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다음 날.
나지아는 별장의 유선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깼고 정신이 몽롱한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지아야,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수화기 너머로 친구 소정은의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지아는 어젯밤 주민우에게 반죽음이 되도록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얼버무렸다.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 근데 무슨 일이야?"
"너 이혼하면 축하 파티하기로 약속했잖아. 나 지금 레스토랑에서 한참을 기다렸어. 네 휴대폰은 받지도 않고…"
소정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지아는 자지러지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이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와 주민우가 이혼하기로 약속한 시간에서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민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개 자식, 대체 언제 나간 거야.'
한편, 달빛 레스토랑.
소정은은 나지아의 손에 감긴 붕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가 다친 경위와 상처 치료 과정을 듣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주민우 그 개자식은 남편 자격도 없어! 아내가 다쳐서 서명이 필요한데 전화도 안 받고 상간녀랑 놀아나? 그러고는 너를 불러다 상간녀 앞에서 모욕까지 당하게 하다니!"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옆 테이블의 시선이 쏠리자, 나지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애원했다. "소정아,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못 낮춰! 너한테 화 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너 정말 제정신이야?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랑 당장 이혼 안 하고 뭐해? 집에서 국이나 끓여 먹고 살 작정이야?" 소정은이 속이 터질 듯이 말했다.
나지아는 서둘러 해명했다. "이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오전에 하려다가 못한 거야."
그녀가 주민우에게 전화했지만 비서가 받더니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결국 늦잠 자서 이혼 못 한 거 아니야?" 소정은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결혼 3년 내내 한 번도 함께하지 않다가, 이혼 직전에 잠자리를 가졌다고? 이게 뭐야, 이혼 전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운 건가?"
나지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이혼 전에 한 번쯤 즐겨보는 것도 안 돼?"
"풉!"
갑자기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나지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문득 한 쌍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주민우였다.
주민우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고, 그의 곁에는 비슷하게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방금 웃음소리를 낸 사람은 바로 그였다.
나지아는 그를 알아봤다. 주민우의 소꿉친구인 고택호였다.
고택호 외에 주민우의 곁에는 문여린도 함께 있었다. 소정은의 말을 들은 것인지, 나지아와 주민우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미소 짓던 문여린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문여린은 어젯밤 일부러 나지아에게 영상을 보내고 사람을 시켜 전화까지 하게 했다. 나지아가 자신을 그렇게 쏘아붙였으니 주민우는 그녀를 더 혐오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혐오하면서 왜 관계를 가진 거지?'
주민우가 얼마나 강한 자제력을 가진 사람인지, 문여린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지아에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이건 주민우가 나지아에게 다른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는 뜻일까?
문여린이 3년간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나지아는 3년간 그의 곁을 지켰다. 그 사이 주민우가 그녀에게 정이 들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문여린은 마음이 쓰라렸고, 나지아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고택호는 문여린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주민우를 놀리려는 심산으로 나지아에게 일부러 물었다.
"주 사모님, 어젯밤 소감이 어떠셨습니까?"
나지아는 이런 시시한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헛소리하면 죽여버린다'는 듯한 주민우의 경고 어린 눈빛을 보고는 악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뭐, 그냥 그렇던데요."
대단히 마지못해 내놓은 평가, 어떤 남자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평가였다.
하물며 주민우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나지아를 집어삼킬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나지아는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어차피 이제 그에게 탕을 끓여 바칠 일도 없는데, 더는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꼿꼿이 목을 세우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주민우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질 뻔했다. 고모가 떠난 뒤, 이 여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예전에 자신 앞에서 보여주던 온순하고 다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롭게 말대꾸할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급하게 갈아탈 준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든 게 이해됐다. 자신에게서 더는 돈을 뜯어낼 수 없으니, 이제 꾸민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3시." 시간만 던져준 주민우는 나지아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듯, 거친 발걸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민우 씨." 문여린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뒤쫓았다. 복도 모퉁이를 돌기 직전, 그녀가 나지아를 향해 던진 마지막 시선에는 노골적인 적의가 스며있었다.
"감히 민우의 잠자리 실력을 의심하다니, 진정한 용사시네요." 고택호는 감탄 한마디를 남기고는 그들을 뒤따랐다.
나지아는 고택호의 감탄을 무시한 뒤에야 비로소 주민우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오후 3시, 법원에서 이혼.
'아주 좋아. 이제야 밥맛이 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