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조용한 응급실에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차가운 기계음이 유난히도 귀에 거슬렸다.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요?" 간호사가 참다못해 물었다.

나지아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간호사를 향해 미안한 듯 웃어 보였지만 그 미소에는 약간의 억지가 섞여 있었다. "제가 직접 서명해도 될까요?"

간호사는 시간을 낭비한다고 투덜거리며 마취 동의서를 그녀에게 건넸다.

일곱 통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주민우는 끝내 받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 낭비였다. 만약 손바닥 창상 수술이 아닌 생사가 걸린 대수술이었다면, 가족이 서명하러 오길 기다리는 시간이면 시신마저 식어버렸을 것이다.

국소 마취 후, 의사는 핀셋으로 손바닥에 박힌 작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제거하며 그녀가 어쩌다 이렇게 다쳤는지 궁금해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불면증으로 잠이 오지 않아 시간을 때우려고 무언가 하려 했을 뿐인데, 재수 없게도 유리창을 닦다가 유리가 갑자기 깨지는 일을 당한 것이다.

의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직업병처럼 그녀가 장기 불면증을 앓고 있는지 물었다.

나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늘 잠을 잘 잤고, 오늘 밤 잠을 설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띠링.

문자 알림음이 그녀와 의사의 대화를 끊었다. 나지아가 휴대폰을 들어 확인해보니 낯선 번호로 영상 하나가 와 있었다.

영상은 조명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지아는 한눈에 주민우를 알아봤다.

남자는 아침에 자신이 고른 그 정장을 입고 있었고, 길고 곧은 다리를 느긋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신이 직접 조각한 듯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는 어디를 가든지 여성들의 비명을 자아낼 만큼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 눈매가 너무나 차가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어도 사람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여자는 예외였다.

3년 만이었지만, 나지아 역시 한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문여린, 나지아 남편의 마음을 빼앗은 사람이다.

문여린은 주민우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아 실크 소재의 복고풍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이 그녀의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하여 마치 조각된 옥처럼 빛났다.

3년간의 해외 유학은 그녀에게 화가 특유의 예술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었고 주민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깊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어, 실로 가련하고 사랑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러브샷을 하라고 부추겼고, 문여린은 수줍어하면서도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주민우는 시종일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빛에는 무심한 듯한 바람기가 흘렀다. 그는 손을 들어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영상은 거기서 갑자기 끝났다.

나지아는 휴대폰을 꽉 쥔 채 씁쓸하게 웃었다.

'어쩐지 일곱 통이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더라니.'

오늘 문여린이 귀국했으니, 주민우가 그녀와 함께 있을 거라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지아가 몰랐다면, 왜 하필 오늘 밤만 불면증에 시달렸겠는가?

단순히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가 없었다.

나지아는 방금 치료를 마친 오른손으로 글자를 입력하며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한 달 숙려 기간이 끝났어. 내일 오전 10시, 법원에서 봐.]

주민우와 결혼한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나지아를 그런 다정한 눈빛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에서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혐오뿐이었다.

그렇다. 주민우는 나지아를 혐오했다. 그에게 나지아와 결혼하라고 강요한 사람이 그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녀와 결혼하는 바람에, 마음속 사랑하는 여인과 3년이나 생이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지아 역시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암에 걸렸고, 아직 이루지 못한 유언이 있었다. 항암 주사 한 방에 2억 원이나 했으니, 그녀로서는 주민우의 고모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결혼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처음부터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기에 주민우에게 죄책감을 느꼈던 나지아는, 3년 내내 그의 식사와 일상을 정성껏 돌보았고 그가 아무리 심한 말을 내뱉어도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3년이면 개를 키워도, 그 개가 아플 때 걱정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민우는, 나지아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이 필요할 때, 마음속 그녀와 러브샷을 하고 있었다.

바늘이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것 같은 예리한 통증에 나지아는 손으로 눈을 가렸고,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링거를 다 맞고 병원에서 나오니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녀가 막 차에 시동을 걸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전용 벨소리는 주민우가 건 전화임을 알렸다.

머리는 끊으라고 명령했지만, 손가락은 습관적으로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나지아는 자신의 손이 방정이라며 속으로 투덜거리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여보세요."

"나지아 씨, 민우가 나이트 바에서 취해 있어요. 빨리 와서 데려가요."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지아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주민우가 오늘 밤에 문여린과 함께 밤을 보낸다면 내일 이혼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나이트 바.

주차를 마친 나지아는 오른손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오늘 밤 문여린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보기 흉한 붕대를 망설임 없이 풀어버렸다.

사람에게 져도 기세에서 질 수는 없는 나지아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

룸에 들어서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 오직 주민우만이 영상에서 본 자세 그대로 잠이 든 듯 소파에 앉아 있었고 깨어 있을 때의 날카로움이 조금은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지아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주민우가 아니라, 술기운을 빌려 그의 몸에 부드럽게 기댄 문여린이었다.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어 색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반면 나지아는 급하게 나오느라 홈웨어 위에 니트 하나만 걸친 채 생얼이었다. 영락없는 가정주부의 모습은 지금의 문여린과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문여린은 그녀를 보자 마치 겁에 질린 듯 순식간에 몸을 곧게 펴고는 긴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주 부인,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몸에 힘이 풀려 민우 씨 어깨에 잠시 기댄 것뿐이에요."

방 안을 가득 채운 독한 술 냄새보다 더 짙은 불편함이 밀려왔다.

지난 3년 동안, 문여린은 완전히 천사 가면을 쓴 여우로 변한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언니, 민우 오빠가 언니를 좋아한다 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민우 오빠가 저 여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는 사람 없잖아? 저 여자를 주 부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제일 싫어하잖아."

문여린의 여동생 문예진이 이 말을 내뱉자, 룸 안에서는 순식간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나지아를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예진아, 그렇게 말하지 마. 민우 씨가 그분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분은 여전히 민우 씨의 아내셔."

문여린은 다시 천사 같은 연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힘주지 않은 어조로 동생을 꾸짖고는, 나지아를 향해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부모님이 예진이를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말이죠."

나지아는 화내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요. 틀린 말 아니에요. 주민우가 날 싫어하는 게 사실이니까요."

"자기 분수는 아네." 문예진이 코웃음을 쳤다.

나지아는 문여린을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 사람이 아무리 날 싫어해도 난 여전히 주 부인이고, 여린씨는 아무런 자리도 명분도 없으니 말이에요."

그 말은 문여린의 코앞에 대고 상간녀라고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여린의 불그스름했던 볼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나지아, 너 지금 누구보고 상간녀래? 우리 언니랑 민우 오빠 사이에 끼어든 건 분명 너잖아! 너만 없었으면 두 사람 벌써 애도 낳았을 거야!" 문예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분노에 차 그녀를 비난했다.

'애는 개뿔.'

'차라리 주민우가 네 언니를 보고 아랫부분이 서기나 하는지 물어보지 그래.'

만약 나지아가 3년 동안 변함없이 그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면, 주민우가 평생 여자를 품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제 다 고쳐놨더니, 나지아는 손도 못 대보고 문여린에게 공짜로 바쳐야 할 판이었다.

나지아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회차 2

나지아는 더 이상 문예진과 문여린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주민우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민우."

주민우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문예진이 나지아를 비웃으며 말했다. "민우 오빠, 일어나요. 오빠네 가사 도우미가 왔어요."

가사 도우미라는 말에 주변 사람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민우 오빠가 어디서 이런 가사 도우미를 얻었는지 정말 궁금하네. 3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민우 오빠를 정성껏 돌봐주며 삼시 세끼까지 챙겨줬다고 들었어."

"거저 갖다 바치는 거지. 너도 민우 오빠처럼 잘생겼으면 여자들이 알아서 달라 붙을 걸."

"하하하하!"

주변 사람들은 나지아를 마치 광대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며 비웃었다.

"문여린 씨, 지금 한 점의 그림이 얼마에 팔릴 수 있나요? 2천만 원?" 나지아는 주변 사람들의 조롱을 무시하고 문여린을 바라보았다.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문예진이 문여린을 감싸며 마치 나지아와 한마디라도 나누는 것이 문여린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나지아는 문예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문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는 한 달에 용돈을 얼마씩 받아요? 2천만 원, 4천만 원, 아니면 1억?"

문예진은 대답을 거부하며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나랑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냥 궁금해서요. 당신들 같은 재벌가 아가씨들은 한 달 용돈이 가사 도우미인 나보다 많은지 알고 싶어서요. 난 한 달에 2억을 받고 주민우의 서브 카드도 마음대로 쓸 수 있거든요."

나지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룸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주민우의 서브 카드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말에 문여린의 눈에 질투심이 스쳐 지나갔다.

나지아는 눈앞에서 말문이 막힌 사람들을 보며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들의 용돈이 기껏해야 몇천만 원이고, 신용카드도 한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지아는 그들에게 경멸하는 웃음을 지어 보인 뒤 주민우를 부축하고 룸을 나섰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도왔다.

나지아는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술값은 제가 낼 테니 다들 마음껏 마셔요. 2억 원도 못 채우면, 그건 주민우를 우습게 여기는 거예요."

룸 안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지아는 드디어 마음속에 쌓였던 분노를 모두 쏟아낸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가 클럽을 나서자 직원이 주민우를 차에 부축해 태웠고, 나지아는 직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차를 몰고 떠났다.

해성 빌라에 도착하자, 나지아는 주민우를 소파에 내던졌다. 그러자 남자는 눈을 뜨며 본래 다정해야 할 눈빛이 차가운 서리로 가득 차 있었고, 숨김없는 혐오감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주민우는 여태껏 술에 취한 척 연기를 한 것이다.

일부러 그녀를 불러 문여린과 그 재벌가 따님들 앞에서 모욕 당하게 만든 거였다.

익숙한 일이지만, 날카로운 칼이 살을 베는 듯한 고통에 뼛속까지 시려왔다.

그녀는 이 아픔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물었다. "해장국 끓여줄까?"

주민우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다시는 나한테 탕을 끓여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까지 연기한 걸 다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지아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 해장국을 말한 거야."

주민우는 그녀가 끓인 탕을 단 한 번도 즐겨 마신 적이 없었다. 매번 그녀는 머리를 쥐어짜며 그를 달래야 겨우 한 모금 마실 수 있었고, 그는 늘 약 냄새가 난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주민우는 그 탕이 자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약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외부에서는 주민우가 여색을 멀리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자신도 스스로 여자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여자가 알몸으로 그의 품에 누워 있어도 그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흔들릴 능력조차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탓에 그 부분 기능을 상실했고, 평생 자식을 가질 수 없었다.

주정화, 즉 주민우의 고모가 그에게 나지아와 결혼하라고 강요한 이유는 그가 문여린과 결혼해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킬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지아가 그의 몸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민우는 이 비밀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나만 보면 탕, 탕, 탕. 탕 말고 다른 말은 할 줄 몰라?" 주민우는 그녀의 말을 오해하고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지아는 태연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럼 이혼에 대해 얘기해. 내가 보낸 카톡 봤지? 내일 오전 10시, 비서에게 다른 일정 잡지 말라고 해. 우리 이혼해."

주민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문여린 씨의 자리를 차지해서 미안해. 하룻밤만 더 참으면, 내일 그 자리를 비워줄게." 나지아는 시선을 떨구었고, 심장이 또다시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이혼하겠다고 했으니 주민우는 기뻐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지아가 미련 없이 이혼하겠다고 말하자 그는 이유 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냉랭하게 내려앉았다. "과연 네가 나한테 자리를 비워주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자리를 비워주는 걸까?"

나지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주민우가 쏘아붙였다. "무슨 말인지 너 자신이 더 잘 알잖아."

나지아가 즉시 맞받아쳤다. "당신이 말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시치미 떼지 마. 고모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하겠다고 하는 건, 고모가 안 계시니 앞으로 더 이상 매달 2억 씩 못 받게 되니까 그러는 거잖아."

"그리고 고모가 강요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 집 대문조차 밟지 않았을 거란 것도 너도 잘 알 테지. 내 서브 카드도 네가 마음대로 쓰게 놔두지 않았을 거고. 너처럼 돈 때문에 자신을 팔 수 있는 여자는 어서 다음 물주를 찾아야 하지 않겠어?" 주민우의 입은 독을 머금은 것 같았다.

지난 3년 동안 나지아는 비슷한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억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결혼 첫해, 주 고모가 그녀에게 준 돈은 모두 할아버지의 항암 주사 비용으로 쓰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달 받는 돈은 해독 약재를 사는 데 쓰고 나머지는 모두 저축했다.

한 달 전 경매에서, 한 신비로운 인물이 50억의 가격으로 신약을 낙찰받았다.

그 신약은 결국 주민우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효과는 매우 뚜렷했다.

그는 이제 아무 여자에게나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주민우의 능력이라면, 전화 한 통이면 그 돈의 행방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지아가 돈에 눈이 먼 여자라고 단정하고 있었기에, 설령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또 다른 음모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 말이 맞았나 보네. 반박할 말이 없어?"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주민우는 그녀를 더욱 몰아붙였다.

상처받는 말을 많이 듣다 보면 점차 면역이 생기기 마련이다. 주민우의 태도가 아무리 나쁘고,말이 아무리 못되어도 나지아는 귓등으로 듣고 흘러 보냈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혼할 테니, 조금만 더 참자.'

나지아는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남자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신 마음이 편하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주민우의 곁을 지나갈 때,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강제로 소파에 넘어뜨렸다.

남자의 거대한 몸집이 그녀 위로 겹쳐졌고, 얼굴에 내뿜는 숨결에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너무 가까운 거리에 나지아는 위험을 감지했다. 주민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나지아, 주 부인의 자리를 차지한 지 3년인데도 한 번도 주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잖아. 우리 주씨 가문이 자선 단체라고 생각한 거야? 한 달에 2억을 받는 여자가 진짜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입맞춤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나지아는 본능적으로 반항하려 했지만,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저항을 포기했다.

주민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눈빛의 혐오감이 더욱 짙어졌지만, 그의 몸은 솔직하게도 그녀를 찢어발기고 싶은 욕망으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는 왜 갑자기 나지아 앞에서 자제력을 잃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분명 3년 동안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지만, 주민우는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불순한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분명 그녀가 서둘러 다음 상대를 찾으려는 모습이 자신을 격분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너 뜻대로 순순히 이혼해 줘야 하지? 이혼할지라도 네 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 놓을 거야.'

그는 그녀를 혐오했기에, 이때도 부드러울 리 없었다.

나지아는 고통에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3년간 주민우가 자신에게 쏟아부은 모든 악담보다 더 아팠다.

나지아도 가만히 있지 않고 그의 몸을 할퀴고 긁었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주민우의 더욱 거친 행동뿐이었다.

회차 3

다음 날.

나지아는 별장의 유선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깼고 정신이 몽롱한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지아야,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수화기 너머로 친구 소정은의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지아는 어젯밤 주민우에게 반죽음이 되도록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얼버무렸다.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 근데 무슨 일이야?"

"너 이혼하면 축하 파티하기로 약속했잖아. 나 지금 레스토랑에서 한참을 기다렸어. 네 휴대폰은 받지도 않고…"

소정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지아는 자지러지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이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와 주민우가 이혼하기로 약속한 시간에서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민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개 자식, 대체 언제 나간 거야.'

한편, 달빛 레스토랑.

소정은은 나지아의 손에 감긴 붕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가 다친 경위와 상처 치료 과정을 듣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주민우 그 개자식은 남편 자격도 없어! 아내가 다쳐서 서명이 필요한데 전화도 안 받고 상간녀랑 놀아나? 그러고는 너를 불러다 상간녀 앞에서 모욕까지 당하게 하다니!"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옆 테이블의 시선이 쏠리자, 나지아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애원했다. "소정아,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못 낮춰! 너한테 화 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너 정말 제정신이야?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랑 당장 이혼 안 하고 뭐해? 집에서 국이나 끓여 먹고 살 작정이야?" 소정은이 속이 터질 듯이 말했다.

나지아는 서둘러 해명했다. "이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오전에 하려다가 못한 거야."

그녀가 주민우에게 전화했지만 비서가 받더니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결국 늦잠 자서 이혼 못 한 거 아니야?" 소정은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결혼 3년 내내 한 번도 함께하지 않다가, 이혼 직전에 잠자리를 가졌다고? 이게 뭐야, 이혼 전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운 건가?"

나지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이혼 전에 한 번쯤 즐겨보는 것도 안 돼?"

"풉!"

갑자기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나지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문득 한 쌍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과 마주쳤다.

주민우였다.

주민우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고, 그의 곁에는 비슷하게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방금 웃음소리를 낸 사람은 바로 그였다.

나지아는 그를 알아봤다. 주민우의 소꿉친구인 고택호였다.

고택호 외에 주민우의 곁에는 문여린도 함께 있었다. 소정은의 말을 들은 것인지, 나지아와 주민우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미소 짓던 문여린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문여린은 어젯밤 일부러 나지아에게 영상을 보내고 사람을 시켜 전화까지 하게 했다. 나지아가 자신을 그렇게 쏘아붙였으니 주민우는 그녀를 더 혐오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혐오하면서 왜 관계를 가진 거지?'

주민우가 얼마나 강한 자제력을 가진 사람인지, 문여린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지아에게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이건 주민우가 나지아에게 다른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는 뜻일까?

문여린이 3년간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나지아는 3년간 그의 곁을 지켰다. 그 사이 주민우가 그녀에게 정이 들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문여린은 마음이 쓰라렸고, 나지아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고택호는 문여린의 기분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주민우를 놀리려는 심산으로 나지아에게 일부러 물었다.

"주 사모님, 어젯밤 소감이 어떠셨습니까?"

나지아는 이런 시시한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헛소리하면 죽여버린다'는 듯한 주민우의 경고 어린 눈빛을 보고는 악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뭐, 그냥 그렇던데요."

대단히 마지못해 내놓은 평가, 어떤 남자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평가였다.

하물며 주민우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라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나지아를 집어삼킬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나지아는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어차피 이제 그에게 탕을 끓여 바칠 일도 없는데, 더는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꼿꼿이 목을 세우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주민우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질 뻔했다. 고모가 떠난 뒤, 이 여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예전에 자신 앞에서 보여주던 온순하고 다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롭게 말대꾸할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급하게 갈아탈 준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든 게 이해됐다. 자신에게서 더는 돈을 뜯어낼 수 없으니, 이제 꾸민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3시." 시간만 던져준 주민우는 나지아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듯, 거친 발걸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민우 씨." 문여린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뒤쫓았다. 복도 모퉁이를 돌기 직전, 그녀가 나지아를 향해 던진 마지막 시선에는 노골적인 적의가 스며있었다.

"감히 민우의 잠자리 실력을 의심하다니, 진정한 용사시네요." 고택호는 감탄 한마디를 남기고는 그들을 뒤따랐다.

나지아는 고택호의 감탄을 무시한 뒤에야 비로소 주민우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오후 3시, 법원에서 이혼.

'아주 좋아. 이제야 밥맛이 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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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하고 픈 그녀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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