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육태우는 배은정의 말을 듣지 못한 척했거나, 아니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배은정이 얼마나 큰 용기를 내어 그 말을 했는지 몰랐다. 배은정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러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듯했다.
경찰서에 도착한 후, 육태우는 자신의 차로 갈아탔고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만이 흘렀다.
집에 도착하자 육태우는 그녀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배은정은 머리가 어지러워 움직이기도 귀찮아 그의 품에 몸을 맡긴 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방으로 돌아갈 시간도 없이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배은정의 몸에 폭풍처럼 거친 키스를 쏟아 부었다.
그녀의 원피스가 찢어졌고 육태우는 아무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금 전 달콤한 꿈속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금, 육태우의 온기는 배은정의 공허한 몸을 달래주었지만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육태우는 그녀를 소파에서 침대로, 그리고 욕실까지 옮겨 다니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배은정이 너무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를 짐승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육태우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차갑게 경고했다. "배은정, 앞으로 다시는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마."
그때 배은정은 너무 피곤하고 지쳐 육태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육태우는 만족한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육태우가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주위가 조용해지자 배은정은 순간적으로 졸음이 밀려왔다.
그때,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육태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3시에 날아온 메시지라니, 배은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는 욕실 방향을 흘깃 쳐다본 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육태우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금 해제할 필요도 없이 메시지가 화면 중앙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태우 씨, 오늘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 내일 산부인과 검진 날인데, 같이 가줄 수 있어?]
발신자는 도민지였다.
산부인과 검진, 도민지. 이 두 단어가 따로 나타나든 함께 나타나든 배은정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나 다름없었다.
배은정이 육태우를 미친 듯이 쫓아다니던 해, 육태우에게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소꿉친구가 있다고 여러 사람이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도민지였다.
그에게 잊지 못할 첫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배은정은 더 이상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1년 동안 한 남자를 쫓아다녔는데도 잡지 못했다면 그건 그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배은정이 막상 포기하려던 찰나, 육태우가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
그날 배은정은 다이빙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처음부터 배은정에게 외모로 밀린다는 조롱을 받았던 터라, 마침 기회를 틈타 배은정을 괴롭히려 한 것이다.
기온이 영하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배은정은 몇 번이나 다이빙을 해야 했다. 결국 온몸이 얼어붙어 물 밖으로 나올 힘조차 없었다. 자신이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을 때, 커다란 손이 그녀를 단단히 품에 끌어안았다.
그 사람이 바로 육태우였다.
나중에 진혁도는 그녀에게 그날의 육태우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려주었다. 차갑게 굳은 얼굴은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 같았고, 촬영장 사람들을 가리키며 차갑게 경고했다.
"배은정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고의 살인죄로 여러분 모두를 고소할 겁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날부터 배은정은 육태우의 첫사랑이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이미 육태우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었고, 그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으니 자신이 육태우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것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은정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육태우가 먼저 그녀에게 사귀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1년 동안 사귄 후, 육태우는 집안의 강요로 배은정을 집으로 데려갔다.
육태우의 부모님은 배은정이 배우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를 집안에 들이지도 않았다.
육씨 가문은 정계의 오래된 명문 가문으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자랑해 왔다. 그러니 당연히 배은정처럼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는 여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반면, 육태우는 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왔고, 매사에 규칙을 따르고 자신을 억제하며 예의를 지켰다.
그래서 배은정은 이미 그와 헤어질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육태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구청으로 가 혼인신고를 해버렸다.
나중에 배은정은 육태우와 같은 지위의 사람이 결혼을 하려면 층층이 보고를 하고, 상사의 동의를 받아야만 혼인신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배은정을 위해 그토록 파격적인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배은정은 한동안 육태우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서툴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배은정은 3년 내내 줄곧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쳐왔다.
하지만 지금 도민지의 메시지를 본 그녀는 마치 정수리를 둔기로 강타당한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배은정은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신혼 방을 바라보았다.
3년이라는 시간은 그녀의 물건이 방 구석구석을 조금씩 차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육태우의 마음마저도 자신이 점차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배은정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자 배은정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육태우가 침대에 오르는 순간,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그는 항상 찬물로 샤워를 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육태우는 이불 속에서 따스하게 웅크리고 있던 배은정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추위에 몸을 떨며 잠든 척할 수 없게 된 배은정은 마침내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육태우! 이 나쁜 놈!"
하지만 육태우는 그녀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아랫배를 살짝 밀착시키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 달 동안 나를 무시한 작은 벌이야. 앞으로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훨씬 더 나쁜 놈이 될 수 있어."
예전 같았으면 배은정은 육태우의 이런 행동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몸에 이미 중독돼 버린 그녀는 그런 달콤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온 메시지를 떠올리자, 그의 몸이 다른 여자의 몸 위에서 뒹굴었다는 생각에 역겨움이 치밀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했지만, 그녀를 안은 팔은 여전히 힘이 들어갔다.
배은정은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가 안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눈을 뜨고 있다가 날이 밝아올 때쯤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배은정이 힘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 침대 머리맡에 놓인 피임약을 발견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그 작은 알약들은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이 시간, 육태우는 아마 병원에서 다른 여자의 산부인과 검진에 동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육태우와 그 첫사랑 사이에 이미 아이가 생긴 이상, 굳이 내가 임신할 필요는 없겠지.'
회차 3
배은정이 피임약을 먹으면 몸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태우는 평소에 항상 콘돔을 사용했다. 하지만 어젯밤에는 너무 급한 나머지 피임약을 준비해 둔 것이다.
배은정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피임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순간, 육태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행동을 본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쓰레기통에서 피임약을 꺼내더니 포장을 뜯고 한 알을 꺼내 배은정에게 건네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먹어."
배은정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피임약을 받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먹기 싫어. 육태우, 내가 당신 아이를 낳는 게 그렇게 두려워?"
그녀의 말에 육태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피임약을 쥔 손에 힘을 주더니 물었다. "넌 아이를 갖고 싶어?"
배은정은 그의 반응을 모두 지켜보며 비아냥 섞인 말투로 되물었다. "왜? 당신은 아이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육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은정아, 넌 아직 어려. 지금 임신하면 너의 모든 스케줄을 중단해야 해. 이미 계약한 광고는 어쩌려고? 우리 둘 다 바빠서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
배은정은 더욱 날 선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육태우, 그런 핑계는 이제 그만둬. 지금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만약 내가 모든 스케줄을 중단하고 당신 아이를 낳겠다고 하면, 당신은 기꺼이 받아들일 거야?"
육태우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배은정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배은정의 손을 잡고 피임약을 손에 쥐여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은정아, 아직 때가 아니야. 나한테 시간을 좀 줘."
그 말에 배은정은 가슴이 답답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육태우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말했다. "필요 없어. 당신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나도 낳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피임약을 입에 넣고 억지로 삼켰다.
너무나도 힘든 나머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육태우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배은정은 그의 손길을 차갑게 피했다.
그때, 육태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허공에 멈춘 손을 잠시 내려놓더니 부대에서 걸려온 전화일까 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육태우 선생님 맞으시죠? 선생님의 아내께서 병원 산부인과에서 쓰러지셨습니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주세요."
육태우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고 나서야 도민지가 걸려온 전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갈 테니까, 민지를 잘 좀 부탁드릴게요…"
문이 닫히고 그의 목소리가 문밖으로 사라졌지만, 배은정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내… 산부인과…'
이 모든 일은 그녀와 육태우 사이에 일어나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와 다른 여자를 연결해 주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이미 아이까지 생겼는데, 난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순간 배은정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했다. 아침을 먹지 않은 그녀는 방금 삼킨 피임약만 토해냈다.
진혁도가 배은정을 데리러 왔을 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육태우 대장이 너를 때렸어?"
배은정은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설명할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손에 쥔 캐리어를 진혁도에게 건네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남은 짐은 나중에 시간 날 때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옮겨줘."
진혁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캐리어를 끌고 배은정의 뒤를 따랐다.
"너 이제 완전히 나오려는 거야? 어젯밤에 집에 돌아와서 화해하지 못했어? 왜 이 지경까지 된 거야?"
배은정은 오늘 중요한 광고 촬영이 있어 차에 타자마자 두 눈에 따뜻한 찜질 팩을 얹었다.
배은정이 육태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는 진혁도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육태우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회사에서 강제로 헤어지라고 하자 배은정은 계약 해지서와 위약금으로 백지수표를 사장 책상에 내던졌다.
"진혁도, 나 육태우와 이혼할 거야.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혼 합의서만 준비해 줘. 빈손으로 떠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