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이혼하자."
단 한 마디 말로 윤서아는 재벌가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되었다. 허정우를 위해 3년이란 시간을 악착같이 견뎌 왔건만...결국 돌아온 건 가슴을 후벼 파는 한 마디 말이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정확히 3년이 되는 날이다. 기쁜 마음으로 허정우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무실로 찾아온 윤서아는 테이블 위에 값비싼 목걸이가 놓여 있는 걸 발견하고는 당연히 허정우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허정우는 목걸이가 담긴 박스의 뚜껑을 닫으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소연이가 돌아왔어. 이건 소연이한테 줄 선물이야."
그의 말에는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렇구나...' 윤서아는 고개를 숙이며 두꺼운 까만 뿔테 안경 너머로 씁쓸한 표정을 숨겼다.
허정우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첫사랑, 이소연이 돌아온 것이다. 3년이 지났지만 윤서아는 여전히 허정우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그의 몸조차 얻지 못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윤서아의 모습에 허정우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보상은 해줄 테니까 최대한 빨리 이혼하자. 넌 내 와이프가 될 자격이 없어!"
사실 윤서아는 몸매든 외모든 내조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여자였다. 하지만 성격이 과묵했고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그런 애매한 여자였다.
가정주부로서는 딱 어울리는 여자일지는 모르나 자신의 여자로 삼기엔 성에 차지 않았다.
윤서아가 여전히 침묵하자, 허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3일 줄게. 그 이상은 못 기다려..."
"기다릴 필요 없어. 지금 사인할 테니까." 윤서아는 망설임 없이 펜을 들어 이혼 서류에 사인을 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구청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곧바로 이혼 절차를 마쳤다.
윤서아는 <이혼증명서> 라는 다섯 글자가 유독 눈에 거슬렸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또 속이 후련했다.
이제 더는 결혼에 얽매여 허정우가 언제 자신을 받아 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고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를 괴롭힐 일도 없었다.
한번, 또 한번 수 없이 상처를 받느니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그녀의 3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그때, 허정우의 휴대폰이 울렸고 그 소리가 윤서아의 생각을 끊었다.
전화를 받은 허정우는 순간 표정이 초조해졌다. "뭐? 소연이가 입원했다고?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
허정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윤서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차를 몰고 떠났다.
윤서아는 이제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이소연과 관련된 일이라면, 허정우는 언제나 모든 일을 제치고 제일 먼저 달려갔으니까.
허정우가 떠난 후, 검붉은 스포츠 카가 윤서아의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윤서아의 절친 정예진이었고, 시크한 블랙룩에 선글라스를 낀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윤서아를 맞이했다. "야, 솔로가 된걸 축하해!"
정예진은 차 키를 윤서아에게 던져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한 번 제대로 달려볼까?"
"타." 차 키를 받은 윤서아는 가볍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윤서아는 쓸데 없는 생각을 접고, 주저 없이 악셀을 밟았다.
검붉은 스포츠카는 막힘 없이 7번 도로 위를 질주해 나갔다.
"이거 클럽 한번 가야 하는 거 아냐? . 네가 미리 말리지만 않았어도, 아까 그 새끼 앞에서 바로 샴페인 터뜨리는 건데!" 정예진이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댔다
"네가 정해. 근데 지금은, 일단 먼저 샵에 좀 들러야겠어." 윤서아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 하지 않았다.
그때, 정예진이 갑자기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은퇴가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널 찾아 다녔는지 알아? 너 언제 의학계에 복귀할 생각이야?"
"아직은 그럴 생각 없어." 윤서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참고로, 네 전 남편도 널 찾고 있어." 정예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소중한 첫사랑을 위해서라지? 웃기지도 않아. 아마 그 자식은 죽어도 KING이 너일 줄은 몰랐을 거야."
윤서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한편, 병원으로 질주하던 허정우는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KING의 행방은 아직도 못 찾았어?"
KING은 세계에서 최고라고 평가 받는 의사였다. 그러나 지난 3 년 전부터 왠지 모르게 행방이 묘연해졌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KING의 얼굴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그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대표님, 모든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여전히 KING에 관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 찾아!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서라도 꼭 찾아내!"
"알겠습니다!"
허정우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병원으로 뛰어 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KING을 찾아야 해. 소연이가 위급해, 시간이 없어!'
회차 2
'비밀의 정원'이라는 술집에 도착했을 때, 윤서아는 평소에 쓰고 다니던 두꺼운 안경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녀의 맑고 생기 넘치는 눈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긴 생머리는 매직 펌으로 스타일링 되었고 붉은 립스틱을 칠한 그녀는 한층 매혹적인 느낌을 풍겼다.
손끝부터 움직임 하나까지 매력적인 그녀는 가정주부로 살 때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참, 다음 주에 사격 대회 있는데, 참가할래?" 정예진이 물었다.
"아니. 하도 오래 쉬었더니 감을 잃었어." 윤서아는 단 칼에 거절했다.
"감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스트레스 풀러 간다고 생각해." 정예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허정우 그 자식을 과녁으로 생각하고 마음껏 쏴버려!"
윤서아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은데?"
"그렇지? 그리고 말인데, 4년 전에 널 이길 뻔한 그 S도 이번 대회에 나온대. 네가 대회에서 빠지고 나서 걔가 줄곧 우승을 휩쓸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 네가 출전하면 재미있어 지는 거지."
정예진은 점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엔 우승상품도 장난이 아냐. 특별 제작된 부가티 한정판,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이래!" 그러더니 휴대폰을 윤서아의 눈 앞으로 들이밀며 대회에 관한 정보를 보여줬다.
윤서아는 화면 속의 내용을 대충 훑어봤고, 여느 대회와는 달리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상품도 상품이지만, 그보다 참가자 전원이 가면을 쓰고 '코드네임' 으로만 참가해야 하고 우승자에겐 패배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만약 네가 나가서 우승하면, 꼭 그 S의 가면을 벗겨봐. 난 너랑 막상막하였던 그 놈이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너무 궁금해." 정예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아."
윤서아는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근데, 놀려면 제대로 놀아야지."
"어떻게 하려고?" 정예진의 눈빛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윤서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식 하나만 흘려 줘.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는 사람은 KING한테서 한 번 치료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KING이 정한 조건에 부합되기만 하면, 언제 그 기회를 쓸지는 우승자의 마음이라고."
정예진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헐! 이 소식을 터뜨리면 이번 대회는 완전 난리 나겠는데? 사람들이 넘쳐날 것 같아! 와, 미쳤어, 너무 기대 돼!"
"나 화장실 좀." 윤서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도 못해, 그녀는 몇몇 남자들에게 앞길을 막혔다.
"어이, 우리랑 한잔 하자."
그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윤서아를 훑어봤고, 그 눈빛은 너무도 더러웠다.
윤서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꺼져."
"화끈한데? 난 화끈한 여자가 좋아. 그런 여자를 길들이는 게 재미있거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그녀의 말에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내밀었다.
인내심이 바닥 난 윤서아는 그대로 손을 들어 그 남자의 손을 내리쳤다.
"악!" 순간,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이 미친 년이 감히..." 그들은 욕설도 채 지껄이기 전에 윤서아의 발차기를 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불과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바닥을 기며 신음을 토했다.
같은 시각, 2층 카운터.
"와우! 저 여자 멋있는데? 생긴 것도 예쁘고, 딱 내 스타일이야."
허정우는 친구의 말에 시선을 돌려 그 여자를 힐끗 바라봤다. 그러나 보면 볼 수록 어딘가 낯이 익었고 바로 오늘 오전까지 그의 부인이었던 윤서아라는 걸 알아 차렸다.
허정우는 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소연이 클럽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고 해서 따라왔고 근데 여기서 이렇게 우연히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어? 저거... 서아 언니 아니야?" 이소연이 놀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뭐? 저게 그 윤서아라고? 저렇게 섹시하고 매력이 넘치는 여자가 그 따분한 여자라고?"
그들은 다시 한번 찬찬히 그 여자를 바라봤고, 그제서야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 매력적인 여자가 정말로 허정우의 전처 윤서아임을 확인했다.
허정우의 여동생 허수연은 하찮다는 눈빛으로 비아냥거렸다. "저렇게 차려 입고 나오다니, 미친 거 아냐? 우리 오빠한테 버림 받자마자 저런 꼴로 클럽을 드나들면서 남자들을 꼬시는 걸 보니, 몸 파는 것 외엔 살 길이 없었나 봐?"
그러자 주변의 남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걸레들은 원래 남자 없으면 못 살잖아. 이혼도 했겠다, 이제 본성이 들어 나는 거지."
"정우가 이혼하길 잘했어. 저런 년과 같이 살면 큰일 나."
"저 딴 년들이 그렇지 뭐. 남자 없이 못 살잖아. 그러니 몸이나 팔러 다니는 거지."
그들의 비아냥에 하정우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고
그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쳐!"
그러고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그들은 한 바퀴 훑어 보고는 윤서아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차 3
"오빠!"
"정우 오빠!"
허수연과 이소연은 허정우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는 둘은 같이 허정우의 앞길을 막아 섰다.
"오빠, 설마 지금 윤서아 그년한테 가는 건 아니지?" 허수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허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수연! 누가 너한테 그런 험한 말들을 가르쳤어? 우리 허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마."
"정우 오빠, 수연이한테 화내지 마요. 수연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그리고 서아 언니한테 마음이 있으면 미리 나한테 말해 줘요. 난 절대로 오빠의 발목을 잡지 않을 테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줄 수 있어요."
이소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잔뜩 상처 받은 표정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소연아!" 허정우는 황급히 뒤쫓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 거 아니야. 나랑 윤서아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정우 오빠, 솔직히 말해줘요. 오빠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서아 언니가 있는 거죠? 난... 난 괜찮아요. 오빠의 대답이 뭐든,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소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허정우는 이소연의 여린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윤서아가 어떻게 살던, 무슨 짓을 하던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오빠, 그런데... 서아 언니가 꼭 그런 옷차림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었지 않았을까요? 혹시.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소연은 더없이 상냥하고 사려 깊은 모습이었다.
허정우는 그런 그녀가 더없이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소연아, 넌 정말 너무 착해서 문제야. 하지만 걔가 어떻게 살든 이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내가 준 보상금만 해도 윤서아는 남은 인생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스스로 몸을 팔면서 허영심을 채우려는 행위는 온전히 윤서아 본인의 선택인 거야."
"하지만..." 이소연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하다가 갑자기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소연아!" 허정우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나... 난 괜찮아요. 그냥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가 아플 뿐이에요. 우리 얼른 룸으로 돌아가요." 이소연은 힘없이 그의 품에 기대며 나직이 말했다.
"병원에서 며칠 더 쉬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허정우는 체념한 듯,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허수연을 바라봤다. "수연아, 네가 먼저 소연이랑 룸에 들어가 있어. 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오빠, 설마 그 틈에 몰래 윤서아 보러 가려는 건 아니지?" 허수연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허정우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소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수연아, 서아 언니는 지금 많이 흔들리고 있어. 그러니 정우 오빠가 서아 언니를 좀 설득해서 바로 잡아주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는데, 이런 일이 밖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허씨 가문의 체면에도 문제가 되잖아."
"언니는 진짜 너무 착해요. 이런 상황에서도 그년..." 허수연은 순간 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허정우의 눈치를 살폈다.
"오빠, 소연 언니는 아직도 몸이 아픈 거 알지? 그러니까 꼭 빨리 와야 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책임 못 지니까!"
그렇게 경고를 한 뒤, 허수연은 이소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 가요."
한편, 화장실에서 나온 윤서아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머리를 살짝 넘겼다.
그러자 그 장면을 본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윤서아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녀한테 꽂힌 수많은 시선들에게 같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욕망이다. 허정우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짜증이 밀려왔고, 문득 윤서아를 뺏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서아!" 허정우는 불쾌한 목소리로 윤서아를 불렀다.
윤서아는 고개를 돌려 허정우를 바라봤고, 냉소를 지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 왜 그러세요, 전남편? 무슨 일이시죠?"
그 말투는 너무 담담해서, 정말 그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냉랭한 반응에 허정우는 짜증이 밀려왔고 왠지 모를 분노가 가슴을 뜨겁게 불 태웠다.
그는 성큼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목을 확 붙잡았다. "따라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