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어느새 하늘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유소월은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꺼진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송이동은 그녀가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 있다.
밤도 점점 깊어지고 있는데, 왜 아직까지 아무 소식도 없는 걸까? 설마 오늘도 그녀와 밤을 보내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어제 밤새 그녀를 괴롭힌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걸까?
유소월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불안감에 그러지 못했다.
성세 그룹은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회사였고, 인턴으로 채용된 것조차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상사인 송이동을 화나게 하는 것은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쪼그리고 앉은 유소월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형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려 했다.
결국 그녀는 현실에 타협해야만 했다. 그녀가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선택은 오로지 송이동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최악인 것은, 어젯밤 유소월이 먼저 술에 취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기에, 그녀가 경찰에 신고한다 해도 누가 그녀의 편에 서 주겠는가?
유소월이 넋이 나간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시계는 어느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텅 빈 로비에 무거운 발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왜 아직도 불이 켜져 있지? 설마 이 시간에 회사에 사람이 있는 걸까?" 동시에 송이동의 여유로우면서도 특유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소월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송 본부장님, 드디어 오셨네요."
송이동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물었다. "날 기다렸어요?"
'알면서 왜 모른척이지?'
유소월이 화를 억누르고 정중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송이동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방금 무슨 말을 중얼거렸어요?"
송이동은 인턴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예쁘게 생긴 유소월을 처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다. 그러나 차도녀에 가까운 그녀의 차가운 매력에 줄곧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을 뿐더러, 그의 유혹에 조금도 넘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워크숍이 끝나자마자 왜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고 회사에 남아 있는 걸까?
"형법을 외우고 있었어요." 입술을 꼭 깨물고 딱딱하게 말을 뱉은 유소월은 당장이라도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송이동은 평소 여직원들에게 무척 친절한 상사인데, 유소월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유소월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는 동안, 복도 끝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얼굴을 하고 벽에 기대 서 있는 안성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조명 아래 큰 키와 특유의 오만한 얼굴에 선명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섬세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입가에 번진 거만한 미소에도 매력이 흐려지지 않았고 조각 같이 잘생긴 얼굴을 유지했다.
유소월은 심장이 그대로 철렁 내려앉은 듯했다. 안성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이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에 남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한 단계 승화된 것 같았다.
송이동은 유소월이 안성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회사에서 가까이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냉 미녀 유소월조차 그의 사촌 형님 안성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니. 형님의 잘생긴 얼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이동의 콧방귀 소리에 유소월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회사의 최고권력자 안성주의 잘생긴 얼굴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마치 사춘기 소녀라도 된 것처럼 뻔뻔하게 안성주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잘리고 싶어 환장한 걸까?
유소월은 우선 송이동의 손에서 그녀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송 본부장님, 어젯밤에..."
유소월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안성주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공기를 가로질러 들려왔다. "송이동, 주차장에서 차 빼 와."
송이동은 안성주가 전문 기사를 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캐묻지 못했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갈 뿐이다.
텅 빈 로비에 안성주와 단둘이 남게 된 유소월은 긴장감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안성주의 차가운 표정을 발견한 유소월은 그가 자신과 송이동의 실수를 알아차렸을지 궁금했다.
그때,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송이동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자 친구의 호출에 그는 안성주와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르게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안성주는 송이동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로비에 홀로 남게 된 유소월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제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나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성주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유소월이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유소월이 자리에서 돌아서기도 전에, 안성주가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집에 어떻게 가지?"
유소월은 애써 차분하게 대답하려 했다. "저는 버스 타고 가면 됩니다."
안성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유소월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고개까지 흔들었다. 회사 대표가 인턴을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버스 타면 바로예요."
자신의 거절에 대답도 하지 않고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안성주의 눈빛에 유소월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 더 거절할 수 없었던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성주와 제일 멀리 떨어진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차에 앉기도 전에, 안성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차가 택시인 것 같아?"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말투 속에 숨겨진 분노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말에 유소월은 바로 뒷좌석 차 문을 닫고 조수석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맸다.
집으로 가는 동안 유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성주는 굳은 얼굴로 운전에만 집중했다.
긴장감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가 가방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마디마저 하얗게 질려 통제할 수 없이 떨렸다.
안성주와 나눈 몇 마디 대화 속에서 유소월은 그가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분도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마치 폭풍우의 구름과 같았다.
유소월은 앞으로 그와 더욱 거리를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섰을 때, 안성주는 뭔가 할 말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유소월이 차에서 내릴 때까지 안성주의 얼굴에는 차가우면서도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
유소월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안성주에게 집까지 태워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왜 이렇게까지 그녀를 싫어하는 걸까?
하지만 그 불안감도 얼마 가지 못하고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소월의 전 남자 친구, 조지환이 그녀의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