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만약 강태준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면, 길가에 앉아 비를 맞고 있는 윤서진의 무표정한 얼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젊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새로운 자극에 빠진 그는, 자신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듯했다.

윤서진은 강태준의 차가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방에서 임신 준비 검사지를 꺼낸 그녀는 종이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번화한 도심 중심가도 어느새 한산해졌다.

길 모퉁이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빗방울에 젖어 있었고, 발밑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사랑이 무슨 소용일까?

윤서진은 결혼반지를 빼서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을 잡아 반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조용히 쥐여 주었다.

"비 오니까, 얼른 집에 돌아가세요."

할머니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고, 윤서진은 더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2분 후,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길 모퉁이에 멈춰 서더니 운전석 문이 열렸다.

남자가 반짝이는 구두를 바닥에 디디자 정장 바지가 위로 살짝 올라가며 검은 정장 양말에 감싸인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났다.

그는 차에서 내려 단정한 체구로 검은 우산을 펼쳤다. 성큼성큼 인도로 올라서며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니는 서둘러 잘못을 인정했다. "훈이야, 화내지 마라. 나도 비 올 줄은 몰랐어. 할머니 몸은 튼튼해서 비 좀 맞아도 괜찮아…"

그녀가 음악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기사가 실수로 꽃을 팔던 어린 아가씨를 치는 사고가 났다.

운전기사가 아가씨를 병원에 데려다주는 동안, 그녀는 회사와 가까운 길가에서 일밖에 모르는 손자가 자신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의 차가운 얼굴에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반지를 내밀었다.

"방금 어떤 아가씨가 오해를 해서, 반지까지 빼서 나한테 쥐여 주고 갔어.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벌써 멀리 가 버렸단 말이야. 빨리 가서 돌려줘! 저기, 저쪽으로 간 그 아가씨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할머니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본 한지훈은 네온사인에 가려진 가녀린 그림자만 겨우 볼 수 있었다.

"일단 차에 타세요."

할머니를 차에 태운 그는 차 안의 온도를 높이고 담요를 건넨 뒤, 할머니의 재촉에 문을 닫고 그 여자를 쫓아갔다.

남자가 걸음을 재촉하자, 멀리 떨어진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비 내리는 길을 천천히 걷는 여자의 톤 다운된 블루 트렌치코트는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고, 잘록한 허리선이 더 도드라지며 한층 더 가녀려 보였다.

곧게 편 등에는 묘한 고집이 배어 있었고, 어딘가 세상과 거리를 둔 듯한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말 못 할 사연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모퉁이에서 사라졌다.

한지훈이 걸음을 재촉했지만, 모퉁이를 돌자 여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거리,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친 그림자가 그 여자가 정말 존재했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한지훈이 차로 돌아오자, 할머니는 곧바로 물었다.

"놓쳤어요."

"항공사 일까지 맡아서 기장으로 비행기까지 모는 사람이, 어떻게 아가씨 하나도 못 따라잡냐?"

"할머니,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조용히 해. 너 정말 나 실망시키는구나. 그 아가씨, 얼마나 예쁘고 또 착한지 몰라! 네가 한 5분만 일찍 왔어 봐라, 어쩌면 벌써 내 손주며느리였을지도 몰라!"

"그 아가씨가 이미 결혼했어요." 한지훈은 반지를 할머니에게 돌려주려 내밀었다. 겉보기에는 결혼반지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받지 않고 다시 밀어냈다.

"결혼했으면 뭐 어때? 반지까지 빼놨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 네가 틈을 타서 들어가면 돼."

한지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반지를 돌리자, 어두운 불빛 아래 핑크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빛났다.

낯선 여자의 결혼반지를 자신이 들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타협하듯, 반지를 센터 콘솔 위에 대충 던져 놓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할머니가 저를 이렇게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난 몰라. 이 반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억 단위는 될 거야. 그러니까 반드시 그 아가씨를 찾아서 돌려줘야 해. 알겠어?"

"네, 여왕님."

남자는 대답하며 센터 콘솔에 놓인 반지를 흘깃 쳐다보았다. '귀찮아 죽겠네.'

한편, 택시에 올라탄 윤서진은 두 시간 전에 강태준이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여보, 오늘 저녁에 일이 있어서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일찍 자.]

윤서진은 답장하지 않았다. 강태준과의 대화창을 상단 고정에서 해제하고, 애칭도 바꾸었다.

집에 돌아온 그녀가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맞이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침실 문을 여는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침실에는 꽃이 가득 놓여 있었고, 장미 꽃잎이 바닥에서부터 침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실크 침구를 갈아 끼웠다. 꽃잎이 가득 뿌려진 침실은 따뜻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윤서진이 준비해 둔 첫날밤은 그저 우스운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로 달려가 꽃잎과 함께 침대 시트를 뒤집어버렸다.

다음 날, 윤서진은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자, 김나연이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윤서진이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끌어안은 김나연은 이를 악물고 욕을 퍼부었다.

"강태준 그 개자식! 재벌도 되기 전에 쓰레기부터 되려고 작정했나 봐! 한쪽엔 첫사랑 숨겨두고, 한쪽엔 대체품까지 키우면서 겉으로는 가정적인 남자인 척, 사랑꾼인 척은 다 하고 있네. 연기 하나는 진짜 끝내준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이런 음침한 인간이 돌아다니면서 사람 인생 망치고 다니는 거야. 내 남은 인생 동안 그놈을 위해 기도할 거야.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이 끝까지 망해서, 마지막엔 아무것도 못 쥐고 나가떨어지라고."

김나연은 신이 난 듯 욕을 쏟아냈다.

윤서진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물 한 잔을 건넸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윤서진의 초췌한 얼굴과 짙은 다크서클을 본 김나연은 입을 다물었다가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진이야…"

"괜찮아? 뭐 알아냈어? 나도 좀 보자." 윤서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김나연의 손에서 사진을 건네받았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자 숨이 막혔다.

강태준은 이지현을 회사 근처 라온 빌라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는 대놓고 이지현과 함께 쇼핑을 하고, 손을 잡은 채 라온 빌라로 돌아갔다.

노을이 깔린 저녁빛 속에서, 이지현은 두 다리를 강태준의 허리에 감은 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그의 품에 매달려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현이 SNS에 올린 명품 가방은, 강태준이 윤서진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그리고 최근 게시물에는 여자의 손목에 다이아몬드 팔찌가 걸려 있었고,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의 사랑은 다이아몬드 속에 숨겨져 있고, 그의 마음은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윤서진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눈이 따가웠다.

아직 미련이 남은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이 아직 아물지 않았고, 예전에 잘못된 사람을 사랑한 자신이 안타까웠다.

사랑에 눈이 멀면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걸, 윤서진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김나연은 윤서진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아직 그 자식이랑 잠자리까지 가진 건 아니잖아. 아니었으면 산부인과 검사도 받아야 했을 거야. 검사 결과가 괜찮다고 해도, 평생 찝찝했을 테니까."

윤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난 아직 운이 좋은 편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갔다가, 두 개의 큰 가방을 들고 내려와 김나연의 발밑에 던졌다.

"이거 다 팔아줘. 그리고 그 돈으로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생이랑 대학생들 후원해 줘."

이것들은 지난 몇 년 동안 강태준이 윤서진에게 준 선물이었다.

옷과 가방, 향수, 시계, 보석류를 정리하던 중 윤서진은 그것들이 전부 돈만 있으면 쉽게 살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안에는 어떤 진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그녀에게 가장 소중했지만, 이제는 그 남자조차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게 됐다. 그가 준 물건을 굳이 남겨 둘 이유가 있을까? 다른 여자들과 똑같은 걸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김나연은 윤서진과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지금은 친구 두 명과 함께 작은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스토킹, 불륜 현장 확인, 여자친구 대행, 구매 대행, 연예인 스토킹, 반려견 산책 대행… 돈만 주면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맡는다.

김나연은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끌어오며 손가락을 튕겼다. "내가 가난하지만 성실한 남 고등학생이랑 남 대학생으로 잘 골라 줄게. 강태준도 똑같이 당해 봐야지."

후원과 지원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윤서진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필요한 사람들한테 쓰면 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여자들이 모두 이지현 같은 건 아니니까. 강태준이 뭐라고? 그가 쓰레기라고 해서, 나까지 쓰레기가 될 순 없잖아."

김나연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강태준을 몇 번이나 욕했다. '이렇게 좋은 윤서진을 놓치다니… 다시는 못 찾을 텐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개자식 회사 지금 한창 성장 중이잖아. 강태준 같은 신흥 재벌은 명예랑 신용이 중요해. 아내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이미지를 절대 무너뜨릴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쉽게 이혼하지 않을지도 몰라…"

게다가 김나연은 강태준의 성격이 꽤 집요하고 극단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윤서진에게 완전히 감정이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던 윤서진은 언제든지 이사할 수 있도록 짐을 정리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녀에게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남겨 주었다. 윤서진은 이혼 신고를 마치면 그곳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

해 질 무렵,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고, 그때 강태준이 돌아와 그녀를 데리러 왔다. 백씨 가문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그녀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거울 속의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 진이, 진짜 예쁘다."

윤서진은 속눈썹을 가볍게 떨고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강태준, 당신 정말 저를 사랑해요?"

강태준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이래?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 조금만 지나면 휴가 낼 수 있어. 그때 결혼식도 다시 하고, 신혼여행도 다녀오자. 너 프라하 가고 싶다 했잖아?"

윤서진은 몸을 뒤로 젖히며 그의 품을 피하고 말했다. "괜찮아요. 만약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이혼해도 돼요. 강 사모님의 자리는 제가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지 13년이 지났다. 사랑이 없어도 적어도 남은 정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윤서진은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기회를 주고, 두 사람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태준은 갑자기 그녀의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미간을 찌푸린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혼?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 내 인생에 이혼은 없어. 오직 사별뿐이야."

그 '사별'이라는 말은 마치 천둥처럼 윤서진의 귀를 때렸다.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졌고,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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