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이 못된 년이 아직도 죽지 않은 게로구나. 내 반드시 널 죽이고 억울하게 죽은 부인을 위해 복수할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앞에 펼쳐진 광경을 이해하기도 전에, 중년 남자가 곁에 선 시위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을 향해 휘두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소청리(蘇青璃)는 곧바로 몸을 옆으로 피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난 분명 죽었는데? 여기는 어디고, 이 사람들은 또 누구지?
그 순간,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에 썰물처럼 밀려 들어왔고 소청리는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잠시 후, 소청리는 드디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그녀는 환생했다.
다만 21세기 그녀가 살던 곳이 아니라 천원 왕조라는 시대에 그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재상 가문의 적녀 소청리로 환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으로 봤을 때, 곧 죽을 듯.
소청리와 그녀의 둘째 여동생 소청옥(蘇青玉)은 경양(慶陽) 후작 부인의 생신 연회에 동시에 초대받았다.
소청리를 눈여겨본 경양 후작 부인이 소청리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졌고, 소청리가 방을 나선 후, 후작 부인은 누군가에게 독살당한 채 발견되었다.
이후 소청리가 경양 후작 부인을 독살한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소청리가 자신의 부인을 독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경양 후작은 당장에서 꽃병을 집어 들고 이 몸의 주인을 저승으로 보낸 것이다.
사건의 자초지종을 파악한 소청리는 경양 후작의 기습을 피한 뒤, 팔을 낚아채고 검을 빼앗아 경양 후작의 목에 겨눴다.
"후작 어르신!"
"모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소청리는 소매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후작 어르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야!"
"언니, 후작 부인을 독살한 것도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그런데 어찌 후작 어르신의 목숨까지 위협하려 한단 말입니까?" 연분홍색의 비단 치마를 입은 소청옥이 목소리를 높였다. "온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만 속이 후련합니까?"
"그 입 다물어!" 소청리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네가 부인 방에서 나온 후 부인이 독살당했다. 네가 죽인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죽였단 말이냐?" 경양 후작이 더욱 언성을 높였다.
"후작 어르신, 제가 후작 부인을 죽이면 무슨 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소청리가 되받아 물었다. "부인을 살해하면 후작부의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후작 부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경양 후작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부인의 말에 심기가 뒤틀린 네가 앙심을 품고 살해한 것이 틀림없다."
"부인께서 얼마나 저를 살갑게 대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제가 부인을 살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직도 변명을 입에 올리는 것이냐!"
"언니 제가 이리 간청 드립니다. 제발 오기 부리지 말고 후작 어르신을 놓아주십시오." 소청옥은 가녀린 얼굴로 자매간의 정을 강조하며 말했다. "언니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소씨 가문을 위해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더 이상의 죄악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후작 어르신, 부인을 살해한 사람은 정말 제가 아닙니다." 마음을 가라앉힌 소청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부인께서 저를 각별하게 대해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범인을 이대로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범인은 바로 네년이야!" 경양 후작이 고집스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후작 어르신, 저에게 세 시진의 시간만 허락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그사이에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후작 어르신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범인을 잡을 생각이 아니라 시간을 끌어 도망칠 기회를 찾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후작부의 계집종 담이가 이를 악물고 표독스럽게 외쳤다. "아가씨는 지금 부인을 독살한 것도 모자라 후작 어르신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소씨 가문에 죄를 물을 것입니다!"
"소청리. 지금 당장 죄를 시인한다면 본 후작은 소씨 가문의 죄는 묻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양 후작이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 더없이 하찮은 어린 계집에게 붙잡히다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다!
소청리는 경양 후작의 목에 칼을 겨눈 채 많은 사람들과 대치했다. 경양 후작은 그녀를 믿지 않았고 소청옥은 그녀가 이곳에서 죽길 바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정녕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문득, 소청리의 시선이 멀지 않은 정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칠흑보다 어두운 검은색 비단옷을 입은 남자의 주위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그러나 소청리의 눈을 사로잡은 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남자의 고운 자주색 눈동자였다.
회차 2
소청리의 머릿속에 남자에 대한 정보가 순간 떠올랐다.
천원 육 황자 화운정(花雲霆). 생모는 궁중의 죄수이고, 태어날 때부터 색이 다른 특이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열네 살부터 뛰어든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폐하로부터 전장의 신이라는 청호를 받았으며, 유일하게 군권을 손에 쥔 황자였다.
경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그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긍긍전전했다. 경양 후작도 그저 예의상 초대장을 보냈을 뿐, 그가 정말로 연회에 참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홀로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화운정의 모습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고, 눈앞에 펼쳐진 소란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전장의 신이라 불리는 전하께서 후작 부인과 저를 위해 정의를 지켜주길 바랍니다."
손에 쥔 술잔을 가볍게 움직이던 화운정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맴돌았다. 어느 누가 감히 그에게 정의를 지켜주길 바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소청리의 대담한 행동에 적지 않게 놀란 모습이었다. 화운정의 치가 떨리도록 잔인한 모습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혹시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까 두려워 사람들은 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으니 말이다.
소청리는 정녕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감히 전장의 신에게 정의를 부탁하다니!
소청옥은 남몰래 비웃음을 터뜨렸다. 소청리가 오늘 이곳에서 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다니.
소청리는 계속해서 후작의 목에 칼을 겨눈 채 정자로 향했고, 후작을 앞으로 밀쳐낸 뒤 빠르게 화운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청리 왕야께서 공정하고 사심 없이 강직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어떤 간녕한 자도 눈감아주지 않고, 무고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며, 대금(大晉)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소청리가 세력에 아첨하는 모습에도 화운정이 화를 내지 않자 소청리는 계속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후작 부인을 독살한 범인은 제가 아닙니다. 왕야께서 저에게 세 시진이라는 시간만 허락해 주신다면 반드시 범인을 찾아내겠습니다. 만약 제가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청리의 목숨을 왕야께 내어드리겠습니다."
공손하게 무릎을 꿇은 소청리를 내려다보는 화운정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에게 정의를 지켜 주길 바라는 말도 이미 충분히 황당한 부탁인데, 그가 공정하고 사심이 없으며 강직한 왕야라고 아첨까지 해대다니.
모두가 그를 특이한 눈동자를 가진, 잔인하고도 냉혹한 피가 흐르는 괴물이라고 하는데, 소청리는 그를 대금(大晉)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말했다. 정녕 그를 조롱하는 말이 아니란 말인가?
눈을 가늘게 뜬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소청리가 고개를 들자 화운정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두 눈에는 조롱의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넘쳐흐르는 진정성과 확신에 찬 태도만 가득했다.
"부디 왕야께서 청리에게 억울한 누명을 벗을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본 사람은 소청리가 처음이었다.
소청리의 배포를 높게 평가한 화운정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편으로는 소청리가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지 보고 싶었다.
"네가 이리 고집부리니 본 왕은 너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세 시진이 지나도 결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본 왕의 손으로 너를 직접 단두대에 올릴 것이다."
화운정의 승낙을 받은 소청리는 더더욱 의욕이 솟구쳤다.
"왕야, 경양 후작부를 봉쇄하시고, 세 시진 동안 후작부의 모든 출입을 막아주십시오."
화운정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현의위가 제일 빠른 속도로 경양 후작부를 둘러쌌다. 사람들은 반박하고 싶었으나 화운정의 쌀쌀맞은 눈빛에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도 다시 삼켜야만 했다
"저는 시체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소청리는 화운정을 똑바로 쳐다봤다. 후작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화운정을 두려워하고 어쩌지 못하지만, 암암리에 자신을 상대할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계략을 꾸민 사람이 그녀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건 아마 그녀의 배후인 승상댁을 상대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하물며 그녀가 증거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화운정의 수하가 그녀의 곁에서 확인해야 했다.
"화일(花一), 저 계집의 뒤를 따르거라. 만약 누가 방해하려 한다면 당장에서 목을 베거라."
"네, 주인님."
몸을 돌린 소청리가 후작 부인의 처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자마자 뒤에서 화운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청리, 만약 네가 이곳에서 도망치려 한다면 소씨 가문 일가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왕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리 진상을 밝혀내기 전에 도망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회차 3
경양 후작 부인의 시체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술 색은 이미 검게 변했고 눈, 코, 입,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보아 독에 중독되어 죽은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입안에서는 어떤 독소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간을 깊게 찡그린 소청리는 후작 부인의 몸 곳곳을 빠짐없이 검사한 결과, 끝내 검지에서 작은 상처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상처는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발견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미세한 크기였다. 그러나 바로 이 작은 상처가 후작 부인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것이다.
얼굴과 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입술은 검은색으로 변했으며 손톱은 연한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는 낙하에 중독된 증상이었다. 낙하 독이 입으로 섭취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피에 닿으면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여 한 시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범인은 독을 흉기에 바른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작은 상처를 낼 수 있는 흉기는 무엇일까?
화일은 이곳저곳을 살피며 직접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하는 소청리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봤다. 경성의 여인들은 주인님을 마주치면 괴물 보듯이 쳐다보며 어떻게든 몸을 피하기 위해 안달인데, 이 여인은 겁도 없는지 주인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까지 했다. 정녕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
소청리는 경양 후작 부인을 처음 만난 장면을 떠올렸다. 우연히 후작 부인의 목숨을 한 번 구해준 적 있는 그녀에게 후작 부인은 남다른 애정을 보였었다.
그녀를 처소로 초대한 후작 부인은 그녀와 함께 바둑을 두면서 머지않아 성년이 되는데,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물어봤었다.
바둑판 앞에 앉은 소청리가 기억을 회상하면서 후작 부인과 겨뤘던 판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둑알을 판에 놓으면 놓을수록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소청리가 후작 부인의 물음에 정신이 팔려 바둑알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렸으나, 통 안에는 바둑알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있었다.
곧바로 바닥에 엎드린 소청리는 의자 아래 하얀색 바둑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탁자 위에 놓인 바둑알은 두 사람이 사용한 바둑알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청리가 의자 아래에서 바둑알 하나를 꺼내고, 처소 밖으로 나가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일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소청리가 풀을 뽑고, 나무에 오르며 물도랑 앞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본 화일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자포자기한 걸까?'
"소 낭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소청리는 후작 부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독에 중독되었는지는 알았으나, 범인이 어떻게 후작 부인의 검지에 상처를 남겼는지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청리가 화일 앞에 멈춰 섰다. "무사님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화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순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화일의 오른쪽 손아귀에는 두터운 굳은살이 배어 있었고, 검을 다루는 오른손에는 작은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다. "이 상처들은 어쩌다 생긴 겁니까?"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 화일은 조금 머뭇거렸다. 자신이 왕야의 심기를 건드려 왕야께서 그에게 손으로 하루 종일 풀을 뽑는 벌을 내렸다고 말해야만 할까?
"풀을 뽑다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상처는 우연히 생긴 상처라는 말씀이군요."
소청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후작 부인의 방으로 돌아가 바둑판 앞에 앉았다. 그렇다면 후작 부인의 손에 난 상처도 바둑판에서 생긴 것이겠지.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우연히 손가락에 상처가 날 수 있을까? 과일을 깎다가? 아니다, 후작 부인은 직접 과일을 깎을 필요가 없다. 하물며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상처는 칼에 베인 상처는 아닌 것 같았으니.
소청리는 만약 자신이 후작 부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 손가락에 상처가 날지 상상해 보았다.
습관! 한 사람의 습관을 파악하면, 완벽한 함정을 놓을 수 있어! 범인은 후작 부인의 작은 습관까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소청리는 후작 부인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후, 소청리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범인은 그야말로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무사님, 이만 돌아갑시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