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곽도현은 정서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곧장 고개를 들었고 날카롭게 비꼬았다. "전업주부께서 우리 망해가는 꼴 구경하러 오셨나 보네? 미안한데 난 지금 너무 바빠. 너랑 잡담할 시간 없어."
곽도현이 정서윤에게 불만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가 전국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주문이 밀려들던 시절, 정서윤은 예고 없이 돌연 회사를 떠났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고, 그 뒤로 5년 동안 단 한 번도 회사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불쑥 나타난 그녀를 향해 곽도현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회사에 신경을 못 써서 미안해." 정서윤이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해서 온 거야."
곽도현의 입에서 냉소가 터져 나왔다. "아, 이제 완벽한 아내 놀이는 다 끝난 거야? 이젠 우리를 구해줄 생각이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내던졌다. "쾅"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눈빛은 탐탁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미 늦었어. 이제 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회사가 망했거든. 이제 속이 시원해?"
정서윤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현아, 네가 화난 거 다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회사를 살릴 방법을 찾는 게 먼저야."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만 가득했다. "우리 지금 파산 직전이야. 전업주부 주제에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곽도현은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
정서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고 잠시 후 정서윤이 입을 열었다. "도현아, 나 이혼했어."
곽도현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내 예상대로라면,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의 위자료를 받게 될 거야." 정서윤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을 끝맺었다. "우리 다시 회사를 살려보는 건 어때? 같이 해 볼래?"
정서윤은 곽도현에게서 받아온 서류 뭉치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방 문을 열자마자, 정서윤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자신의 침대 위에, 서민지가 최연우의 품에 안겨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정서윤의 온몸에 한기가 퍼졌다.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그러다 터져 나온 웃음은 기쁨도 즐거움도 아닌, 산산조각 난 마음에서 치밀어 오른 분노의 소리였다. '정말 주체할 수도 없을 만큼인가? 이제는 집에서 대놓고 바람까지 피우는 거야? 아니, 들킬지도 모른다는 스릴을 즐기는 건가.'
"최연우, 너도 참 대단하네. 이제 아예 집에 여자를 데려와?" 정서윤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최연우는 조심스레 서민지를 일으켜 앉히고 정서윤에게 다가왔다. "왜 말도 없이 나갔어?"
정서윤은 비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 일정이 당신이 애인을 데려오는 데 방해된 적이라도 있었어?"
최연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민지랑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야. 가족 같은 존재라고. 그게 다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정서윤은 눈을 굴리며 조롱하듯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가족이랑 잠까지 같이 자는 거야?"
최연우의 표정이 굳었다. 반박하려 했지만, 서민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서민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서민지라고 해요. 이제야 뵙네요. 사람들이 그렇게 저랑 닮았다고들 말하던데..." 그리고는 최연우를 바라봤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까는 연우가 저를 좀 도와준 것뿐이에요."
정서윤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있었다. 서민지와 악수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다. 정서윤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무슨 오해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 남편한테 들이댔다는 오해요?"
서민지는 최연우에게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최연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정서윤, 이미 상황 설명했잖아. 아무것도 아닌 걸로 괜히 소란 피우지 마."
"내가 지금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란을 피우는 거야? 서민지 씨, 당신 첫사랑이잖아." 정서윤의 표정에는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드러났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며칠 전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그동안 마음을 괴롭히던 질문을 쏟아냈다. "최연우, 너 정말 내가 서민지랑 닮았다는 이유로 결혼한 거야?"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서민지를 가리켰지만, 눈은 최연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연우는 시선을 피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더 잔인했다. 정서윤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은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겠어. 그냥 이혼해. 질질 끌어봤자 더는 의미 없잖아."
최연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진심이야? 겨우 이런 일로 이혼을 입에 올려? 왜 이렇게 철없이 구는 거야?" 그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 네가 불편하다면 민지를 다시는 안 데려올게. 그럼 됐지?"
정서윤은 대꾸 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고, 그녀의 마음도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순간, 더 이상의 말다툼은 무의미해 보였다.
최연우는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 일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이혼 얘기는 꺼내지 마."
그리고는 서민지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정서윤은 즉시 가정부에게 다른 방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과 그의 연인이 누운 침대에서 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서윤은 최연우와 연애하던 3년, 그리고 부부로서 함께한 5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시작은 단순히 그의 잘생긴 얼굴에 끌린 것부터였다.
그때 최연우는 막 첫사랑에게 받은 상처로 힘들어하던 상태였다. 최연우의 잘생긴 얼굴에 빠져든 정서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곁을 맴돌며 마음을 고백했다. 주변에 누구라도 나타나면 언제도 당당히 말했다. "최연우가 날 꼭 사랑하게 만들 거야."
정서윤의 방식은 단순했다. 매일 꽃을 들고 찾아가고, 간식을 챙겨주며 끊임없이 물었다. "이제 내가 좀 좋아졌어?"
그때 정서윤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최연우는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곤 했다.
그러다 드디어 대학 기숙사 창고에서 단둘이 마주했던 날, 정서윤은 그를 벽에 몰아붙이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 남자친구를 해준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키스할 거야."
그날 최연우는 대답 대신 그녀를 끌어안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게 잘못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 무너진 이유는 고통스러울 만큼 단순했다. 정서윤을 향한 최연우의 사랑이 애초에 결혼을 지탱할 만큼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지만 돌아오는 건 늘 부족했고, 그 끝에는 실망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이고 쌓인 실망감은 결국 그녀의 마음을 메마르게 했다. 그런 정서윤의 마음이 식어가니 이 관계가 끝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민지는 그저 이 모든 일의 시작에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다.
서민지를 데려다주는 차 안, 최연우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서민지가 그의 팔에 살짝 손을 얹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연우야, 나.."
하지만 최연우는 서민지의 손길을 피하며 단호히 말을 잘랐다. "오늘 같은 일, 다시는 없게 해 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