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친구가 강태준이 어떤 여자와 다정하게 호텔을 드나드는 걸 봤다고 했지만, 윤서진은 그저 친구가 잘못 본 거라며 웃어넘겼다.

강태준이 바람을 피울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로, 무려 13년을 함께해 왔고 그만큼 감정도 깊었다.

지난달 생일 때만 해도 강태준은 해성에서 가장 큰 옥외 전광판을 통째로 빌려 온 세상에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성대하게 축하해 주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이미 아이를 갖기 위해 임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윤서진은 마침내 임신 준비 검사 합격 결과지를 받아 들었다. 가장 먼저 이 기쁜 소식을 강태준과 나누기 위해 곧장 회사로 달려왔다.

최상층으로 바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오셨어요? 예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눈앞의 여자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사랑스럽고 발랄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목구비 어딘가가 묘하게 낯익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윤서진의 앞을 막아섰고, 살짝 제멋대로인 기색이 묻어났다.

"지현 씨, 이분은 윤 대표님이자 사모님이세요. 어서 사모님께 사과드리세요."

강태준의 비서인 김현우가 재빨리 다가와 여자를 떼어놓자, 여자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윤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현이라고 합니다. 강 대표님께서 후원해 주시는 대학생인데, 감사하게도 대표님 곁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주셨어요. 방금은 방문 예약 안내를 받지 못해서 규정대로 처리하다 보니 대표님을 막게 됐는데,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녀는 무고한 눈빛을 지었지만, 말 속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숨어 있었다.

윤서진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손에 시선이 멎었다. "네일 컬러가 예쁘네요."

차분한 블루 톤에 잔잔한 펄이 들어간 색이었다. 어제 강태준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남아 있던 색과 완전히 같았다.

어젯밤 함께 저녁을 준비하던 중 그걸 보고 물었을 때, 그는 잉크가 묻은 거라며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지현은 황급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윤서진은 그녀의 귓가 아래 새하얀 목덜미에 아주 진한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장자리에는 이 자국으로 인한 멍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연애한 지 4년이라, 윤서진은 강태준의 작은 버릇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밤, 그는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그녀의 귓가에 깊게 입을 맞추고, 욕망을 억누르며 참기 힘들다는 듯 낮게 속삭였다.

"여보, 도대체 언제쯤 준비되는 거야? 정말 원해… 이제 진짜 못 참겠어."

윤서진은 지난 몇 년간 몸이 많이 상해 있었고, 자궁에도 큰 손상을 입은 적이 있어 당장 임신이 어려운 상태였다.

게다가 강태준은 콘돔 알레르기가 있었고, 일까지 바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끝까지 관계를 이어 가지 못한 채 지내왔다.

매번 강태준이 욕구를 참으며 찬물로 샤워하러 갈 때마다, 윤서진은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동시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강태준이 아이를 갖자고 제안하며 그녀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몸조리에 전념하라고 했을 때, 윤서진은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지난 6개월 동안 윤서진은 쓴 약을 마시며 몸을 추스르면서도, 마음속에는 달콤한 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 그녀는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란제리까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미리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강태준은 그녀를 위해 참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미 밖에서 다른 방법으로 욕구를 풀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에게서 들은 그 말,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이 마치 따귀처럼 윤서진의 뺨을 세게 때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서 있었다.

"윤 대표님, 강 대표님께서는 지금 백 도련님과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 보시죠."

윤서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김현우는 이미 못마땅한 표정의 이지현을 끌고 자리를 떠난 뒤였다.

윤서진은 한 걸음씩 대표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사무실 문을 밀어 열자, 문틈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역으로 쓰는 건 그렇다 쳐도, 옆에 두고 지내는 건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서진이한테 들켜서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백준서의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서진의 발은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에 한기가 퍼지며 이가 부딪혀 달달 떨렸다.

강태준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심지어 자신의 친 오빠까지 알고 있었다.

"걱정 마, 준서 형. 진이는 나 완전히 믿어. 날 그렇게 사랑하고, 또 순해서 나 없으면 못 살아. 문제 될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거야. 게다가 진이가 지금은 집에서 임신 준비에만 신경 쓰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도 없어."

강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매력적이었지만, 그 말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말투는 마치 독침처럼 문을 뚫고 윤서진의 심장에 날아와 박혔고, 한 마디 한 마디가 피를 흘리게 하는 듯했다.

"그렇지 뭐. 예전에 채영이가 사람 시켜서 서진이 처리하려고 했을 때, 칼에 두 번이나 찔려서 자궁까지 잃을 뻔했잖아. 해성에서 걔가 애 못 낳는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돌봐주지 않았으면, 무릎까지 꿇고 청혼하고 해외로 데리고 나가 달래주지 않았으면 우리가 채영이 뒷수습할 시간이나 있었겠어? 만약 채영이가 그 일로 감옥이라도 갔으면 인생 망칠 뻔했지. 그래도 너, 채영이한테는 나름 진심이긴 하다. 근데 채영이는 성격 알잖아. 눈에 흙 들어가는 꼴 못 보는 타입이라, 서진이처럼 다 받아주는 애랑은 달라. 자기랑 비슷한 여자 옆에 두는 건 절대 못 참을걸!"

"그냥 잠깐 데리고 노는 거야. 채영이 돌아오면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네가 알아서 한다니까 다행이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윤서진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고, 발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녀의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쥐인 듯 짓눌리고 내동댕이쳐져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허리까지 힘이 빠져 그대로 몸이 굽어졌다.

윤서진은 백씨 가문의 딸이었지만, 17살이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얌전하게 굴고 살갑게 굴며 비위를 맞추려 노력해도, 부모와 두 오빠의 마음은 늘 가짜 딸인 백채영에게만 향해 있었다.

다행히 할머니만은 그녀를 아껴주셨다.

18번째 생일에 할머니는 백씨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옥팔찌를 윤서진에게 건넸다. 그러자 백채영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울고불고 난리를 쳤고, 결국 부모는 백채영에게 100억 원짜리 호화 별장을 사주며 달래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서진은 밤길에 귀가하던 중 깡패 몇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그녀를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칼에 두 번이나 찔렸다.

온몸이 피로 젖었고, 겁에 질린 그들은 그대로 도망쳤다. 그녀는 피를 흘린 채 골목 밖으로 기어 나와 도움을 청했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자궁을 잃을 뻔할 만큼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 사건은 뉴스에까지 보도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들었어? 백씨 가문 진짜 딸이 윤간당했대. 자궁까지 망가져서 들어냈다던데!"

"세상에, 그럼 이제 애도 못 갖는 거 아니야? 원래도 천박하기 짝이 없어서 가짜 딸이랑 비교도 안 됐는데, 이젠 백씨 가문 골칫덩이가 돼서 시집도 못 가겠네."

"대체 남자 몇 명한테 당한 거야? 나였으면 아마 얼굴도 들지 못했을 거야."

악의적인 소문과 조롱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 힘든 시기에 윤서진의 곁을 지키고 돌봐준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강태준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할 때, 그는 온 세상의 시선을 감수하며 그녀에게 고백했다. 심지어 성대한 프러포즈까지 준비해, 18살이 된 그녀에게 청혼했다.

강태준은 윤서진을 데리고 여행하며 다정하게 곁을 지켜주었다.

어릴 적 그녀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해 준 것도 강태준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늘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원래부터 그를 짝사랑하고 있던 그녀는, 그의 고백과 따뜻한 배려에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빠져들었고, 백씨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진 것 하나 없던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강태준과 함께 창업하고, 지하실에서 생활하던 시간도 견뎌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두렵지 않았다. 2년 후, 두 사람은 예정대로 혼인 신고를 했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세심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신혼처럼 애정이 넘쳤고, 함께 임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윤서진은 강태준이 자신의 빛이자 구원이었고, 아름다운 꿈이며,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보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태준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 결국 백채영이었다는 사실을 끝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쩐지 이지현을 처음 봤을 때 어딘가 낯익다고 느꼈다. 딱 백채영의 그 여리고 청초한 모습과 절반쯤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강태준의 고백과 청혼, 그리고 결혼은 모두 백채영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를 위해 헌신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윤서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 참 대단한 사랑이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뭐였지? 그들의 사랑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을까? 아니면 여동생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걸까? 내가 이 아름다운 꿈을 만들어 준 그들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누구야?" 사무실 안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강태준은 칠흑처럼 어두운 눈빛으로 살짝 열린 문을 바라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긴 다리를 성큼 내딛으며 온몸에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사무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묵직한 문을 힘 있게 열어젖힌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하지만 문밖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릴 때, 김현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방금 누가 왔었어?" 강태준의 눈빛은 사람을 꿰뚫을 듯 날카로웠다.

김현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지만, 감히 숨길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강 대표님, 방금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지현 씨와 마주치셨는데, 조금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대표님은 사모님을 못 뵈셨습니까?"

"윤서진이 왔다고요?" 백준서도 다가오며 표정이 굳어졌다.

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에서 문득 낯선 불안감이 솟구쳤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김현우를 쏘아보았다.

"지금 당장 CCTV 확인해 봐."

회차 2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서진이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테라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의 눈빛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강태준과 백준서는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진이 가족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면, 이렇게 태연할 리 없었다. 아마 눈물을 흘리며 소란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강태준은 옅게 웃으며 그녀의 가방을 건네받았다. "별일 아니야. 왔으면 그냥 들어오지, 왜 밖에 있었어?"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에, 짙은 회색 맞춤 정장이 길고 늘씬한 몸을 감싸며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진 테크는 최근 몇 년 사이 빠르게 성장해 시가총액이 이미 2조 원을 돌파했고, 강태준은 아직 스물일곱도 되지 않은 나이에 해성 IT 업계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그의 온몸에서는 성공한 남자의 여유와 매력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그가 조금만 태도를 낮추고 다정한 기색을 보이면, 여자 하나쯤은 쉽게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윤서진의 손이 차갑게 떨리는 것을 강태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윤서진, 이런 가식적인 감정… 대체 왜 붙잡고 있는 거야? 이제 그만 정신 차려야지.'

윤서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화가 와서 당신 일에 방해될까 봐 테라스에서 받았어요."

그 말에 강태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백준서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꾸짖었다. "전업주부로 지내기로 했으면 회사에 자주 오지 마. 꼭 와야겠으면 미리 전화로 약속을 잡아야지. 안 그러면 태준이 일에 방해되잖아. 일 처리도 왜 이렇게 허술해? 네 언니는 이런 적 없거든."

만약 백채영이 회사에 찾아왔다면, 그들은 놀라움이 아닌 반가움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백채영은 무엇을 해도 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테고.

윤서진은 속으로 비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 대답에 백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전 같았으면 윤서진은 내 말에 따지거나, 어떻게든 채영보다 뒤처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려 했을 텐데… 오늘은 왜 이렇게 얌전하지?'

그녀의 순종적인 태도에 백준서는 묘하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윤서진의 늘 촌스럽고 품위 없어 보이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백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요즘 너희 집에도 잘 안 들어오지? 내일 같이 들어와서 저녁 먹자. 마침 부모님도 상의할 게 있다고 하셔."

강태준은 곧바로 대답했다. "알았어, 진이 데리고 같이 들어갈게."

백준서는 더 이상 윤서진을 보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강태준은 윤서진을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돌아서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회사에 왔어? 나 보고 싶었어?"

익숙한 삼나무 향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윤서진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그가 들고 있는 가방을 내려다봤다.

가방 안에는 아직 임신 준비 검사 결과지가 들어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꺼낼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거부하는 듯한 몸짓을 눈치챈 강태준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왜 그래?"

윤서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봤다. 순간, 그의 그 가식적인 태도를 한 번에 무너뜨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윤서진은 이혼할 것이고, 백씨 가문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백채영이 사람을 시켜 자신을 해치게 한 증거도 반드시 찾아낼 생각이었다. 비록 늦었지만…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제가… 정말 백채영보다 하나도 못한 건가요?"

강태준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신경 쓰고 있는 게 그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톡 쳤다. "넌 굳이 채영이랑 비교할 필요 없어."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녀가 백채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못난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그녀가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윤서진은 후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강태준이 전자의 의미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말재주가 좋은 사람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지현이 커피 두 잔을 손에 들고 들어왔다.

윤서진은 강태준의 품에서 벗어나 소파에 앉았다.

이지현이 커피 한 잔을 윤서진 앞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머지 한 잔을 들고 강태준 앞에 섰다.

"강 대표님, 커피 나왔습니다."

강태준이 커피를 건네받을 때, 이지현은 그의 손바닥을 가볍게 긁었다.

"이 비서가 맞죠?" 윤서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지현은 몸이 굳어났고, 강태준은 커피잔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윤서진은 싱긋 미소 지었다.

"커피 말고 주스로 바꿔주세요. 임신 준비 중이라 한약을 먹고 있어서 커피는 마시지 않는 게 좋아요. 왜 갑자기 긴장하는 거예요?"

강태준은 바로 이지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주스로 바꿔와."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이지현을 향해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

이지현은 입술을 꼭 깨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바로 바꿔오겠습니다."

그녀는 커피잔을 들고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윤서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강태준의 큰 몸이 시야를 가릴 때까지.

그녀는 싱긋 미소 지었다.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못 내리는 인턴을, 강 대표님은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하게 대하게 된 거예요?"

그 말에 강태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저 여자들 사이의 질투일 뿐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소파 등받이에 기대더니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질투하는 거야? 그저 후원하던 학생이 인턴으로 온 것뿐이야.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아직 나이가 어린다고?' 강태준은 그녀가 올해 겨우 스물두 살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부터 그의 곁에서 그를 도왔고, 그를 위해 온갖 어려움을 헤쳐왔다.

그때 유진 테크는 1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팀이었다.

윤서진은 그의 비서로 시작해 수많은 일을 겪으며 성장했고, 퇴사하기 전에는 홍보부 부장 자리까지 올랐다.

한번은 그녀가 고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숨어서 울고 있을 때, 강태준은 그녀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윤서진, 네가 일찍 사회에 나가기로 했으면 그만큼 온갖 어려움도 감수해야지. 아무도 네 실수나 나쁜 감정까지 다 받아주지 않아."

그때는 그 말이 자신을 위한 엄격함이고, 더 잘하라는 뜻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강태준은 원래 다정한 사람이었고, 단지… 그 다정함이 자신에게는 향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건물을 나온 윤서진은 온몸의 힘이 빠진 듯 길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성을 잃을 만큼 부서진 마음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었고, 노을마저 사라지자, 차가운 바람에 가을비가 실려왔다.

떨어진 낙엽은 오가는 차에 밟혀 진흙 속에 짓이겨졌고, 그 모습은 마치 그녀가 붙잡고 있던 사랑과 가족을 닮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윤서진의 떨리는 몸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휴대폰을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됐지만, 윤서진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서진아? 나야." 그때, 낯설면서도 익숙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서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선배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드려 죄송해요. eVTOL 프로젝트 연구… 저, 다시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여쭤보려고요."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답을 기다렸다. 뺨은 달아올랐고, 자신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15살에 A대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항공우주공학 전공의 천재 소녀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3학년 때, 다중 센서 기반 융합 장애물 회피 기술에서 성과를 내며 데이터 융합 알고리즘을 통해 드론의 장애물 회피 정확도와 신뢰성을 크게 끌어올렸다.

윤서진은 이 기술을 화재 정찰 및 감시에 적용하여 당시 매우 진보된 수색 및 구조 드론을 설계했고, 교수들은 그녀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교수는 그녀를 위해 특허를 신청했을 뿐만 아니라, 석·박사 과정까지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제자로서 밝은 미래가 보장돼 있었다.

윤서진은 해당 특허를 국가에 기증했고, 당시 그녀는 교수의 가장 자랑스러운 학생이었다. 그녀는 선배들과 함께 오유 테크를 설립해 경량 항공 촬영을 주력으로 사업을 전개했고,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4년 전, 그녀는 꿈과 학업, 그리고 사업까지 모두 포기하고 강태준의 비서가 되었다.

교수는 윤서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2년 전, 그는 직접 서성에서 해성까지 날아와 그녀를 eVTOL 프로젝트 연구실로 초대했지만, 그녀는 끝내 다시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후회하고 있었다. 아주 많이.

입술을 세게 깨문 채, 그녀는 선배의 열정적이고 거리낌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네가 돌아오기만 하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언제 올 거야? 지금 당장 비행기표 끊어 줄까? 내일은 너무 급한가?"

윤서진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교수님은…"

"아, 교수님 성격 아직도 몰라? 일단 해성으로 와. 교수님 놀라게 해 드리자. 내가 장담하는데, 교수님은 너 보면 화 다 풀리실걸. 그래도 안 되면 네가 직접 밥 한 끼 해 드려. 한 끼로 안 되면 두 끼면 되지."

윤서진은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매일 밥해 드릴 수 있어요. 선배, 제가 여기 정리할 일이 있어서 한 달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기다릴게."

"선배님, 고마워요."

통화를 마친 윤서진은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달 안에 그녀는 이혼을 하고, 이 도시를 떠나, 자신의 꽃길을 다시 걸어갈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그때, 검은색 벤틀리가 윤서진의 곁을 지나갔다.

뒤쪽 차창이 반쯤 열린 차 안에서, 젊은 여자가 몸을 비틀듯 남자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열정적으로 키스하는 모습이 보였다.

회차 3

만약 강태준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면, 길가에 앉아 비를 맞고 있는 윤서진의 무표정한 얼굴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젊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새로운 자극에 빠진 그는, 자신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듯했다.

윤서진은 강태준의 차가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방에서 임신 준비 검사지를 꺼낸 그녀는 종이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번화한 도심 중심가도 어느새 한산해졌다.

길 모퉁이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빗방울에 젖어 있었고, 발밑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사랑이 무슨 소용일까?

윤서진은 결혼반지를 빼서 할머니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을 잡아 반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조용히 쥐여 주었다.

"비 오니까, 얼른 집에 돌아가세요."

할머니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고, 윤서진은 더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2분 후,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길 모퉁이에 멈춰 서더니 운전석 문이 열렸다.

남자가 반짝이는 구두를 바닥에 디디자 정장 바지가 위로 살짝 올라가며 검은 정장 양말에 감싸인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났다.

그는 차에서 내려 단정한 체구로 검은 우산을 펼쳤다. 성큼성큼 인도로 올라서며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니는 서둘러 잘못을 인정했다. "훈이야, 화내지 마라. 나도 비 올 줄은 몰랐어. 할머니 몸은 튼튼해서 비 좀 맞아도 괜찮아…"

그녀가 음악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기사가 실수로 꽃을 팔던 어린 아가씨를 치는 사고가 났다.

운전기사가 아가씨를 병원에 데려다주는 동안, 그녀는 회사와 가까운 길가에서 일밖에 모르는 손자가 자신을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의 차가운 얼굴에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반지를 내밀었다.

"방금 어떤 아가씨가 오해를 해서, 반지까지 빼서 나한테 쥐여 주고 갔어.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벌써 멀리 가 버렸단 말이야. 빨리 가서 돌려줘! 저기, 저쪽으로 간 그 아가씨야." 그녀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할머니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본 한지훈은 네온사인에 가려진 가녀린 그림자만 겨우 볼 수 있었다.

"일단 차에 타세요."

할머니를 차에 태운 그는 차 안의 온도를 높이고 담요를 건넨 뒤, 할머니의 재촉에 문을 닫고 그 여자를 쫓아갔다.

남자가 걸음을 재촉하자, 멀리 떨어진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비 내리는 길을 천천히 걷는 여자의 톤 다운된 블루 트렌치코트는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고, 잘록한 허리선이 더 도드라지며 한층 더 가녀려 보였다.

곧게 편 등에는 묘한 고집이 배어 있었고, 어딘가 세상과 거리를 둔 듯한 차가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말 못 할 사연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렇게 모퉁이에서 사라졌다.

한지훈이 걸음을 재촉했지만, 모퉁이를 돌자 여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거리,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친 그림자가 그 여자가 정말 존재했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한지훈이 차로 돌아오자, 할머니는 곧바로 물었다.

"놓쳤어요."

"항공사 일까지 맡아서 기장으로 비행기까지 모는 사람이, 어떻게 아가씨 하나도 못 따라잡냐?"

"할머니,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조용히 해. 너 정말 나 실망시키는구나. 그 아가씨, 얼마나 예쁘고 또 착한지 몰라! 네가 한 5분만 일찍 왔어 봐라, 어쩌면 벌써 내 손주며느리였을지도 몰라!"

"그 아가씨가 이미 결혼했어요." 한지훈은 반지를 할머니에게 돌려주려 내밀었다. 겉보기에는 결혼반지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받지 않고 다시 밀어냈다.

"결혼했으면 뭐 어때? 반지까지 빼놨다는 건 무슨 뜻이겠어? 네가 틈을 타서 들어가면 돼."

한지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반지를 돌리자, 어두운 불빛 아래 핑크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빛났다.

낯선 여자의 결혼반지를 자신이 들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타협하듯, 반지를 센터 콘솔 위에 대충 던져 놓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할머니가 저를 이렇게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난 몰라. 이 반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억 단위는 될 거야. 그러니까 반드시 그 아가씨를 찾아서 돌려줘야 해. 알겠어?"

"네, 여왕님."

남자는 대답하며 센터 콘솔에 놓인 반지를 흘깃 쳐다보았다. '귀찮아 죽겠네.'

한편, 택시에 올라탄 윤서진은 두 시간 전에 강태준이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여보, 오늘 저녁에 일이 있어서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 일찍 자.]

윤서진은 답장하지 않았다. 강태준과의 대화창을 상단 고정에서 해제하고, 애칭도 바꾸었다.

집에 돌아온 그녀가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맞이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침실 문을 여는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침실에는 꽃이 가득 놓여 있었고, 장미 꽃잎이 바닥에서부터 침대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가장 좋아하는 노란색 실크 침구를 갈아 끼웠다. 꽃잎이 가득 뿌려진 침실은 따뜻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윤서진이 준비해 둔 첫날밤은 그저 우스운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로 달려가 꽃잎과 함께 침대 시트를 뒤집어버렸다.

다음 날, 윤서진은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자, 김나연이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윤서진이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끌어안은 김나연은 이를 악물고 욕을 퍼부었다.

"강태준 그 개자식! 재벌도 되기 전에 쓰레기부터 되려고 작정했나 봐! 한쪽엔 첫사랑 숨겨두고, 한쪽엔 대체품까지 키우면서 겉으로는 가정적인 남자인 척, 사랑꾼인 척은 다 하고 있네. 연기 하나는 진짜 끝내준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이런 음침한 인간이 돌아다니면서 사람 인생 망치고 다니는 거야. 내 남은 인생 동안 그놈을 위해 기도할 거야.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이 끝까지 망해서, 마지막엔 아무것도 못 쥐고 나가떨어지라고."

김나연은 신이 난 듯 욕을 쏟아냈다.

윤서진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물 한 잔을 건넸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윤서진의 초췌한 얼굴과 짙은 다크서클을 본 김나연은 입을 다물었다가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진이야…"

"괜찮아? 뭐 알아냈어? 나도 좀 보자." 윤서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김나연의 손에서 사진을 건네받았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자 숨이 막혔다.

강태준은 이지현을 회사 근처 라온 빌라에 숨겨두고 있었다.

그는 대놓고 이지현과 함께 쇼핑을 하고, 손을 잡은 채 라온 빌라로 돌아갔다.

노을이 깔린 저녁빛 속에서, 이지현은 두 다리를 강태준의 허리에 감은 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그의 품에 매달려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지현이 SNS에 올린 명품 가방은, 강태준이 윤서진에게 선물했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그리고 최근 게시물에는 여자의 손목에 다이아몬드 팔찌가 걸려 있었고,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의 사랑은 다이아몬드 속에 숨겨져 있고, 그의 마음은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윤서진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눈이 따가웠다.

아직 미련이 남은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이 아직 아물지 않았고, 예전에 잘못된 사람을 사랑한 자신이 안타까웠다.

사랑에 눈이 멀면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걸, 윤서진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김나연은 윤서진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아직 그 자식이랑 잠자리까지 가진 건 아니잖아. 아니었으면 산부인과 검사도 받아야 했을 거야. 검사 결과가 괜찮다고 해도, 평생 찝찝했을 테니까."

윤서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난 아직 운이 좋은 편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갔다가, 두 개의 큰 가방을 들고 내려와 김나연의 발밑에 던졌다.

"이거 다 팔아줘. 그리고 그 돈으로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생이랑 대학생들 후원해 줘."

이것들은 지난 몇 년 동안 강태준이 윤서진에게 준 선물이었다.

옷과 가방, 향수, 시계, 보석류를 정리하던 중 윤서진은 그것들이 전부 돈만 있으면 쉽게 살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안에는 어떤 진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그녀에게 가장 소중했지만, 이제는 그 남자조차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게 됐다. 그가 준 물건을 굳이 남겨 둘 이유가 있을까? 다른 여자들과 똑같은 걸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김나연은 윤서진과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지금은 친구 두 명과 함께 작은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스토킹, 불륜 현장 확인, 여자친구 대행, 구매 대행, 연예인 스토킹, 반려견 산책 대행… 돈만 주면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맡는다.

김나연은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끌어오며 손가락을 튕겼다. "내가 가난하지만 성실한 남 고등학생이랑 남 대학생으로 잘 골라 줄게. 강태준도 똑같이 당해 봐야지."

후원과 지원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윤서진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필요한 사람들한테 쓰면 돼.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여자들이 모두 이지현 같은 건 아니니까. 강태준이 뭐라고? 그가 쓰레기라고 해서, 나까지 쓰레기가 될 순 없잖아."

김나연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강태준을 몇 번이나 욕했다. '이렇게 좋은 윤서진을 놓치다니… 다시는 못 찾을 텐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개자식 회사 지금 한창 성장 중이잖아. 강태준 같은 신흥 재벌은 명예랑 신용이 중요해. 아내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이미지를 절대 무너뜨릴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쉽게 이혼하지 않을지도 몰라…"

게다가 김나연은 강태준의 성격이 꽤 집요하고 극단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윤서진에게 완전히 감정이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던 윤서진은 언제든지 이사할 수 있도록 짐을 정리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녀에게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남겨 주었다. 윤서진은 이혼 신고를 마치면 그곳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

해 질 무렵,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고, 그때 강태준이 돌아와 그녀를 데리러 왔다. 백씨 가문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그녀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거울 속의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우리 진이, 진짜 예쁘다."

윤서진은 속눈썹을 가볍게 떨고 몸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강태준, 당신 정말 저를 사랑해요?"

강태준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이래?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 조금만 지나면 휴가 낼 수 있어. 그때 결혼식도 다시 하고, 신혼여행도 다녀오자. 너 프라하 가고 싶다 했잖아?"

윤서진은 몸을 뒤로 젖히며 그의 품을 피하고 말했다. "괜찮아요. 만약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 이혼해도 돼요. 강 사모님의 자리는 제가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지 13년이 지났다. 사랑이 없어도 적어도 남은 정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윤서진은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기회를 주고, 두 사람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태준은 갑자기 그녀의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미간을 찌푸린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혼?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 내 인생에 이혼은 없어. 오직 사별뿐이야."

그 '사별'이라는 말은 마치 천둥처럼 윤서진의 귀를 때렸다.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졌고,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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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도장 찍자마자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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