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나는 은둔형 재벌 3세, 강태준의 말상대가 되어주기 위해 고용된 화가였다.
나는 내가 구원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상처 입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은밀한 순간들을 몰래 녹화하고 있었다.
딥페이크 기술로 내 얼굴에 의붓여동생 한채리의 얼굴을 씌우기 위해서.
나는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의 집착을 위한 대역, 바디 더블이었을 뿐이다.
한채리가 나에게 폭행 누명을 씌웠을 때, 강태준은 그녀의 말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경호원들이 나를 구타하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조폭을 보내 내 오른손을 박살 내고, 화가로서의 내 인생을 끝장냈다.
결혼을 앞둔 한채리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그는 나를 구치소에 처넣었다.
“넌 그냥 장난감이었어.”
그는 차갑게 말했다.
“이제 질렸어.”
그는 내 몸과 경력, 그리고 심장을 파괴했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한 여자를 위해.
하지만 그 차가운 감방 안에서, 나를 내쫓았던 의붓아버지에게서 제안이 왔다.
내 어머니의 막대한 신탁 자금을 대가로, 장애를 가진 IT 재벌 후계자 유건우와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구치소를 걸어 나와, 그 도시를 떠나, 낯선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나를 부서뜨린 남자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기로 선택한 것이다.
제1화
그의 체온이 사라진 시트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강태준이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날카로운 선과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는 무심한 우아함으로, 절제된 동작으로 움직였다.
잠시 동안, 나는 내 피부에 닿았던 그의 뜨거운 체온, 그의 무게감, 내 목덜미를 스치던 까끌까끌한 수염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의 삭막한 펜트하우스에서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온기였다.
그는 창가에 멈춰 섰다.
서울의 야경이 그의 실루엣을 거칠게 그려냈다.
그는 풍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매번 그랬다.
마치 내 앞의 남자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듯, 아주 짧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단절이 일어났다.
나는 팔꿈치로 몸을 일으켰다.
비단 시트가 허리춤에서 흘러내렸다.
그 움직임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잿빛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그 안에는 온기라고는 없었다.
차가운 평가만이 존재할 뿐.
그가 다시 침대로 걸어왔다.
그의 손이 내 엉덩이에 닿았다.
애무가 아닌, 나를 고정시키는 닻과 같았다.
그는 익숙하고 지배적인 무게로 나를 매트리스에 다시 눕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내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우리 사이의 깊은 간극을 메우기 위해 무엇이든 느끼고 싶었다.
나는 그의 목을 감싸 안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표면적인 것보다 더 깊은 키스를 갈구하며.
그는 허락했다.
그의 입술은 열정 없이, 숙련된 기술로만 내 입술 위를 움직였다.
모든 것이 끝나자, 그는 즉시 몸을 뗐다.
그가 떠난 자리는 다시 차가워졌다.
그는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효율적이고 정확했다.
그의 눈 속의 냉정함과 어울리는 어둡고 값비싼 시계를 찼다.
행위 후의 여운도, 함께하는 침묵도 없었다.
그가 갑옷을 다시 입는 동안 조용한 옷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나는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옷을 기계적으로 챙겨 입었다.
내 행동은 너무나 여러 번 반복해 온 로봇 같았다.
강태준이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가죽 장정의 고전들 위를 스치다가,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패널에서 멈췄다.
부드러운 ‘딸깍’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카메라를 끄는 소리였다.
그는 숨겨진 렌즈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물었던 날이 기억났다.
요청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내 속은 수치심과 혼란으로 뒤틀렸다.
그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절박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산더미 같은 빚을 지고 있었고, 이것이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강 회장 사모님이 주선한 자리였다.
그는 이 유리 탑에 숨어 지내는 유령, 은둔자였다.
내 일은 간단했다.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것.
그의 말상대, 그의 뮤즈, 그가 다시 인간성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무엇이든 되어주는 것.
나는 화가였고, 그의 어머니는 나를 망가진 아들을 고치는 도구로 여겼다.
한동안은 내가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처 입고, 신비로웠다.
내가 필사적으로 풀고 싶은 퍼즐이었다.
나는 그의 초상을 그리고, 스케치하며, 그의 얼굴 윤곽과 눈 속의 그늘을 익혔다.
내가 구원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끌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침대로 쓰러져 들어갔다.
나의 희망과 그의 침묵 속 절박한 욕구가 충돌했다.
진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관계에는 두 가지 규칙이 따랐다.
첫째, 그의 과거에 대해 절대 묻지 말 것.
둘째, 그는 모든 것을 녹화한다.
나는 옷을 다 입고 그에게 다가갔다.
숨겨진 슬롯에서 작은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여기요.”
내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나는 그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카드를 흘끗 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책상 위에 둬.”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나와 함께 영상을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카드를 가져가 서재로 사라져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 발견의 기억은 내 마음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몇 주 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노크 없이 그의 서재에 커피를 들고 들어갔다.
그는 없었지만, 그의 노트북이 열려 있었다.
화면에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였다.
내 몸, 내 움직임, 그를 향해 몸을 아치형으로 휘는 내 등의 곡선.
하지만 얼굴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한채리였다.
내 의붓여동생.
그녀의 얼굴이 내 몸 위에 완벽하게 겹쳐져, 그의 이름을 신음하고 있었다.
그 영상은 수십 개 중 하나였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목록 전부가, 그가 다른 여자를 중심으로 구축한 환상 속에서 변질되고 뒤틀려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집착했다.
나는 그저 바디 더블, 멀리서 보면 그녀와 충분히 닮았기 때문에 편리한 대역이었을 뿐이다.
같은 검은 머리, 같은 가느다란 몸매.
그의 기술이 나머지를 처리하기에 충분히 가까웠다.
그가 속삭였던 모든 다정한 말들, 내가 돌파구라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들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한채리를 보고 있었다.
한때 그를 위해 미친 듯이 뛰었던 내 심장은, 가슴 속에서 죽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키워온 사랑은 재가 되어버렸다.
“서아야.”
강태준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가르고, 나를 차가운 펜트하우스로 다시 끌어냈다.
그는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물 한 잔 가져와.”
요청이 아니었다.
나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부엌으로 걸어갔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손가락은 감각이 없었다.
그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제네바로 출장 가.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그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며 통보했다.
“알겠어요.”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떨림이 있었다.
그가 돌아섰다.
그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너… 좀 달라 보이는데.”
“그냥 피곤해서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짓말했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성과’가 있기를 바랄게요.”
그는 잠시 더 내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에 혼란의 빛이 스쳤다.
그는 내 안의 변화를 보지 못했다.
애초에 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물쇠가 ‘철컥’하고 잠기며, 나를 침묵 속에 가뒀다.
나는 아직 내 손에 들려 있는 메모리 카드를 내려다봤다.
작고 공허한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내 임무는 끝났다.
강 회장 사모님은 아들을 세상으로 다시 데려오길 원했다.
나는 해냈다.
단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 뿐.
내 심장은 마침내, 완전히 부서졌다.
그리고 그 부서짐 속에서, 나는 한 조각의 자유를 찾았다.
회차 2
침대 협탁 위에서 전화기가 거칠게 울렸다.
조용한 아파트 안에서 유난히 시끄러운 소리였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끝났습니다.”
내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강 회장 사모님의 날카롭고 절제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놀랍네, 이서아. 그 애가 더 힘든 상대인 줄 알았는데.”
“세상과 다시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집중할 대상을 찾았거든요.”
혹은 사람을, 이라고 생각하며 목구멍으로 쓴물이 올라왔다.
“잘됐군.”
그녀는 단 한마디로 만족감을 드러냈다.
“내가 돈을 준 만큼의 일은 했어.”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 말이 독약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파산 직전의 내 화실을 구해줬고, 나를 벼랑 끝에서 끌어내 줬다.
이것이 그 대가였다.
“잔금은 내일 아침까지 네 계좌로 들어갈 거야. 100억.”
그 액수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내 위치를 각인시키려는 의도였다.
“그 후에는, 그 애 인생에서 사라져. 네 자리를 알아야지, 이서아. 넌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어. 잊지 마.”
“잊지 않겠습니다.”
내 목소리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차갑게 나갔다.
“착하네.”
전화가 끊겼다.
나는 전화기의 검은 화면을 응시했다.
그녀의 거만한 말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도구. 목적을 위한 수단.
나는 강씨 집안 사람들에게 그저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돈을 받으면 사라지겠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강태준이나 그의 어머니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면 유리창으로 다가가 반짝이는 도시의 전경을 내다봤다.
아름답고 외로운 풍경이었다.
이 유리와 강철의 새장은 내 집이었지만, 단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은 없었다.
곧,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문자였다.
`클럽 엘리시안. 10시. - K`
내 심장이 바보같이, 배신자처럼 쿵쾅거렸다.
강태준에게서 온 문자.
그는 문자를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만나자고 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의심이 스며들었다.
왜 지금? 일주일 동안 떠난다고 말한 후에?
나는 망설였다.
내 안의 한 부분, 죽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고 희망에 찬 부분이 가고 싶어 했다.
어쩌면 이게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마음을 바꿨을지도.
다른, 더 똑똑한 부분은 함정이라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숨는 것에 지쳤다.
비밀로 남는 것에 지쳤다.
나는 거울로 걸어갔다.
단순하고 우아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가 좋아했던, 내 입술을 ‘완벽한 상처’처럼 보이게 한다던 빨간 립스틱에 손을 뻗었다.
내 손이 멈췄다.
나는 그것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누드 톤을 선택했다.
작은 반항이었다.
그는 항상 내가 화장을 최소한으로 했을 때 가장 예쁘다고, 내 본연의 모습이 자신을 끌어당긴다고 말했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의 소프트웨어가 내 얼굴에 한채리의 얼굴을 덧씌우기 더 쉬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클럽 엘리시안은 베이스음과 반짝이는 조명으로 가득한 불협화음의 공간이었다.
공기는 값비싼 향수와 절박함으로 무거웠다.
VIP 라운지 입구에서 강태준의 사업 파트너 중 한 명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를 멈춰 세웠다.
“이서아 씨,”
그가 아는 체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훑어봤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이 아주 중요한 날이죠.”
그의 말투가 이상했다.
내 살갗을 소름 돋게 하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나는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곳은 음악 소리가 약간 줄어들고, 조명은 더 은밀했다.
그리고 거기에 강태준이 있었다.
푹신한 부스에 앉아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그가 한 말에 웃고 있는 내 의붓여동생, 한채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천사처럼 보이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눈부시게 빛났다.
내 검은색 드레스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고 포식자 같은 표정이었다.
“서아야, 언니!”
그녀의 목소리는 거짓된 다정함으로 뚝뚝 떨어졌다.
“와줘서 정말 기뻐.”
내 피가 차갑게 식었다.
“태준 씨,”
내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왜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진심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내가 부른 거 아닌데.”
한채리가 그의 팔을 토닥였다.
“에이, 태준 오빠도 참. 당연히 오빠가 불렀지. 내가 오빠 폰으로 보냈어. 우리 언니가 우리 같이 있는 거 보면 좋은 서프라이즈가 될 것 같아서.”
내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그녀의 눈에는 순수하고 꾸밈없는 악의가 가득했다.
“정말 사려 깊은 동생이네.”
테이블에 있던 누군가가 비웃었다.
“일하는 애까지 챙겨서 진짜를 보여주다니.”
“일하는 애 아니야.”
다른 사람이 약간 혀 꼬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몸풀기용이지. 안 그래, 강태준?”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강태준의 턱이 굳어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관심한 가면을 쓴 채 나와 한채리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이 그 방에서 가장 큰 대답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지 불과 몇 달 만에 아버지가 한채리와 그녀의 어머니를 집으로 데려온 날이 기억났다.
순진한 얼굴과 독기 어린 마음을 가진 한채리는 즉시 나를 적으로 낙인찍었다.
그녀는 피해자 연기의 전문가였다.
모든 상황을 비틀어 내가 악당이 되고 그녀가 상처 입은 당사자가 될 때까지.
새 아내에게 푹 빠진 약한 남자였던 아버지는 항상 그녀의 편을 들었다.
“서아야, 네가 좀 더 이해해야지.”
그는 말하곤 했다.
“채리는 예민하잖니.”
예민하다고.
그녀는 소시오패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더 세련되어졌다.
그녀의 조종은 더 부드러워졌고, 거짓말은 더 그럴듯해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세련된 겉모습 아래에 있는 잔인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나는 한채리에게 낮고 꾸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자매 아니야.”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여자 중 한 명이 웃었다.
“어머, 까칠하네. 자기 분수를 잊었나 봐.”
강태준의 시선은 한채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그녀를 보는 방식…
그것은 내가 그 딥페이크 영상을 볼 때 그의 얼굴에서 봤던 것과 같은 집착의 시선이었다.
고통스럽고 아이러니한 아픔이 나를 꿰뚫었다.
내 가족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빠른 재혼.
내 집에서 내가 서서히, 체계적으로 지워져 간 과정.
나는 더 이상 그 집의 딸이 아니었다.
원치 않는 손님이었다.
마침내 가방 하나를 싸서 떠나던 날,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나는 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외톨이, 그들의 새롭고 행복한 이야기 속의 각주였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뒤로했다고 생각했다.
고통이 무뎌져 희미한 흉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 강태준의 관심을 받으며, 내 인생을 의상처럼 걸치고 있는 한채리를 보니…
나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테이블에 있던 누군가가 한채리의 곧 있을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건우 씨네 집안이 대단하다던데. 유건우 그 사람이… 뭐, 좀 그렇긴 해도 천재라며.”
남자가 애매한 손짓을 했다.
한채리가 예쁘게 얼굴을 붉혔다.
“저희 아주 행복해요.”
나는 강태준의 손이 잔을 꽉 쥐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질투심으로 공기가 탁해졌다.
그가 나를 이용해 흉내 냈던 여자를 질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 고통에 대한 병적이고 뒤틀린 확인이었다.
“고등학교 때 너랑 강태준이랑 뭐 있지 않았어?”
여자 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한채리가 가식적인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머, 천만에. 태준 오빠랑 나는 항상 그냥 친구였어. 나한테는 친오빠 같은 사람이야.”
“그냥 친구.”
강태준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나는 보답받지 못한 갈망의 세계를 보았다.
내 심장, 이미 산산조각 났다고 생각했던 그 심장이 조금 더 부서졌다.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들과 같은 방에서 숨 쉴 수 없었다.
“나 갈게.”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나는 등을 곧게 펴고 고개를 든 채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
이것이 얼마나 아픈지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 홀에 도착했다.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벌써 가는 거야, 언니?”
한채리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그녀를 마주보며 돌아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
작고 거울로 된 공간에 우리 둘만 남았다.
“그 사람 사랑해?”
그녀가 가볍고 조롱하는 어조로 물었다.
회차 3
“만약 그렇다면?”
나는 느끼지도 못하는 비꼬는 투로 쏘아붙였다.
“축하라도 해 주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강태준이 그의 병적인 환상 속에서 내 얼굴 위에 덧씌웠던 바로 그 얼굴.
그것을 보자 속이 뒤집혔다.
한채리가 미소 지었다.
눈까지는 닿지 않는, 느리고 의도적인 입술의 움직임이었다.
“아, 서아야. 넌 여전히 너무 순진해.”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의 악의는 날카로웠다.
“강태준 같은 남자가 너 같은 애를 쳐다보기라도 할 것 같아? 너 같은 배경을 가진 애를?”
내 손가락이 주먹으로 말려들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고통은 분노의 바다에서 나를 붙잡는 무딘 닻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고르게 유지하려 애썼다.
“그 사람 원하면 가져. 그냥 진실을 말해.”
그렇게 말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것은 시험이었다.
그녀에게서 어떤 종류의 양심이라도 구걸하는 마지막, 절박한 호소였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욕설보다 더 모욕적인 연민의 표정을 지으며.
“넌 정말 이해를 못 하는구나. 자기 집에서 쫓겨난 네가. 넌 아무것도 없잖아. 난 모든 걸 가졌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나를 아껴주는 약혼자가 있어. 그리고 내 손가락 하나에 놀아나는 강태준도 있지.”
그녀는 최대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 고안된 단어들을 속삭였다.
“네가 길 잃은 강아지처럼 그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지 알아?”
각 단어는 정확하고 계산된 일격이었다.
내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들춰낸 기억들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생생한 상처였다.
아버지의 공허한 약속이 떠올랐다.
“서아야, 아빠는 언제나 네 아빠야.”
한채리가 나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며 울고불고 연극을 벌인 후, 아버지가 내 얼굴에 대고 내가 모든 가족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인들이 속삭이는 소리, 그들의 충성심이 집의 새 안주인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기억했다.
가방 하나만 들고 문을 나섰던 것, 어머니의 유령과 내가 한때 가졌던 삶을 뒤로하고 떠났던 것을 기억했다.
나는 그 고통을 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여기에, 신선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내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내가 떠났잖아.”
“그걸로는 부족해.”
한채리가 쉭쉭거렸다.
그녀의 다정한 가면이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네 것이 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내가 다 빼앗기 전까지는 절대 부족할 거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떠나려고 돌아섰다.
“어딜 가!”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높아졌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였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가 앞으로 달려들어 내 팔을 잡고 대리석 바닥으로 나를 다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짓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렸다.
붉은 자국이 즉시 그녀의 뺨에 피어났다.
그녀는 나를 보았다.
승리에 찬, 사악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복도 아래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빠르고, 무거운 발소리.
강태준.
내 피가 차갑게 식었다.
또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10년 전, 그녀는 이 똑같은 수법으로 나를 내 집에서 쫓아냈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본 아버지는 의심 없이 그녀의 말을 믿었다.
이번에는,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애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서비스 쟁반 위에 버려진 와인병을 보았다.
내 마음은 차갑고 절박한 분노로 하얗게 비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너 뭐 하는 거야?”
한채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은 처음으로 진짜 공포로 커져 있었다.
나는 병을 그녀 옆 바닥에 내리쳐 산산조각 냈다.
“이서아!”
강태준의 목소리는 분노의 포효였다.
그는 나에게가 아니라, 한채리에게 달려갔다.
그는 마치 내가 괴물인 양 그녀를 자기 뒤로 끌어당겨 몸으로 보호했다.
“다쳤어?”
그가 걱정으로 굳어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나는 익숙한 장면이 펼쳐지는 것을 지켜봤다.
내 심장은 가슴 속에서 얼음 덩어리가 되었다.
과거의 완벽하고 고통스러운 재현이었다.
“그녀에게 사과해.”
강태준이 위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싫어.”
그의 눈이 얼음으로 변했다.
“경호팀!”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명의 거구의 남자가 즉시 나타났다.
그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내 무릎 뒤를 찼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내 무릎이 산산조각 난 유리 위로 직접 떨어졌다.
타는 듯한 고통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가득 찼다.
내 검은 바지 천은 이미 더 짙은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강태준의 목소리에는 모든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쟤가 널 쳤어. 너도 쟤를 쳐.”
한채리는 망설였다.
그녀의 눈은 커져 있었다.
“태준 오빠, 아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녀는 자비로운 피해자 역할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강태준은 그녀를 무시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억지로 나를 때리게 했다.
그 타격은 서툴렀지만, 따가웠다.
한채리는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나, 겁먹은 아이처럼 그의 품에 숨었다.
나는 그가 그녀를 안고 있는 얼굴의 표정을 보았다.
그것은 깊은 다정함과 걱정의 표정이었다.
그가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나에게 보여준 적 없는 표정.
내 세상이 축을 중심으로 기울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한채리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과해.”
그가 돌처럼 굳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나는 그저 그를 쳐다봤다.
턱을 꽉 다물고, 눈은 흘리지 않은 눈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경호원들에게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의 첫 번째 따귀는 잔인했다.
내 머리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리고 또 한 대, 또 한 대.
귀가 울리고, 시야가 흐려졌다.
세상은 고통과 굴욕의 소용돌이였다.
하지만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혀를, 세게, 깨물었다.
그때, 머리 뒤에서 날카롭고 폭발적인 고통을 느꼈다.
누군가 병의 남은 조각으로 내 머리를 내리친 것이다.
어둠이 나를 덮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한채리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승리에 찬,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