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그럴 능력 있으면 오늘 밤 당장 나가봐."

배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윤서연이 태어나자마자 시골로 보내져, 그 오랜 세월 동안 강씨 가문 사람들에게 거의 외면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그러니 이혼을 한다 한들, 그녀가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눈앞의 윤서연은 추호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배 대표님, 안심하세요. 저는 이제 그런 더러운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

윤서연은 말을 끝내자마자 미련 하나 없이 자리를 떠났다.

배현우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룸 안은 정적에 잠겼고, 사람들은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배 대표님, 형수님께서는 아마 화가 많이 나셔서 그런 걸 겁니다.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 있었잖습니까."

"맞아요. 윤서연은 배씨 가문을 떠날 수 없어요. 매번 싸움이 끝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곤 했잖아요."

그때, 백예린이 눈시울을 붉힌 채 말을 보탰다. "현우 오빠, 나를 신경 쓰지 마. 먼저 가서 서연 씨를 달래는 게 좋을 것 같아."

젖은 옷에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연약하고 불쌍해 보였다.

배현우는 가슴속에서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니.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말을 마치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윤서연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손수 끓인 죽을 내 앞에 내올 거야."

"그럼 다행이네." 백예린은 입술을 깨물며 자책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맞다. 내일 정씨 가문에서 연회를 연다던데… 서연 씨랑 같이 가보는 게 어때?"

"그 여자는 그럴 자격 없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배현우는 단호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예린아. 정씨 가문은 요즘 의학 인재를 찾고 있다더라. 이번 기회에 인맥을 맺을 수 있겠어."

그러자 곁에 있던 이들이 맞장구를 치듯 치켜세웠다.

"배 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백예린 씨는 A시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입니다. 게다가 백예린 씨의 스승은 바로 그 전설의 귀의 아니겠습니까."

백예린은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답했다. "내일, 최선을 다해볼게."

사실 귀의는 이미 수년 전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단지 우연히 남겨진 그 의서를 손에 넣었을 뿐이었다.

정씨 가문과의 인맥, 그것은 백예린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기회였다.

자원 빌라, 윤서연은 프린터에서 이혼합의서를 뽑아냈다.

집 안에 그녀의 물건은 거의 없었기에, 휴대폰 같은 필수품만 챙겼다.

잠시 후, 그녀는 절친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이혼 합의서에 서명을 마친 뒤,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 그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3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그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 뿐이네."

모든 절차를 끝낸 윤서연은 미련 없는 발걸음으로 어둠 속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렌지빛 람보르기니 한 대가 도로 옆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여자가 내려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서연아, 내 보물. 이혼을 축하해!"

심다윤은 그렇게 외치며 차 키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3년이야. 이제 다시 우리 윤 여왕으로 돌아올 시간이야.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심다윤은 고아였지만, 윤서연과는 목숨을 나눈 사이였다. 수년간 그녀의 곁에서 함께 일하며 모든 일을 도왔던 친구이자 동료. 그래서 더 분노가 치밀었다.

"배현우 그 자식, 정말 천하의 쓰레기야. 백예린은 본인 스스로 신의라 부른다지? 웃기지 말라 그래. 신의가 아니라 도둑이겠지. 정말 역겨워. 버러지보다 못한 놈들. 그런 점에서 둘이 어울리긴 하네."

윤서연의 코끝이 찡해졌다. 심다윤의 의리와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윤서연이 차문을 열며 말했다. "과거에 스스로를 가두지 마. 난 그걸 깨닫는 데만 3년이 걸렸어."

깨달음의 순간이 언제든, 결코 늦은 법은 없다.

심다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곧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참, 네가 시킨 일 말이야. 단서가 나왔어."

그녀는 자료를 윤서연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그때 네 어머니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어. 분만을 도왔던 간호사에게 문제가 있었어."

그 말에 윤서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간호사의 행방을 찾을 수 있어?"

윤서연의 어머니는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불길한 존재로 여겨 결국 집에서 쫓아내 시골에 맡겨 버렸다.

하지만 자라면서, 어머니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아직은 찾지 못했어." 심다윤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곳이 정씨 가문이야. 정씨 가문은 A시 최고 명문가야.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방법을 찾아야 해."

그때, 윤서연은 오래 전의 앙숙이 떠올랐다. 그 역시 정씨였지만, 이탈리아의 마피아 수장이었을 뿐, A시와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비록 칼날과 불길 속이라도 난 반드시 가야 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서연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그토록 냉혹하던 아버지가 믿기지 않게 그녀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분명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 심다윤이 말했다.

그러나 윤서연은 고개를 들어 올곧게 앞을 응시하며 말했다. "잘 됐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내 어머니의 유품을 되찾아야지."

20분 후, 그녀는 강씨 저택에 도착했다. 응접실에는 중년의 사내가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었다.

"남자치고 바람 안 피우는 놈이 어디 있겠어? 넌 도대체 왜 그렇게 무능하냐?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고 감히 이혼을 운운하다니."

강민호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질책에 가득 차 있었다. "배씨 가문은 건축 업계의 선두주자야. 우리 강씨 그룹과도 이익 관계가 얽혀 있다. 네가 감성적으로 처신해서 일을 망칠 수는 없어."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거만하게 명령했다. "당장 배현우에게 죽을 끓여다 바치고, 고개 숙여 사과해."

회차 3

그때, 윤서연은 바로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아버지께서 예전에 외도를 하셨을 때, 할머니께서 왼쪽 다리를 부러뜨리고 3일 동안 무릎 꿇고 어머니께 용서를 빌었다 하던데요?"

윤서연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너..." 강민호가 말했다.

강민호는 이런 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라 쉽게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지금의 윤서연은 그녀의 어머니와 똑같이 역겨울 뿐이었다.

"무릎 꿇어!" 강민호는 분노에 치를 떨며 손에 든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오늘 내가 너한테 규율이 뭔지 제대로 가르쳐주마!"

하지만, 윤서연은 너무나도 손쉽게 그 지팡이를 단숨에 붙잡았다.

"아버지, 다리가 불편하신데... 조심하셔야죠."

그러나 그 순간, 강민호의 눈이 커졌다. 지팡이를 빼내려 했지만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놔."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엔 당혹감이 뒤섞였다.

그 말에 윤서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쿵!" 손에서 떨어진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강민호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편, 윤서연은 달콤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강민호는 극심한 통증에 식은땀을 흘렸다.

"거기 아무도 없어? 윤서연! 오늘 반드시 너를 혼내줘야 겠다!" 강민호의 손가락은 분노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어르신, 정씨 가문에서 이따가 직접 오셔서, 내일 연회의 초대장을 아가씨께 전달하신다고 합니다. 주소는 정씨 저택이라 합니다."

그 말에 강민호는 얼어붙고 말았다. 'A시의 정씨 가문?'

얼마 전, 그는 정씨 가문의 암역 권력자가 귀국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설마 직접 초대장을 집으로 보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씨 가문은 최상위 명문가였다. 연회가 열리는 정씨 저택은 벽마다 비취가 박혀 있었는데 그야말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잠깐, 내가 직접 맞이하러 가야겠다."

강민호는 윤서연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시했다. "어서 지아를 불러와라. 정씨 가문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해."

강민호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서 태어나,태어나자마자 시골로 버려진 딸 윤서연.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재혼한 아내에게서 얻은, 온갖 사랑을 독차지한 딸 강지아였다.

그러니 정씨 가문에서 초대한 아가씨가 윤서연 같은 시골뜨기일 리 없었다. 그가 온 정성을 쏟아 키워온 공주, 바로 강지아였다.

강민호가 자리를 떠난 뒤, 윤서연은 어머니의 유품을 찾으러 갔다.

외할머니가 남긴 말대로, 정원의 나무 뿌리를 파내니 검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쇠가 없네." 윤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상자는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져, 웬만한 힘으로는 부술 수도 없었다.

윤서연은 그것을 가방에 넣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다 마침 아버지와 이복동생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과 마주치게 되었다.

강지아는 핑크 빛 공주 드레스를 차려 입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채였다. "어머, 언니는 아직도 안 갔네?"

강지아는 고개를 치켜들고 혀를 끌끌 찼다.

"촌년 주제에 세상 구경도 못 해봤을 텐데, 마침 잘 됐네. 곧 정씨 가문에서 나한테 초대장을 보내올 거야. 언니도 세상 구경 좀 해봐."

윤서연은 턱을 괸 채 강지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못난 얼굴은 오래 들여다보는 것만큼 고문일 때가 없지."

강지아는 분노에 치를 떨며 고함을 질렀다. "너 이 천한 년..."

"그만." 강민호가 버럭 소리쳤다. "정씨 가문 사람들이 곧 도착할 거야. 숙녀답게 행동해."

말을 마치자마자 현관 쪽에서 낯익은 남자가 들어섰다.

강지아는 그 사람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정씨 가문의 고위 비서였다.

"어느 분이 강씨 가문의 아가씨죠?"

"저예요." 강지아는 마치 도도한 공작새처럼 다급히 윤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씨 가문의 암역 권력자께서 귀국하셨다죠. 그분께 전해주세요. 초대해주셔서 영광이에요."

강지아는 비웃음이 섞인 눈빛으로 윤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공주처럼 대우받아온 자신이 이런 촌뜨기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강민호가 나서며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아한테 선물을 준비해 정씨 가문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씨 가문은 흑백 양계를 장악한 가문이었다. 때문에 그들과 혼인을 맺을 수 있다면, 배현우의 도움이 없어도 강씨 가문은 충분히 번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비서는, 두 사람을 지나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윤서연 씨, 안녕하십니까." 비서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두 손으로 초대장을 내밀었다. "정 대표님께서 곧 윤서연 씨와 거래를 하실 것이라고 전하셨습니다."

윤서연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천천히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정씨 가문의 암역 권력자, 정도윤. 그는 절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며칠 전 A시에 돌아왔다는 소식만이 퍼져 있었다.

윤서연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왜 나를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정씨 저택에 발을 들일 기회를 찾고 있었으니, 이보다 완벽한 기회는 없었다.

반면 강민호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표정 역시 놀라움에서 의심으로 바뀌었다.

"혹시... 초대장을 잘못 전달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초대장에는 분명히 윤서연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때, 강지아는 더욱 격분하여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맞아요! 정씨 가문의 초대장이 어떻게 곧 이혼이나 당할 버림받은 년한테 갈 수 있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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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너졌지만 그녀는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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