠나자 동료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치, 폼 잡기는.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부 회장님 비서가 쟤 하나뿐인 것도 아닌데."
"맞아. 3년 전 갑자기 비서실에 낙하산으로 들어오더니, 얼굴 좀 반반하다고 다들 부 회장님하고 무슨 관계 있는 줄 알았잖아. 근데 3년 동안 부 회장님은 쟤 거들떠보지도 않고, 출장도 같이 안 가시더라. 수행비서라더니 그냥 병풍이지 뭐."
"쟤 좋은 날도 이제 끝이겠네. 임서아 씨가 안방 차지하면 쟤부터 자르라고 할걸? 어떤 여자가 자기 남자 옆에 저런 비서 두고 싶겠어."
"누가 아니래……"
몇몇 동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거렸고 사무실 전체에 그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유일은 그들의 수군거림을 못 들은 척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기계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친절한 동료들이 뒤에서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박할 힘이 없었다. 그녀조차도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되자 비서실에 남은 사람은 고유일 한 명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향운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유일아, 나 오늘 아침 뉴스 봤어. 부도현이랑 그 임서아 뭐야? 가짜지?"
친구의 의심 가득한 목소리에 고유일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운서야, 그 뉴스, 사실이야."
향운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
하루 종일 고민한 고유일은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도현과 나는 애초에 계약 결혼이었잖아. 그 사람이 나한테 아무 감정 없는 거 잘 알아. 그냥 할머니 부탁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거니까. 이제 그 사람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돌아왔으니, 나도 더 이상 질척거릴 필요 없지. 이제 그들한테 자리 비켜줄 때가 된 것 같아."
향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어떡하고? 어제 부도현한테 임신 소식 알리고 깜짝 놀라게 해줄 거라며?"
"그 사람한테 서프라이즈일까? 아니면 쇼크일까?" 고유일은 무의식적으로 평평한 배를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바꿨어. 이혼하고 아이는 나 혼자 키울 거야.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
"이혼? 너 정말 결심한 거야?" 향운서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도현한테 임신한 거 알리기 싫다면서, 글로벌 그룹에 계속 있으면 배 불러오는 거 금방 들킬 텐데."
"걱정 마. 조만간 사직서 내고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 다시 시작할 거니까."
마음속에 품은 꿈을 떠올린 고유일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정말? 유일아, 너 드디어 복귀 결심한 거야?" 향운서는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
"너무 잘됐다! 내가 말했잖아. 넌 천재 디자이너 성엽석이야. 패션계의 전설이라고! 그런 네가 부도현 옆에서 비서 노릇이나 하면서 재능 썩히고 있는 거 너무 아깝잖아!"
"성엽석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고유일은 잠시 멍해졌다.
그래, 부도현을 위해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그 이름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고유일."
그때, 뒤에서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유일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부도현이 그녀의 뒤에 서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