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첨벙!
김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결혼식 당일, 신부와 신부의 여동생이 함께 정원의 수영장에 빠지고 말았다.
물속에서 허덕이던 김이슬은 약혼자 박수원이 다급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는 정장 재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김이슬의 창백한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희망에 찬 눈빛으로 박수원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하지만 박수원은 김이슬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그녀의 사촌 여동생 김이연을 향해 빠르게 헤엄쳐 가더니 빠르게 그녀를 물에서 구해내 품에 안고 자리를 떠났다.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김이슬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수원아! 도와줘... 나 여기 있어...!"
김이슬은 서서히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수원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김이슬의 눈에 짙은 절망이 어렸다. 그녀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물에 젖은 웨딩드레스가 점점 무거워졌고, 점차 그녀를 수영장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의식은 서서히 흐려져 갔다.
그 순간, 훤칠한 실루엣이 물에 뛰어들더니 빠르게 그녀를 향해 헤엄쳐 왔다.
인공호흡에 이어 심폐소생술까지 진행하던 중,
기침과 함께 김이슬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흐릿한 시야 속 햇빛을 받은 남자의 모습이 천사처럼 보였다. 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로 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마워요... 꼭 보답할게요."
그는 멈칫했다. 이어 손끝으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답은 필요 없어. 그저 건강하게 잘 살아주기만 하면 돼."
하객들이 뒤늦게 모여 들기 시작했을 때쯤, 남자는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더니 바로 사라져 버렸다.
저녁 무렵, 김이슬이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텅 빈 병실에는 그녀 혼자였고 박수원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김이연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사진 속엔, 박수원이 병실에서 그녀를 위해 사과를 깎아주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고개 숙인 그는 김이슬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병원에 있었어?'
다만 그녀의 병실이 아닐 뿐이다.
김이슬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김이슬과 박수원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다. 어렸을 때부터 두 가문은 그들의 혼약을 정해 두었다.
5년 전, 그녀는 치료를 위해 해외로 떠났고 돌아오면 결혼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은 이미 변해버린 뒤였다.
박수원은 김이연과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박수원은 김이연은 그녀의 여동생이니 좀 더 돌봐주는 것뿐이라고 했다.
김이슬은 그 말을 믿었다.
박수원이 꼭 필요 할 때마다 그는 김이연을 위해 그녀를 내쳤음에도 말이다.
그를 너무 사랑했던 그녀였기에 그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꺼진 휴대폰의 검은 액정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눈물에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고 한이 맺힌 여인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란 그녀는 서둘러 휴대폰을 덮어 버렸다.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됐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돼!'
깊게 심호흡을 한 김이슬의 눈동자에 결의가 번뜩였다.
[약혼, 없었던 일로 해.]
김이슬은 박수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의 연락처를 지워 버렸고 차단해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겐 꼭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꼭 박수원이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결혼할 상대를 찾아야 겠어.'
서둘러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을 나선 그녀는 일단 집에 들려 옷부터 갈아 입었다.
몸에 착 달라 붙는 빨간색 원피스, 그녀의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굴곡진 몸매를 강조하기에 충분했다.
경찰서에 문의 해,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의 정보를 알아 내고는 곧장 어느 한 정비소로 향했다.
밤이기도 하고 길 양쪽으로 폐차들이 산처럼 쌓여져 있어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그녀는 대문으로 들어섰다.
차고의 허연 조면 속에서 심하게 망가진 차가 보였다. 차 앞부분이 완전히 찌그러져 있어 무슨 브랜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우당탕 한바탕 뚝딱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차 아래에서 한 남자기 기어 나왔다.
작업복에 검은 색 안전화를 신은 그는 훤칠하고 우람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갑을 벗고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이어진 탄탄한 팔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완벽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튀어 나올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다.
'어! 이거, 너무 잘 생긴 거 아냐?'
솔직히 그의 잘생긴 얼굴에 적잖이 놀란 김이슬이다.
그녀는 목소리를 다듬고는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오전에 뵌 적이 있는데."
앞에 선 여자의 정갈한 메이크업과 아름다운 자태는 오전의 그 처참하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서이준은 잠시 멈칫 했지만 그뿐이었고 이내 태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죠?"
김이슬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보답을 하려고요."
서이준은 분명 보답은 필요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물에 빠졌던 탓에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싶었다.
그는 생수를 집어 들더니 뚜껑을 따며 담담하게 말했다.
"어떻게 보답할 생각인데요?"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
"결혼 하실래요?"
회차 2
무심코 물을 마시다 사래에 걸린 서이준은 쿨럭거리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여태 차분함을 잃지 않던 그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뭐라고요?"
서이준의 반응에 김이슬은 난감했는지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까, 제 말은... 혹시 결혼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를 결혼 상대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떨지..."
말을 마친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서이준의 눈치를 살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사실, 서이준이 미혼이라는 사실을 경찰에서 전해 들었을 때,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정작 그를 마주하고 나니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말았다.
남자의 침묵에 김이슬의 마음은 조금씩 식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나...?'
김이슬은 급히 말을 바꿨다.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제가 워낙..."
"이유가 뭔데요."
훅 날아온 서이준의 물음에 김이슬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봤다.
"네?"
서이준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와 결혼을 하려는 이유가 뭔지 물었습니다."
김이슬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 결혼을 해야 하죠, 그리고 그쪽은 좋은 분이시잖아요."
"좋은 분이라..."
서이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 말을 되뇌었다.
김이슬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잘못 말한 건가?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당연히 좋은 사람 아닌가?'
"좋아요."
서이준이 입을 열었다.
그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김이슬은 멀뚱멀뚱 그를 쳐다봤다.
"결혼하자고요."
서이준이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낮에 그 남자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진짜 동의한 거야?'
순간, 김이슬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 놈과는 혼인 신고를 한적 없거든요. 그리고 여기로 오기 전에 그 자식은 이미 차버렸어요! 이제 남편이라곤 그쪽 밖에 없는 거죠!"
그녀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서이준에게 건넸다.
"이건 예물이에요! 비밀번호는 0000이에요. 마음껏 쓰세요."
서이준의 눈동자 깊은 곳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그는 바로 거절하려 했지만
김이슬은 다짜고짜 카드를 그의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일하는 게 많이 힘들죠? 이 돈이 있으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돼요. 편한 일거리를 찾아 봐요."
서이준은 말없이 자신이 입고 있는 기름때가 잔뜩 낀 작업복을 내려다 봤다. 아무래도 자신을 정비소 직원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싶었다.
그의 신분은 비밀이었기에 경찰이 그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건 당연했다.
김이슬의 눈빛에 담긴 걱정과 기대를 눈치 챈 서이준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김이슬이 미소를 지었다.
"저 먼저 가 볼게요. 내일 오후 1시에, 구청 앞에서 만나요."
기분이 좋은 탓인지 그녀의 걸음이 한결 경쾌해 졌다.
안에서 나오다가 마침 떠나는 김이슬의 모습을 본 시우진이 물었다.
"형 저 여자 뭔데? 친해?"
"네 미래의 형수."
시우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형! 저 여자를 꼬시려고?"
"우리 내일 혼인 신고 할 거야."
서이준이 짧게 한마디 했다.
"뭐라고? 혼인 신고?!"
시우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이준이 귀띔했다.
"기억해, 난 앞으로 네 정비소에서 출근하는 일반 직원이야.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잘해."
시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형."
어리둥절한 채로 우두커니 서있는 시우진을 뒤로 하고 서이준은 만족스런 얼굴로 자리를 비웠다.
다음 날 아침, 김이슬은 이삿짐 센터 직원들을 데리고 신혼 집으로 향했다.
박수원이 산 집이지만 내부 인테리어부터 가구, 전자제품들은 모두 그녀가 장만한 것이다. 자신이 감당 할 수 있는 선에서 살수 있는 최고의 물건들이기에 많은 돈이 들었다.
김이슬은 이삿짐 센터 직원들을 마주하며 손을 휘저었다.
"전부 다 옮겨요!"
일꾼들이 몰려들어 샹들리에와 TV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거실에 걸린 두 사람의 결혼사진이 김이슬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야구 배트를 치켜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진을 향해 휘둘렀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주방에서 뛰어 나온 박수원은 이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장 멈춰!"
그는 즉시 일꾼들을 멈춰 세웠다.
이어 성큼 다가가 김이슬에게서 야구 배트를 빼앗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댔다.
"김이슬, 대체 뭐 하는 짓이야?"
회차 3
김이슬이 냉소를 지었다.
"박수원, 약혼은 이미 파기됐어. 여기 물건들은 전부 내가 산 거야. 내가 가져가겠다는데 그게 왜?"
박수원은 그 문자를 확인했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김이슬이 이렇게 나온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예전과 달리 이번에 그녀는 그의 연락처를 전부 차단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김이슬이 결국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조금만 어르고 달래면 마치 길들여진 강아지 마냥 금방 다시 돌아 올 거라고 믿었다.
박수원의 표정이 부드럽게 바뀌더니 김이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직도 어제 일로 삐쳐있는 거야? 미안해, 어젠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나 믿지?"
김이슬의 얼굴에 혐오감이 스쳤다. 그녀는 즉시 그의 손을 뿌리쳐 내더니 가방에서 물 티슈를 꺼내 손을 닦았다. 마치 더러운 물건이 손에 닿은 듯한 모습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그 어떤 말보다 더 모욕적이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이라 박수원은
더욱 난감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꼭 싸워야겠어? 철 좀 들어. 그만해."
김이슬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박수원, 사람 말 못 알아들어? 우린 끝났다고! 설마 귀까지 먹은 건 아니지?"
"푸흡."
짐을 나르던 일꾼이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건방진 년이!'
박수원의 얼굴이 차갑게 내려 앉았다.
"그래, 옮길 테면 다 옮겨!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이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린 완전히 끝나는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김이슬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해 버린 채 일꾼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서둘러 옮겨주세요! 빨리 끝내면 보너스를 드릴게요! "
보너스란 말에 30분도 채 되지 않아, 집안은 텅 비어 버렸다. 앉은 곳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박수원은 태풍이 휩쓸고 간 듯한 집 안을 바라보며 냉소를 흘렸다.
'이번에는 얼마나 버티려고... 두고 봐.'
오후 1시. 김이슬은 약속 시간에 맞춰 구청에 도착했다.
서이준은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몸에 착 감기는 정장을 입은 탓에 원래도 큰 키가 더욱 훤칠해 보였다. 백화점 광고에서 나오는 모델들 보다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김이슬은 우아한 자태로 서이준에게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서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그럼… 들어갈까요?"
"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함께 구청에서 나왔다. 손에 들린 혼인 신고서를 내려다 보는 김이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낯선 남자와 결혼을 하다니...'
생각을 마친 그녀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번호 알려주세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마무리 되면 바로 연락 드릴게요."
그녀의 휴대폰을 받아 든 서이준이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김이슬이 멈칫했다. 가슴 속에 따뜻한 감정이 밀려 왔고 그녀조차 왜 그런지 몰랐다.
그의 능력으로 볼 때, 큰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을 진 몰라도 오랜만에 듣는 관심 어린 말은 따뜻한 위로로 다가왔다.
"알겠어요."
김이슬은 환하게 웃으며 서이준과 작별했다.
30분 후, 김이슬은 집에 도착했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출입 허락이 떨어 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녀가 들어가기도 전에, 외삼촌 일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가 집에 들어서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김이슬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얼굴들을 못 본 척 지나치고는 혼인 신고서를 외삼촌 김문산 앞에 내밀었다.
"삼촌, 저 결혼 했어요. 전에 하신 약속을 지키셔야 할 때가 된 것 같은 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