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할머니가 암 판정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설지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동생을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2천만 원을 먼저 입금해 줄게. 일단 할머니 입원 수속부터 진행해. 수술 비용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 테니까."

전화를 끊은 그녀는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을 바로 동생의 계좌에 입금했다.

설지윤과 그녀의 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두 사람을 위해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른 집 아이들 부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 설지윤은 그녀와 남동생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할머니를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수술 비용을 모두 마련하는 건 절대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집을 팔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돈을 당장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돈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연락처에 저장된 친구들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봤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만 그녀한테 돈을 빌려주겠다고 대답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전화조차도 받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한 그녀는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는 광고를 클릭했다.

광고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신부값으로 1억 원을 제시한 남자는 회사에 다니고 있는 회사원이며, 사랑스러운 외모에 나이가 어린 여자와 결혼하길 바란다고 글을 올렸다.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바로 6개월 동안 그의 조부모를 돌보는 것이다.

남자가 제시한 1억에 시선이 고정된 설지윤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광고의 진실 여부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은 그녀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 제일 하단에 있는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계속 연결되지 않았고, 설지윤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돈을 다른 여자가 먼저 가져갈까 봐 애가 탄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계속하여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누군가 장난 광고를 인터넷에 올렸다고 생각하며 설지윤은 전화를 끊었다.

그 시각, 김택성은 자신의 손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끊은 것을 보고 급해서 지팡이를 들어 손자의 가슴을 찌르며 다시 전화를 걸라고 호통을 쳤다.

낯설지만 익숙한 번호가 화면에 반짝거렸고, 설지윤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빠르게 핸드폰을 귀에 대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방금 신호가 좋지 않았어요."

"네, 괜찮습니다."

"네. 소개부터 할게요."

"저의 이름은 김완입니다. 올해 28살이고, IT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연봉은 7천 넘는 정도고, 제 이름으로 된 집 하나와 차 한 대가 전부입니다. 담배는 안 하고 술은 가끔 필요할 때만 마십니다."

전화기 너머 한참을 망설인 김완이 계속하여 말했다. "할아버지가 아프셔 제가 직접 돌봐야 합니다. 결혼하고 6개월 동안은 할아버지 집에서 지낼 예정입니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분이 우선순 이긴 합니다. 물론, 그 분은 저의 모든 재산을 지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무 시간과 할아버지를 돌보는 시간이 겹치지 않는다면, 출근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제 조건은 이상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1억의 신부값은 무척이나 유혹적이었지만 자신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에 설지윤은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시간만 잘 맞추면 출근해도 된다고 했다. 그저 자신의 일과 집안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너무 유혹적이었던 탓일까.

설지윤이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바로 남자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신부값 1억 외에 다른 요구 사항이 있나요?"

남자의 물음에 설지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여자의 대답이 너무 빠르고 단호해 김완은 다시 물었다. "정말 없으십니까? 예를 들어 집문서에 이름을 함께 적어 공동재산..."

"필요 없습니다. 재산은 각자 관리하는 걸로 하죠."

김완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방이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설지윤은 신호가 다시 끊겼을까 의심했다. 그때,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러면 내일 아침 아홉 시,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시고 구청에서 만나요." 남자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설지윤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빨리 혼인신고를 한다고?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1억 원을 언제 입금하는지 묻지도 못했다.

그때, 그녀의 동생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어왔다. 의사는 수술 비용이 두 배가 될 수 있으니 돈을 최대한 많이 준비하라고 했다.

처음에 그녀는 동생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동생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수술 권유서와 진단서를 본 그녀는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할머니가 많이 아프실까 걱정되었던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다크서클이 발끝까지 내려온 그녀는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구청으로 향했다.

설지윤은 아홉 시 정각에 맞춰 구청 앞에 도착했다.

휴가가 금방 끝난 구청 앞에는 혼인 신고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설지윤은 바로 그 남자를 발견했다. 네이비 맞춤 정장을 입은 남자는 제일 위에 있는 단추만 풀었고, 손목에 걸친 시계와 구두도 깔끔해 보였다.

아침 햇살에 따스하게 비춘 남자의 앞머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었고, 길고 짙은 속눈썹에 시선을 아래로 한 채 그의 정서를 모두 감췄다.

설지윤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휴대폰에 저장된 남자의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 부드러워 보였던 남자는 실물이 더욱 잘생기고 매력이 넘쳤다. 그때,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나누고 구청 로비로 들어가 번호표를 받았다.

김완은 번호표를 손에 꼭 쥐고 설지윤의 옆자리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설지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김완 씨, 죄송하지만 부탁 한 가지 더 들여도 될까요?"

김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미리 받기로 했던 금액 외에 1억 원을 추가로 빌릴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김완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 그는 어제저녁 그녀에 관한 서류를 보던 중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간호학을 전공으로 배웠구나. 가정 환경도 소탈하고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겼어. 얼굴만 봐도 단순한 것 같은게⋯"

'단순하고 귀여워?' 김완의 눈에 그건 모두 여자의 연기라고 생각되었다.

"돈이 급하게 필요해서요." 설지윤은 서둘러 해명했다. "집이 팔리면 바로 돌려드릴게요. 만약,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자까지 쳐서 갚을 게요."

"어제 통화로는 왜 말하지 않았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완은 바로 구청 밖으로 나가려고 긴 다리를 뻗었다.

구청을 막 나서려 할 때, 그의 할아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혼인 신고는 끝났어?"

그런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온 설지윤은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진짜 급한 상황 때문에 돈을 빌리려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말했다.

전화기 너머 할아버지의 기대 가득한 목소리에 김완은 하는 수없이 몸을 돌렸다.

김택성은 현대 의학 기술로 영원히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고, 6개월 뒤에 세상을 떠난다고 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소원이 바로 김완이 결혼을 하고 예쁜 자식을 낳는 것이다.

전화를 끊은 그는 설지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첫째, 설지윤 씨가 원하는 금액은 적은 돈이 아닙니다. 하지만 급하시다고 하니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요. 둘째, 설지윤 씨한테 돈이 생기면 바로 갚아야 합니다. 셋째,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랍니다."

남자의 말에 설지윤은 세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약속할게요. 집이 팔리면 바로 갚을게요. 다시는 돈을 빌리겠다는 말도 하지 않겠어요. 저를 믿어 주세요."

김완은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구청 로비로 들어갔다.

곧 김완과 설지윤의 차례가 되었다. 자신들의 번호를 기다리는 동안, 설지윤은 계속하여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혼인신고가 끝나고, 김완은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설지윤에게 필요한 짐을 챙기고 내일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김완은 택시를 타고 구청을 떠났다.

신부값으로 1억 원을 받기로 했는데, 추가로 1억을 더 빌리니 김완의 쌀쌀맞은 태도도 이해했다.

설지윤에게 다른 선택이 없었다.

구청에서 택시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길가에서 내린 김완은 가까운 곳에 주차된 자신의 검은색 자동차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건 그는 집사에게 전화를 걸어 값비싼 가구들을 모두 중고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구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제일 값 싼 국산 차도 하나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끊은 그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다이아몬드 시계를 벗어 조수석에 놓았다.

룸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더이상 몸에 값비싼 물건이 없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지윤은 자신이 재벌 2세와 결혼한 사실도 모르고 부동산과 인터넷에 자신의 집을 판매하겠다는 글을 올리고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회사 로비에 들어선 그녀는 전소월이 안내 데스크 직원과 자기의 뒷담화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회차 3

안내 데스크 직원과 깔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전소월은 설지윤이 들어온 것도 보지 못했다.

"설지윤이 학교 다닐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학교 선생님을 유혹해 논문을 쓰게 했어요. 하하하"

"어머 어머, 정말이에요? 안 봐도 눈에 훤해요.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만 믿고 남자들한테 꼬리를 쳤겠죠." 질투에 눈이 먼 데스크 직원이 말했다.

"예쁘게 생겼다고요? 여우처럼 생겼잖아요. 남자를 유혹하는 일에는 아주 선수예요."전소월은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죠. 남자친구가 엄청 잘생겼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두 사람 같은 학교 친구 맞죠?"

"아니요, 민혁 씨는 지금 제 남자친구예요!" 전소월은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어머,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그 남자가 설지윤을 찼어요?" 데스크 직원은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남자친구한테 차여서 그렇게 좋아?" 갑자기 들려오는 설지윤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뭐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놀랬잖아!" 전소월은 설지윤을 쳐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전소월, 여기서 다른 사람과 내 뒷담화를 할 시간이 있으면 박민혁의 이력서 한 장이라도 더 돌리는 게 어때? 네 월급으로는 절대 박민혁을 만족시킬 수 없으니까."

전소월과 설지윤은 동창 사이였지만, 능력이 뛰어난 설지윤은 이미 회사 팀장을 맡고 있었고 전소월은 아직도 회사 말단 직원이었다. 두 사람이 받는 월급도 차이가 많았다.

그런 설지윤도 평일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에는 전단지 돌리거나 CF 모델 등의 아르바이트를 겸행했다. 백수인 박민혁은 평소에 게임을 즐기고, 명품을 잔뜩 사들였으며, 주말에는 친구들과 클럽에서 술을 왕창 마셨다.

하지만 그는 박민혁의 실체를 모두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박민혁을 어렵게 그녀에게서 뺏아 간 전소월은 그를 보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설지윤의 말을 들은 전소월은 그녀가 자신을 질투하는 줄로만 알고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하지 마. 김 씨 그룹에서 면접오라고 했으니까. 김 씨 그룹알지? 대기업이니까 들어 봤겠지? 연봉이 얼만 줄 알아? 1억 2천이 넘어."

전소월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부럽지? 부러워 죽겠지?"

"유치하긴." 설지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소월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온 설지윤은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경리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왜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거죠?" 설지윤은 비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전소월 씨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팀장님이 대신 처리해 달라고 했어요."

비서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설지윤은 서류를 바닥에 내던졌다. "공주님이야 뭐야!"

전소월은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설지윤한테 넘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설지윤은 그녀의 말에 속아 절친이라고 생각하며 업무를 여러번 대신 처리해줬다. 농부와 뱀이 따로 없었다.

하루 종일 서류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설지윤은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조차 없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컵라면을 뜯어 뜨거운 물을 붓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아직 자신이 암에 걸린 줄 모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설지윤은 그런 할머니한테 걱정하지 말고 의사 말만 잘 듣고 수술만 무사히 끝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달랬다.

수술 비용도 모두 마련했으니 밥도 잘 먹어야 한다고 당부하는 그녀의 코끝이 시큰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설지윤이 회사 업무가 바쁘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통화가 끝날 때쯤, 그녀는 할머니에게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통화를 마쳤다.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열이 오른 설지윤은 회사에 병가를 내고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점심이 되어서야 겨우 몸이 괜찮아진 그녀는 간단한 짐을 챙기고 김 씨 가문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낯선 남자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쳐 가까스로 진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이 되고, 그녀는 트렁크 하나를 챙기고 김완이 보낸 주소로 향했다.

금빛 거리 88호. 금빛 거리는 오래된 주민 구역이다. 좁은 골목 사이에 자전거들이 즐비했고, 쓰레기와 생활용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가파른 골목 길에서 설지윤은 힘겹게 트렁크를 끌고 주위 시민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다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길을 잃고 말았다.

안으로 가면 갈수록 고급 주택이 나왔고, 길은 점점 넓어졌으며 고급 외제차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88호 주택은 어디에 있을까?

길을 알려주는 사람들마다 88호 주택을 찾으려면 이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어도 그녀는 88호 주택을 찾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김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핸드폰 전원까지 다 나간 설지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낯선 길에서 불안감에 몸이 떨었지만 어쩔 바를 몰라 그저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김완은 오늘 저녁 안에, 그녀에게 자신의 집으로 이사를 오라고 했다. 직접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는 건 그의 잘못이었다.

결국 화가 치밀에 오른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계단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녀와 몇 걸음 떨어진 곳을 비췄다.

설지윤은 환한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차에서 내리는 김완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바닥에 쓰러지면 큰 통증이 느껴질 거라 예상했지만 김완이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어 창피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설지윤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거예요?"

"88호 집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설지윤 씨가 저한테 전화 했었어요?" 그는 회사 임원들과 회의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하는 수없이 휴대폰 전원을 꺼두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음에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설지윤은 화가 치밀었다.

"일단 집으로 가요." 설명하기 귀찮았던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그녀의 반대편에 있는 집으로 걸어갔다.

깜짝 놀란 그녀가 대문 옆에 걸려 있는 숫자를 빤히 쳐다봤다. 진짜 88호 저택이었다.

김완이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50대 여성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아줌마, 할아버지는 주무시나요?"

"아니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먼저 거실로 들어간 김완은 뒤에서 낑낑거리며 트렁크를 끄는 설지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높은 계단 때문에 트렁크를 품에 안은 설지윤은 조심스럽게 낑낑대며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그때, 큰 손이 다가와 그녀 손에 쥔 트렁크를 건네 받았다.

김완 손에 있는 트렁크를 보고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녀와 함께 2년 6개월을 지낸 박민혁이 떠올랐다.

사귀는 동안 이런 도와주는 행동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이 2개인 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박민혁은 짐을 운반하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모두 설지윤 혼자의 몫이었다.

혼자서 힘들게 이사를 하고 청소를 하는 동안, 박민혁은 게임을 하며 바닥이 더럽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빨리 짜장면을 시키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왜 안 들어와요?"

김완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설지윤은 겨우 추억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김완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갔다.

마당은 크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었고, 갖가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앗!" 마당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다가 미처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다.

그녀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김완이 눈살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봤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설지윤은 어색한 웃음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바닥에 뒹구는 돌멩이를 발견한 그는 발로 치우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크지만 섬세한 손끝에 자리 잡은 굳은살은 그가 오랫동안 헬스를 해왔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그저 의혹스러운 눈길로 그의 손을 빤히 내려다 보기만 했다.

김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먼저 설지윤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설지윤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피가 솟구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김완은 트렁크를 유연순 아줌마에게 건네고 설지윤의 손을 잡은 채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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