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플래티넘 호텔.
"이게 이씨 가문에서 준비한 예단이다. 강민재, 읽어."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박소연이 번쩍 눈을 뜨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더없이 익숙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 이브닝드레스…. 여기는, 바로 이준서와 약혼식을 올렸던 그날이었다!
그녀가 환생했다!
대기실의 열린 문틈으로 박소연은 연회장에서 한 줄로 선 검은 정장의 경호원들이 값비싼 맞춤 보석, 명품 시계, 부동산 등기부 등본, 고급 차 열쇠 등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준서는 맞춤 정장 차림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씨 가문의 실권자, 이태준의 비서인 강민재가 물품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다.
박소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활짝 열고 뛰쳐나갔다.
"잠깐만요! 저 결혼 안 합니다. 파혼하겠습니다!"
그러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준서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짜증스러움이었다. "소연아, 지금 떼쓸 때가 아니잖아."
박소연은 차갑게 비웃었다. "떼? 이준서, 착각하지 마. 너처럼 바람피우고 굴러먹던 더러운 인간 때문에 내가 떼를 쓸 것 같아? 나 결혼 안 해. 안 한다고!"
그녀의 단호한 말이 나오자, 연회장의 수군거림은 더욱 커졌다.
"뭐? 결혼 전에 바람을 피웠다고?"
"더러운 인간?"
"대체 무슨 일이야?"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퍼지자, 이준서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박소연이 미친 건가? 사석에서 떼를 쓰는 거야 그렇다 쳐도, 감히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정말로 내가 파혼이라도 할지, 전혀 두렵지 않은 건가?'
"박소연!"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가 오냐오냐해 주니까, 이제 기어오르는 거야!"
옆에 있던 박정호 역시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꾸짖었다. "소연아, 그 성질 좀 죽여라. 매번 준서한테 떼쓰지 말고. 세상에 널 끝까지 받아줄 사람은 없다."
새어머니 문혜경도 비꼬는 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예전엔 할아버님이 정해주신 약혼이라는 핑계로 준서랑 결혼하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이제 소원대로 됐잖아요? 그런데 또 왜 이러는 거죠?"
박소연은 속으로 냉소했다.
지난 생에서는 박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용성 상류 사회 전체가 박씨 가문 큰 아가씨 박소연이 이준서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어른들은 그저 무심코 정한 약혼을 빌미로, 결혼을 강요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키 큰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씨 가문의 실권자이자, 이준서의 작은 삼촌인 이태준이다. 죽음의 어둠을 넘어 되돌아온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지난 생에서 결혼한 뒤, 이준서는 매일같이 그녀에게 이태준에게 보약을 보내게 했다. 하지만 그 보약에는 독이 타여 있었다. 그녀의 손을 빌려, 이태준의 몸은 날이 갈수록 서서히 쇠약해져 갔다. 그 틈을 타, 그는 이태준이 맨손으로 세운 재산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녀가 납치됐다는 거짓말로 이태준을 교외의 한 창고로 유인했다. 그곳에서 그의 손발 힘줄을 끊고, 산 채로 극심한 고통 속에 죽게 만들었다.
그가 그때 왜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은 자신이 그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이준서는 그녀를 가차 없이 밀어냈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몸은 멈추지 않았고, 부러진 나무 말뚝 하나가 배를 꿰뚫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전생의 기억이 피눈물이 날 만큼 선명했다. 하늘이 다시 한 번 살아갈 기회를 준 이상,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이태준의 앞으로 걸어갔다.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훤칠한 체구, 그리고 타고난 날카로운 기세. 이태준의 존재감은 보는 이의 등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강렬했다.
박소연은 남자의 위험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작은 아버지도 싱글이시잖아요? 저, 작은 아버지랑 결혼하겠습니다."
그러자 연회장 안은 순식간에 죽음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은 폭탄이 터진 듯한 그 발언에 충격을 받아, 그대로 얼어붙었다.
회차 2
박정호가 가장 먼저 반응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 미친년이, 어디서 헛소리야? 그분은 준서 작은아버지셔! 항렬이 다르잖아, 너 미쳤어?"
문혜경은 이태준이 예물을 다시 가져갈까 봐 겁이 났다. 서둘러 그녀를 잡아 끌었다. "얘, 너 미쳤니? 말버릇이 그게 뭐야? 얼른 들어가서 정신 좀 차려."
그녀는 힘이 세서 다짜고짜 박소연의 팔을 잡아챘고, 박소연은 도무지 뿌리칠 수가 없다.
만약 오늘 이 혼사를 무르지 못한다면, 박정호의 성격상 당장 사람을 시켜 밤을 새워서라도 그녀와 이준서의 혼인신고를 마칠 터였다.
어쩌면 그녀를 이준서의 침대에 던져 넣어, 혼인 관계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랐다. 이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협력이 오래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전생에 그녀는 그렇게 맥없이 이준서와 결혼했다. 지금은 이태준과 손을 잡는 것이 최우선의 선택이다.
끌려 나갈 찰나, 그녀는 다급함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떠올렸다.
줄곧 어두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이태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꾸짖음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분노도 아니었다. 오히려 심사숙고 끝에 던진 진지한 물음이었다.
그 말에 모든 사람이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박소연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 굳어버린 문혜경의 손을 재빨리 뿌리치고, 대담하게 이태준의 바로 곁에 섰다.
보드라운 몸이 그의 팔에 거의 바싹 달라붙었다.
살짝 치켜든 작은 얼굴에는 분홍빛이 돌아, 인형처럼 고왔다. 울어서 눈가가 조금 부어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별처럼 빛났다. "충동적인 선택 아니에요. 충분히 생각했어요."
남자는 믿지 않는다는 듯, 칼날 같은 눈썹을 찌푸린 채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유가 뭐지?"
박소연은 이 남자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분명 그의 의심을 살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이준서가 바람을 피웠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 사람 작은어머니가 돼서 복수할 거예요. 저, 젊고 예쁘잖아요. 저랑 결혼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걸요?"
여전히 제멋대로고 당돌한 태도였다.
박정호는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몹쓸 것! 박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그러나 뜻밖에도 이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내 박정호를 향해 차갑게 되물었다. "저한테 시집오는 게, 박씨 가문에 먹칠하는 일입니까?"
그 한마디에 박정호는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그는 서둘러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죠. 다만…"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긴 다리를 옮겨 앞으로 나섰다. 맞춤 제작한 검은 정장에 감싸인, 높고 꼿꼿한 몸선. 금욕적이면서도 고귀한 기세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태준이 홀 전체를 향해 선언했다. "오늘부로 이 자리는, 저와 박소연 씨의 약혼식으로 변경합니다. 오늘 약혼식에 참석하신 분들께는, 저희 이씨 가문과의 협력을 우선적으로 제안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제 비서에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연회장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이는 박소연의 편에 서서 그녀의 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자,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분명한 경고였다! 이씨 가문과 협력할 기회라면, 누구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조카의 약혼녀가 작은어머니가 되는 이 전개는,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박소연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태준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바로 앞으로 다가가 남자의 팔을 끼고, 자랑스럽게 그의 곁에 섰다.
한편, 눈앞에서 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히는 것을 본 이준서는 한동안 넋이 나간 듯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박소연이 이태준의 팔에 바싹 붙어 손을 끼고 있는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박소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분은 내 작은아버지셔! 예의 좀 지켜!"
회차 3
그러나 다음 순간, 박소연은 이준서가 예상했던 것처럼 거칠게 밀쳐지지 않았다.
이태준은 오히려 박소연을 다정하게 한 번 바라본 뒤,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준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안 들리냐? 오늘이 나랑 소연이의 약혼식이다. 이제부턴 네 작은어머니야. 인사 드려."
이준서는 충격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갑자기 이태준의 지갑에서 봤던 사진을 떠올리며, 눈앞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설마, 설마 두 사람 사이에 원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럴 리 없어!'
이태준은 이미 불임 진단을 받았고, 평생 결혼할 생각도 없으며 여자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박소연, 너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려서 우리 작은아버지를 꼬신 거야? 너 진짜 천박하다…."
"퍽!"
이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태준은 그의 무릎을 세게 걷어찼다. "어디서 말버릇이야! 어른을 존경할 줄도 모르고. 무릎 꿇고 사과해."
비명을 지른 이준서는 무릎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이준서의 이성을 빠르게 되찾게 했다.
그는 분노를 억누른 채, 억울하다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소연아, 나한테 화난 거 알아. 하지만 결혼은 장난이 아니잖아…. 나 때문에 평생 후회할 선택을 해선 안 돼. 우리 소꿉친구잖아. 같이 자랐고, 널 제일 잘 아는 건 나야. 제발 다시 한 번만 잘 생각해 줘, 응?"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자신을 다시 박소연 앞에 내놓은 듯한 자세였다. 그녀가 손만 내밀어 잡아 준다면, 모든 게 되돌아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만약 예전의 박소연이었다면, 이준서가 이렇게 진심을 내보이는 모습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은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가차 없이 찢어 놓았다.
그녀는 더 이상 바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곁에 선 남자의 몸이 긴장한 것을 느낀 박소연은,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태준아, 우리 조카 참 웃기지 않아?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다고 다 소꿉친구야? 그렇게 치면 우리도 소꿉친구네. 어릴 때 넘어져서 무릎 까졌을 때, 네가 나를 안고 집에 데려다줬잖아. 그렇게 따지면, 넌 날 처음 안은 남자니까 책임져야 하는 거 아냐?"
남자의 몸이 천천히 긴장을 풀더니,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아직도 기억해?"
"당연하지." 박소연은 자랑스러운 듯 작은 얼굴을 치켜들고 그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가, 고개를 돌려 무릎을 꿇고 있는 이준서를 경멸하듯 힐끗 바라봤다.
"다시 생각해 보라며? 그래서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내 남편은 돈 많고 잘생기고 다정하기까지 해. 너, 그 사람보다 나은 게 하나라도 있니?"
그녀가 말을 할수록, 이준서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태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이준서를 노려봤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이씨 가문에서 당장 꺼져라."
그는 말을 마친 후, 아직도 어리둥절한 박소연을 품에 안고 연회장을 나섰다.
이준서와 연회장에 남은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준서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럴 리 없어. 설령 박소연이 이태준과 결혼한다고 해도, 이태준은 불임이잖아. 이씨 가문의 가업은 결국 내 것이 될 거야.'
두 사람은 연회장을 나와 휴게실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이태준은 박소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 손을 풀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고, 그대로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는 그녀를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목적은 달성한 것 같은데, 이따가 나랑 갈래, 아니면 박씨 저택으로 돌아갈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소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마치 잡아먹을 듯한 시선들을 떠올린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하며 교활하면서도 짓궂은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마치 영리한 작은 여우처럼.
"제가 박씨 저택으로 들어가면, 괴롭힘당할까 봐 걱정되세요?"
속마음이 들킨 듯, 남자의 귓불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