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김이서는 문 쪽을 돌아봤다.
역광을 받으며 걸어오는 남자는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인상적이었고 얼굴과 이목구비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가 정성스럽게 조각한 것처럼 잘생겼다.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변호사는 이재준을 보자마자 당황하고 말았다.
변호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는 와중에도 김이서의 다리를 걷어 차는 걸 잊지 않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김이서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이재준은 평소에 여자를 부축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숨겨진 병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부축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여자를 부축한 이재준은 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여자를 부축했음에도 얼굴이 빨개지지도, 숨이 가빠지지도 않았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불쾌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재준은 방금 김이서를 부축했던 손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왜, 이 여자에겐 거부반응이 없는 걸까?'
이재준은 그저 알레르기 반응이 지연된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아름다운 얼굴, 왠지 어딘가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김이서는 활짝 미소 지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이서라고 해요."
그녀는 20년 넘게 불운의 아이콘으로 살았다. 그런데 지금, 지난 날의 모든 불행이 지금 이순간의 행운을 위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몸매면 몸매, 외모면 외모, 심지어 기품까지 모두 완벽했다.
정은아가 변호사를 시켜 그녀를 협박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완벽한 남자를 누가 거절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방금 변호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남자와 정은아의 집안이 서로 엇비슷하다고?'
김이서는 변호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만약 사실이라면, 정은아의 부모님은 무슨 짓을 해서든 정은아의 소원을 들어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남자가 뽑기 시스템에 등록 될 리 없었다.
그녀는 남자의 평범한 옷차림을 훑어봤다. 옷에는 아무 로고도 없었다. 남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았다. 단지 외모가 뛰어날 뿐.
김이서가 내민 손을 본 이재준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방금 이 여자와 가까운 신체 접촉을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내가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운명의 여자인건 아닐까?'
이재준은 조심스레 김이서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는 심지어 김이서의 몸에서 은은한 비누 향을 맡을 수 있었고 그 냄새가 마음에 들었다.
이재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놓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와 접촉하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두드러기도 나지 않았고, 숨이 가빠지지도 않았으며, 구토하고 싶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재준은 마음속에 솟아나는 기쁨을 간신이 억눌렀다.
그는 오기 전에 김이서에게 보상금을 두둑하게 쥐어 주어 결혼을 포기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김이서는 내 운명의 여자야.'
"혼인신고는 어디서 하는 거에요?" 이재준이 물었다.
그의 뒤에 선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대표님이 여자와 접촉했을 때, 비서는 불안에 떨었고 그의 손가락은 이미 '119' 에 전화를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표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대표님이 먼저 혼인신고를 하자고 제안했다!
비서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초절정 미남이 정말로 자신과 혼인신고를 하려 하자 김이서는 적극적으로 말했다. "이쪽이에요!"
두 사람은 빠르게 혼인신고를 마치고 구청을 나왔다.
이재준은 차 옆에 서서 김이서를 내려다봤고 동갑이라 그런건지 대뜸 말을 놓았다. "학교에 데려다줄까?"
김이서는 이재준의 차를 흘깃 쳐다봤다. 차는 너무 평범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택시와 같은 모델이었다.
김이서는 차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래도 비싼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았다.
그녀의 새 남편은 옷차림도 평범했고, 차도 평범했다.
게다가 그가 타고 온 차 옆에는 같은 모델의 차가 열 몇대가 더 있었다. 딱 봐도 택시 기사였다.
'흠... 틀림 없어. 내 남편은 택시 기사야.'
김이서는 택시 기사의 급여가 적지는 않지만, 안정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할 수 있고, 한 달에 200만 정도 벌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달에는 고작 40~60만 원밖에 벌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하지만 김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재준은 너무 잘 생겼다. 이정도 얼굴이라면 작은 결점 따윈 얼마든지 눈 감아 줄 수 있었다.
'잘생겼지만 가난한 남자이기에 나한테 기회가 온 걸 수도 있어.'
김이서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이재준에게 안정감을 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반말을 했으니 그녀도 말을 놓기로 했다. 결혼도 했고 동갑이기도 하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자기, 걱정하지 마. 혼인신고를 했으니 난 이제 지원 테크 정직원이 될 수 있다고. 매달 월급은 120만원이고, 매년 월급이 오를 거야.''
"앞으로 내가 자기를 먹여 살릴게. 자기를 굶길 일은 없을 거야. 적어도 라면에 계란 정도는 넣어 먹을 수 있을 만큼 내가 노력 해 볼게!"
김이서는 자신의 말이 혹시 이재준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 아닌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보탰다. "앞으로 우리 집 기본적인 살림은 내가 책임질게. 자시는 앞만 보면 달리면 돼. 우리 잘 지내 보자!"
이재준의 표정이 순식간 이상하게 변했고 눈빛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수년 동안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얼굴과 돈을 보고 그에게 접근했다.
눈앞에 있는 그의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긴 했지만 얼굴만 보고 반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는 그를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하는 가난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재준은 고개를 돌려 마찬가지로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서를 돌아봤다.
"네가 나를 먹여 살린다고? 이유가 뭐야?" 그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났다.
여자에게서 그를 먹여 살리겠다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이서는 이재준의 옷차림과 차를 흘깃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앞으로 우리 잘 지내 보자는 뜻으로 한 말이니까 신경쓰지 마. 맞다, 월세방은 어디야? 나 이제 졸업해서 더 이상 기숙사에서 지낼 수 없어."
결혼을 했으니 이제 합법적인 부부다. 김이서는 굳이 그 앞에서 내숭 떨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