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그녀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강준형이 계속해서 말했다. "한 대표님께서 임세빈 씨가 스포츠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상으로 60억을 더..."
"필요 없어요." 임세빈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인 강준형이 눈을 껌벅거리며 되물었다. "네? 혹시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요?"
임세빈은 말없이 가방에서 카드 홀더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에 그간 도혁 씨가 준 카드들이 모두 들어 있어요. 사용한 적 없으니 이대로 돌려주면 될 거예요. 보상은..." 예의 바르게 미소 지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보상은 필요 없어요."
강준형은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해당 서류들은 한 대표님께서 직접 변호사를 만나 작성한 것이니 숨겨진 조항이나 불리한 조건은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한 대표님께서 다시 돌려받으실 분도 아니고, 마음 편하게 받으세요..."
결국 한도혁의 비서조차 그녀가 돈에 눈이 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림상각 빌라 비밀번호는 0921이에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임세빈은 강준형과 의미 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오늘 저녁 8시까지 제 물건들 모두 챙겨서 나올 거예요. 강 비서님께서 시간 맞춰 직접 확인하면 될 것 같네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 홀더를 한참이나 가만히 내려다본 강준형은 결국 은행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다는 말씀이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확답에 강준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3년 전,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한도혁과 밤을 보내고 보상으로 10억 원을 챙긴 여자가 임세빈이 아니란 말인가?
한참을 망설인 강준형은 결국 서류를 챙겨 들고 곧장 회사로 향했다.
한도혁의 집무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은 그가 임세빈의 말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결제 서류에 사인하던 한도혁의 손이 멈칫하더니 무감한 눈빛으로 카드 홀더를 흘깃 쳐다봤다. "내가 준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강준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보탰다. "은행 매니저에게 연락해 봤더니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6억을 입금했다고 합니다."
한도혁의 안색이 싸늘해 지는 것을 본 강준형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 저녁 8시까지 화림상각에서 짐을 챙겨 나갈 테니 시간 맞춰 열쇠를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의 고요하고도 정적인 눈동자가 다시 결제 서류로 향했다.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보고를 들은 것처럼.
"알아서 처리해."
그 시각, 화림상각 빌라에서 짐을 챙기고 나온 임세빈은 일전에 월세로 계약했던 아파트로 돌아왔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화림상각 빌라의 안주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시간 날 때마다 아파트를 직접 청소하고 관리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이사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 6개월조차 남지 않은 시간, 그녀는 혼자만의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아무 탈 없이 조용한 밤이 그렇게 지났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임세빈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화림상각 빌라와 달리 지금 이 아파트는 그녀가 근무하는 한씨 그룹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침밥마저 거르고 집을 나섰는데, 아슬하게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컴퓨터에 미리 작성해 놓은 사직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마우스 포인터가 전송 버튼 부근에서 한참 맴돌았다.
"소문 들었어요? 오늘 회사에 어마어마한 사람이 방문한다고 해요. 부장님께 커피를 가져다 주는데, 부장님이 메이크업을 하고 있지 뭐예요!"
사직서 맨 마지막 줄을 지운 임세빈은 더 나은 표현으로 수정했다.
"정말이에요? 도도하기로 유명한 부장님의 눈에 든 남자가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잖아요. 이씨 가문 도련님의 구애에도 넘어가지 않던 부장님인데. 그런 부장님을 메이크업까지 하게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굴까요?"
"소문에 두 사람 평범한 관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씨 가문에서 계약을 빌미로 부장님을 괴롭힌다는 소식을 듣고 도와주러 온 거 아니겠어요?"
"위험에 빠진 부장님을 구하러 나타난 남자. 너무 로맨틱하잖아요. 이씨 가문 도련님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람이라니, 대체 누구일까요?"
임세빈의 바로 옆에서 동료들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박주예가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흘겨봤다.
"어떻게 그것도 몰라요?" 차갑게 코웃음 친 그녀가 말을 이어 했다. "상류층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우리 부장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남자분은..."
회차 3
마우스를 한참이나 매만진 임세빈은 메일 예약 발송 버튼을 눌렀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근처에 앉은 그녀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정장 차림에 다부진 체격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날렵한 턱선과 쭉 뻗은 콧날, 깨끗한 피부는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전날 밤에도 그녀와 새벽까지 침대에서 몸을 섞은 남자였다.
"세상에, 저 사람 한씨 그룹 후계자 한도혁 대표 아니에요?" 바로 옆에서 동료의 놀라움 섞인 탄성이 들려왔다.
한도혁이 나타난 순간, 사무실 가득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혁아!"
임세빈이 고개를 들자 평소 도도하기로 소문난 윤나율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맞이하는 것이다. 평소 시니컬하게 뒤로 하나 묶던 머리카락에는 부드러운 컬이 더해져 차가운 인상에 부드러운 매력을 더했다.
윤나율의 정교한 이목구비에 완벽한 메이크업이 더해진 것을 발견한 임세빈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마음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동그란 눈에 길게 뻗은 아이라이너는 날카로운 눈매에 매혹적인 감각을 더해 임세빈의 눈매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평소에 메이크업을 즐겨 하지 않는 윤나율은 차분한 인상에 날카로운 기운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하고 나타난 그녀는 청초하면서도 매혹적인 임세빈과 느낌이 매우 흡사했다. 두 사람에게서 비슷한 매력이 풍길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는데...
잔혹한 현실은 그녀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칠 뿐이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했다.
사무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고조 되었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나 두 사람에 관한 의논은 끊이지 않았다.
"세상에,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한씨 그룹 후계자 한도혁 대표가 직접 우리 회사까지 오다니. 우리 부장님을 정말 많이 아끼는 것 같아요!"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데."
그때, 박주예가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다들 뭘 모르고 있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박주예는 동료들에게 커피와 어깨 마사지 서비스까지 받아낸 뒤 목을 가다듬더니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부장님과 한도혁 대표는 대학 시절 모든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던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하지만 한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다들 알잖아요? 부와 명예를 모두 갖춘 한씨 가문이었기에 웬만한 재벌 가문들은 한씨 가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달 났었죠. 3년 전, 부장님이 회사 계약을 위해 해외로 떠나면서 두 사람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됐어요.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오늘 보니 아직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네요."
박주예가 하는 말을 들은 임세빈은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오는 느낌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3년 전, 윤나율이 갑작스럽게 해외로 떠나면서 그녀도 우연히 한도혁과 밤을 보내게 되었다. 3년 후, 윤나율이 회사로 돌아와 그녀의 상사가 된 것은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었다!
지난 3년 동안, 한도혁의 친절과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한 어리석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하늘이 진실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제야 그녀는 잔혹한 현실을 똑바로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윤나율을 대신해 그의 욕정을 해결해 주는 노리개에 불과했다.
"임세빈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든 임세빈은 조혜원 팀장의 찌푸려진 눈빛과 마주했다.
"세빈 씨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는데 못 들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머리가 터질 것처럼 늘어나는 복잡한 생각들을 뒤로 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최근 몸이 안 좋아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혜원은 서류 뭉치를 그녀의 손에 내던졌다.
"작은 회의실에 가서 회의 준비 해요. 세빈 씨가 맡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발표도 세빈 씨가 직접 부장님께 하는 게 좋겠어요."
멍한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본 임세빈은 바로 반박했다. "팀장님, 저는 프로젝트 디자인에만 참여했어요. 발표는 박주예 씨가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박주예 씨가?" 조혜원 팀장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소문을 퍼다 나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부장님 앞에서 발표를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