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던 신혼집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장본인인 교은하는 남은 물건들마저 미련 없이 박스에 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집을 완전히 비워버릴 기세였다.
진우택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성큼성큼 교은하에게 다가갔다.
"야, 교은하, 너 미쳤어? 내가 잠깐 집 비운 사이에 이런 식으로 분풀이를 해야 속이 시원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화를 억누르는 듯한 그가 그녀에게 명령했다. "당장 한 시간 안에 이 집 원상복구 해놔!"
교은하는 손에 든 물건을 마저 박스에 넣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진우택과 마주 섰다.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우택, 너 몰라?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거. 한번 망가진 건 원래대로 돌릴 수 없는 법이야."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진우택이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교은하는 진우택이 무슨 자격으로 자신을 추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와 같은 사람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다정함이란 오직 그가 사랑하는 여자, 엽서아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으니.
무표정한 얼굴로 진우택을 똑바로 쳐다본 교은하가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입을 열었다.
"결혼식 날, 넌 내 체면과 간청을 무시하고 날 식장에 버려뒀어. 그때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진우택, 내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봤어? 내가 그런 모욕을 당했는데, 이게 고작 투정 부리는 걸로 보여?"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슬픔이 북받쳐 오른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진우택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녀의 모습에 진우택은 순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 감정을 떨쳐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이 몇 년인가. 그동안 그가 교은하의 속을 썩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를 용서해 주었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그가 조금만 달래주면 금방 화가 풀릴 것이라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진우택의 얼굴에서 분노가 씻은 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능숙한 미소가 걸렸다. "우리 은하... 알았어, 알았어. 그만해.
네 기분 안 좋은 거 알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이게 다 뭐야, 우리 신혼집을."
싱긋 미소 지은 진우택이 교은하의 가녀린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달랬다.
"이제 화 좀 풀렸어? 결혼식은 날짜만 다시 잡으면 되잖아. 내가 약속할게. 전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하게 열어줄게. 그럼 됐지?"
교은하는 진우택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가만히 지켜봤다. 입으로는 번지르르한 약속을 내뱉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려는 기색과 그녀를 손쉽게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오만한 확신이 가득했다.
그래,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교은하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자신이 그에게 너무 많은 기회를 줬기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진심으로 대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교은하는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진우택이 어깨에 올린 손을 경멸스럽다는 듯 거칠게 쳐냈다.
"만지지 마. 더러워."
진우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교은하를 쳐다봤다. 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이럴 리가 없었다.
교은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진우택, 결혼식은 이미 끝났어. 다시 할 생각도 없고. 오늘 여기 온 건 짐 싸러 온 것뿐이야."
진우택은 자신의 손이 뿌리쳐진 것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는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짐을 싼다고?"
교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장 이 집에서 나갈 거니까."
진우택은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진우택은 교은하가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집을 떠나면 그녀가 돌아갈 곳 따위는 없다는 것도.
지난 5년간, 교은하는 늘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랬기에 진우택은 그녀가 결코 자신을 떠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이사를 가겠다는 말도 결국 자신에게 숙이고 들어오게 만들려는 수작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진우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녀를 설득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엽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택 씨, 짐만 챙겨서 금방 내려온다면서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엽서아는 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서다 진우택의 맞은편에 서 있는 교은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교은하? 여긴 웬일이야?"
교은하는 엽서아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내 신혼집 아니니? 내가 너한테 설명할 이유는 없지. 오히려 네가 여기 왜 있는 건데?"
엽서아는 상처받은 듯 눈을 내리깔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실수로 과일에 손을 베는 바람에... 우택 씨가 걱정된다며 며칠만 같이 있어 주기로 했어."
말을 멈춘 그녀는 교은하의 짐을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교은하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혹시 나 때문에 화난 거야?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기분 나빴으면 나한테 직접 말하지 그랬어. 내가 사과하면 되잖아, 왜 일을 이렇게 만들어?"
교은하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리며 엽서아에게 다가갔다. "정말 나한테 사과하고 싶어? 진심이야?"
엽서아는 진우택이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연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네 화만 풀린다면."
"그래. 좋아." 교은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지만, 그 눈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네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니, 나도 사양하진 않을게."
말을 마친 교은하의 손이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엽서아의 뺨 위로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