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거실에 침묵이 흘렀다.
김이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재진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김이서는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김씨 가문의 큰 아가씨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고, 웨딩 사진도 찍지 못했으며 신혼 첫날부터 남편에게 문전박대까지 당했다.
그런데 김이서는 울며불며 난리를 치지도, 처가에 전화해 고자질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냅다 소파에 드러누운 그녀의 모습에서 절대 이씨 가문을 떠나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느껴졌다.
이재진은 그런 김유나가 꽤 흥미로웠다.
김이서는 고개를 들어 이재진을 쳐다봤다. "이재진,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린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으니 한 배를 탄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네가 날 인정할 때까지 난 여기서 버틸거야. 하루가 걸리든, 일 년이 걸리든, 네가 날 인정할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뭘 인정하라는 거지?"
"내가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란 걸 인정해."
김이서를 빤히 쳐다보던 이재진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는 김이서를 향해 말했다. "기다리든가."
이재진이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거실에 남은 김이서는 천천히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말로는 기다린다고 했으나 사실 도박을 하고 있었다.
전생, 그녀는 이재진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는 예삿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녀에게 흥미를 느껴야만 이재준은 비로소 그녀를 거들떠 볼 것이다.
그녀는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
2층, 이재진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의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서도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때? 그 아가씨 난리를 쳤어?"
이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 옆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 따랐다.
서도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울었어? 김씨 가문에 전화해서 고자질하진 않았어?"
"아니."
"어? 그럼 걔 지금 뭐하고 있는데?"
이재진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소파에 드러누웠어."
"드러누웠다고?"
"그래."
"왜? 왜 드러누운건데?"
이재진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가 걔를 이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인정할 때까지 기다린대."
다음 날 아침.
김이서는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이씨 가문의 거실은 넓었고, 소파도 푹신했지만 침대만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목이 뻐근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주물렀다. 그때, 테이블 위에 따뜻한 우유 한 잔과 샌드위치 한 조각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집사가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것을 보고 다가왔다. 어젯밤보다 훨씬 공손한 태도였다. "사모님, 이건 사장님께서 준비하라고 지시하신 아침 식사입니다."
김이서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재진이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요?"
"네."
김이서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온도가 딱 적당했다.
그녀는 싱긋 미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층, 이재진은 서재 창문 앞에 서서 정원을 청소하는 하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의 곁에 다가서서 함께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 아직도 안 갔네? 난 김이서가 그저 말로만 그러는 줄 알았어."
이재진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서도현은 혼자서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도 꽤 근성이 있네. 다른 아가씨였어 봐, 신혼 첫날밤에 소파에서 잠을 자게 했다면서 눈물을 질질 짜며 친정으로 돌아갔을 거야."
이재진은 몸을 돌려 책상 앞에 앉았다. "근성이 아니야."
"그럼 뭔데?"
"똑똑한 거지."
"똑똑하긴 뭐가 똑똑해!"
이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든 서류를 펼쳤다.
서류에는 김이서의 개인 정보가 적혀 있었다.
김이서는 똑똑한 여자다.
그녀는 울며 난리를 치는 것도, 친정에 고자질하는 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김이서는 아침을 먹고 나서 캐리어를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집사는 그녀를 막고 싶었지만 감히 막지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사모님, 사장님 서재는 2층 동쪽에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난 어디서 자면 되죠?"
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복도 끝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저 방은 사장님 침실이고, 그 옆 방이 손님방입니다."
김이서는 손님방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지만,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 놓더니 안에서 옷을 꺼내 옷장에 걸기 시작했다.
집사는 문 앞에 서서 머뭇거렸다.
김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사모님, 사장님 성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먼저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김이서는 몸을 돌려 집사를 쳐다봤다. "집사님, 이재진이 날 이 사모님으로 인정할까요?"
집사는 깜짝 놀랐다.
"쳇, 봐요. 모르시잖아요. 그런데 집사님한테 여쭤봐서 뭐하겠어요."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김이서는 계속해서 옷을 옷장에 걸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재진을 건드리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이곳에서 살 거에요. 이재진이 날 투명인간 취급하면 나도 이재진을 투명인간 취급하면 그만이에요."
점심, 김이서는 1층으로 내려왔다.
식당에는 그녀 밖에 없었고, 테이블 위에는 여덟 가지 반찬과 국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가 낮잠을 잤다.
오후에는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정원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원사는 그녀에게 장미와 월계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이재진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김이서는 말 없이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갔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넷째 날, 서도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젠장! 나 못 참겠어! 너희 집에서 4일이나 보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김이서가 산책하는 모습만 주구장창 봤다고!"
이재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김이서가 이렇게 참을성이 대단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며칠 동안, 그녀는 그를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집사더러 김이서를 서재로 데려오라고 해."
이대로 계속 버티다가는 서도현이 그의 집에 아예 눌러 붙을 지도 몰랐다.
그 시각, 김이서는 정원사와 함께 새장을 들고 산책하고 있었다. 집사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사모님,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서재로 부르셨습니다."
김이서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지금요?"
"네."
"알겠어요."
김이서는 새장을 내려놓고 치마를 정리하고는 집사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갔다.
2층 서재 문 앞,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집사는 문을 열더니 김이서를 향해 들어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서재는 넓었고, 통유리창 앞에는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이재진은 책상 뒤에 앉아 만년필을 손에 쥐고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김이서는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재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이리 와."
김이서는 천천히 다가가 이재진의 맞은편에 섰다.
이재진은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머리를 자연스레 늘어뜨렸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너무나 맑았다.
사흘 동안 보지 보지 못했을 뿐인데, 약간 마른 것 같았다.
"지낼 만해?"
김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울지 않았어?"
"아니."
"소란 피우지 않았어?"
"아니."
이재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그녀를 쳐다봤다. "밖에서 사람들이 너를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김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김씨 가문 아가씨가 신혼 첫날밤에 방에서 쫓겨나 불쌍하게 소파에서 밤을 보냈고 이튿날이 되었는데 여전히 창피한 줄도 모르고 김씨 가문에 눌러 붙었다고 하 더라고."
그 말을 들은 김이서는 싱긋 미소 지었다. "응"
"응? 그게 끝이야?"
"아니면? 무슨 반응을 원해?"
김이서는 이재진을 빤히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썼다면, 너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이재진은 그녀를 몇 초 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다. 그런 그가 자신을 내려다 보자 김이서는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역시 A시 제일가는 권력가 다운 기세였고 상계와 어두운 세계를 주름 잡는 다는 소문이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김이서, 뭘 원하는 거야?"
김이서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