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시내 한 병원, 접수증을 손에 쥔 한세희가 산부인과 복도에서 줄을 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병원 로비에서 그녀는 형체만 보고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역삼각형 몸매에 어울리는 맞춤 정장은 남자와 완벽하게 매치되었다.

강지한은 조금 전 카페에서 포장한 코코넛 밀크를 곁에 선 여자에게 건넸다.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병원 창문에 반사되는 햇살을 맞아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을 애써 누른 한세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강지한의 곁에 당당하게 선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똑바로 떴다.

바로 이때, 강지한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그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마주친 두 눈 사이로 강지한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한세희는 애써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밀려오는 헛구역질에 그녀는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고 속을 모두 비워내고 나서야 숨을 고르게 쉴 수 있었다.

화장실로 달려올 때, 한세희는 강지한과 그의 약혼녀 뒤에 놓인 표지판에 적힌 글씨를 똑똑히 보았다. 두 사람이 나온 곳은 바로 산전 검사를 받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아마 결혼 전부터 계획할 아이를 위해 검사를 받으러 온 것이겠지.

강지한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병원에 방문했다는 사실과 카페에 들러 직접 코코넛 밀크를 포장한 것까지 생각하자 한세희는 또다시 마음이 쓸쓸해 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강지한은 모든 애정과 시간을 쏟아부을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녀를 대했던 방식과는 너무 비교가 되었다. 한세희와 강지한이 배드 파트너로 지냈던 지난 3년 동안, 강지한은 그녀가 무슨 음식을 즐겨 먹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 한세희는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심호흡을 하더니 티슈로 입 주위를 닦고 나서야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강지한이 세면대 옆에 기대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미간을 깊게 찌푸린 그의 손가락 사이에 불을 붙인 담배가 있었다. 강지한은 이 곳의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마, 그의 약혼녀도 화장실에 있는 걸까?

한세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연기했다.

하지만 병원 화장실의 세면대는 한 줄로 놓여 있었고 손을 씻으려면 반드시 강지한의 곁을 지나가야만 했다.

손을 씻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강지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신했어?"

짧은 그의 물음 한 마디에 한세희는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던 강지한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답해!"

강지한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고, 거리가 좁아질수록 한세희는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움켜쥘 것 같은 기세와 화난 눈빛.

만약 그녀가 임신한 것이 사실이라면, 강지한은 바로 그녀를 수술실로 끌고 가 낙태하는 장면까지 지켜볼 것이다.

강지한은 정부인 그녀가 자기 아이를 임신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가족끼리 약속한 결혼을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는 반드시 제거할 것이다.

그가 약혼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지한이 한 번 결정한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한세희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강지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배탈 때문에 약 받으러 왔어요."

"그래? 하지만 소화 내과는 여기 없는데?" 강지한은 그녀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했다.

한세희의 얼굴에는 쓸쓸한 미소만 번질 뿐이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임신이 대체 얼마나 싫은 걸까?

"이곳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적으니까요. 제가 하는 말을 믿고 싶지 않는 거라면, 대표님께서 저와 함께 산부인과 진찰을 받으면 되겠네요."

한세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강지한은 절대 약혼녀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한세희의 예상대로 강지한은 실소를 터뜨리더니 담배를 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훑을 때 뜨거운 담배가 그녀의 얼굴 바로 앞으로 다가왔고, 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얼굴에 흉이 질까 두려웠다.

"만약 지금 내 앞에서 한 말이 거짓말이라면, 그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착하게 굴어야지. 내일 출근해."

그리고는 거칠게 한세희의 턱을 놓아 주었다.

강지한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 희미한 향수 냄새가 한세희의 코를 찔렀다. 낯선 향수 냄새에 한세희는 아려오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세희는 강지한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강지한은 여자 향수 냄새를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세희는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결국 불가능한 건 없었다. 단지 그 규칙을 어길 수 있는 사람들만 가능한 것일 뿐.

멀어지는 강지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한세희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몇 발짝 떼지 못한 남자가 다시 자리에 멈춰 서더니 그녀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퇴사하겠습니다." 한세희는 이번엔 좀 더 차분하고 확고한 태도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강지한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고 입술에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현모양처가 될 생각이야?"

한세희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현모양처도 나쁘지 않네요. 맞선 상대가 오늘 저와 결혼까지 약속했어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어?" 강지한의 목소리는 압박적이었고 한세희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이나마 자신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강지한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라고 믿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 남자가 널 만족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말 한마디에 한세희의 얼굴은 화끈 거리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서의 강지한은 평소의 강지한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침대 위의 강지한은 한세희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말을 주저 없이 내뱉었으며 귀를 깨물고 허리를 꼬집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울먹이며 애원하는 목소리를 제일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을 대놓고 밝히다니, 한세희는 더욱 굴욕감이 느껴졌다.

"그 남자, 나도 잘 아는 사람이야. 너랑은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

한세희는 강지한이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의 말투는 회사에서 업무를 맡길 때와 다름없이 담담하고도 평온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저 묵묵히 그의 지시를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세희는 그녀의 자존심도 묵살하는 남자의 발에 짓밟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하는 자신이 싫었다.

용기를 낸 한세희는 그의 말투를 흉내 내며 비아냥거렸다. 심지어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강지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요. 누가 알아요? 의외로 속궁합이 잘 맞을지."

그리고 세면대에서 대충 손을 씻은 뒤, 강지한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멀어져 갔다.

병원 건물을 나서는 순간까지 한세희는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강지한이 너무 두려웠던 그녀는 산부인과 검사도 받지 못했다.

강지한의 비서가 된 순간부터 한세희는 단 한 번도 그의 말을 반박하거나 말대꾸한 적이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어떤 후과를 초래할 지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강지한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한다.

영원히 지날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다. 한세희는 욕실 거울 앞에서 출근할지 말지 한참을 망설였다. 2시간 후, 손에 사직서를 든 한세희가 강지한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가 집무책상 위에 공손하게 내려놓았다.

"대표님, 사인해 주세요." 한세희는 그가 있는 쪽으로 사직서를 내밀며 정중하게 말했다.

한세희가 그의 앞에 멈춰 설 때까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그가 사직서라는 말에 움찔거렸다.

그녀가 진짜 사직서를 제출할 줄 몰랐던 강지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세희를 노려봤다.

강지한이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자, 한세희는 사직서를 집무책상 한 켠에 놓아두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깊고 검은 눈동자에 한세희는 심장이 빨리 뛰며 몸이 움찔움찔해 나는 것을 느꼈다.

"결정했어?" 그의 목소리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네. 결정했습니다." 한세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강지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검지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이리 와."

입술을 꼭 깨문 한세희는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퇴사하고 싶지 않아?"

동시에 강지한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한세희는 경계 가득한 모습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익숙하고도 포근한 그의 향수가 그녀를 감쌌지만 숨 막히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한세희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강지한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지한은 평소에도 소리를 내어 웃지 않는 편이었다. 기껏해야 입 꼬리만 비스듬히 올리고 미소만 지을 뿐. 그러니 그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그의 언짢은 기분을 설명했고 그것은 곧 다가올 폭풍의 전야였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은 강지한이 눈 깜박할 사이에 그녀를 집무책상 위에 누르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수백 수천억 규모의 계약 서류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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