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네 살배기 아들 선우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이었다. 뺑소니로 아이를 죽인 운전자, 강채린이 무덤 앞에 나타났다.

그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선우가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을 열린 관 속에 떨어뜨렸다.

“어휴, 칠칠맞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내 남편, 이 도시의 정의를 상징하는 이강혁 검사는 그저 옆에 서서 침묵했다.

탐사보도 전문 기자인 나는 다짐했다.

반드시 내 손으로 정의를 찾겠다고.

내게는 증거도, 증인도, 한국기자상 수상 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강채린은 달랐다.

그 여자의 막강한 아버지에게 빚을 진 판사는 모든 증거를 기각했다.

강채린은 자유롭게 풀려났다.

그때, 법정 경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은하 씨, 당신을 체포합니다.”

내 남편, 선우의 아버지가 직접 나를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내 슬픔과 진실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편집증적인 집착으로 몰아갔다.

내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지수는 법정에서 내가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배심원단은 내게 유죄를 선고했다.

청주여자교도소에서의 3년.

단지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엄마라는 이유로.

나는 교도소에서 또 다른 아이를 잃었다.

그 비밀은 내 가슴속 깊이 묻었다.

왜?

대체 왜 그랬을까?

왜 나를 배신했을까?

출소하던 날, 나는 선우의 무덤에서 그를 발견했다.

강채린과 그들의 아들과 함께.

“아빠, 이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도 돼요?”

강채린은 아이를 사랑스럽게 달랬다.

“네 형한테 먼저 인사해야지.”

내 세상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나에게 누명을 씌운 것만이 아니었다.

나를 대체했다.

우리 아들까지도.

제1화

내 아들 선우를 묻던 날, 하늘은 잔인할 만큼 완벽하게 푸르렀다.

아이는 네 살이었다.

뺑소니였다.

차는 체리 레드 색상의 스포츠카였다.

운전자는 강채린이었다.

나는 작고 열린 무덤가에 서 있었다. 갓 파낸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남편, 이강혁 검사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향한, 이 도시의 정의를 상징하는 그의 연기였다.

우리는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파워 커플이었고, 이제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 슬픔은 텅 비어 있었다.

가슴속에 거대하고 고요한 동굴이 생긴 것 같았다.

소리치고 싶었다.

아들과 함께 이 땅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 그 여자가 나타났다.

온통 검은 정장 물결 속에서 유독 튀는 하얀 리넨 원피스를 입은 강채린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아버지, 부동산 재벌 강태준 회장이 몇 걸음 뒤에서 음침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그는 이강혁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그 여자는 멀리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박물관의 진기한 유물이라도 보듯, 무덤 바로 앞까지 다가와 안을 들여다봤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군중 속에서 퍼져나갔다.

선우를 위해 준비한 하얀 장미 한 송이를 든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채린은 무덤에서 고개를 들었다.

차갑고 텅 빈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쳤다.

그 여자는 작고 날카롭게 미소 지었다.

“참 안됐네.”

산들바람을 타고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여자는 명품 핸드백에 손을 넣어 작은 봉제 공룡 인형을 꺼냈다.

선우가 가장 좋아하던 것.

지난주 공원에서 잃어버렸던 것.

내가 온 동네를 뒤지며 찾아다녔던 바로 그 인형이었다.

그 여자는 열린 무덤 위에서 인형을 흔들었다.

“이거 떨어뜨렸잖아, 그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투였다.

“바로 직전에. 어휴, 칠칠맞기는.”

그리고는 손을 놓았다.

초록색 공룡 인형이 떨어져 내 아들의 작은 관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내 안의 무언가가 끊어졌다.

고요했던 슬픔의 동굴이 뜨겁고 포효하는 분노로 가득 찼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깨를 잡은 이강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경고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는 갈라진 속삭임 같았다.

“네가 죽였어.”

강채린의 미소가 더 넓어졌다.

“경찰이 무혐의 처분 내렸어, 은하 씨. 비극적인 사고였지. 당신이 애를 더 잘 봤어야지.”

나는 정의를 되찾을 것이다.

나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였다.

파고들고, 진실을 찾아내 세상에 폭로하는 방법을 알았다.

내 남편이 상징하는 법과 시스템을 이용해 이 괴물을 제자리에 처넣을 것이다.

예비 심리는 언론의 서커스장 같았다.

나는 맨 앞줄에 앉았다. 내 옆에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최지수가 있었다.

지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꽉 쥐었다.

“강태준 회장 딸이잖아.”

누군가 뒤에서 속삭였다.

“이강혁 검사 최대 후원자. 절대 감옥 갈 일 없을걸.”

상관없었다.

내게는 증거가 있었다.

흐릿하지만 충분히 식별 가능한 CCTV 사진.

빨간 스포츠카가 과속으로 달아나는 것을 본 목격자.

나는 몇 주 동안 경찰이 그토록 꺼리던 일을 해내며 조각들을 맞춰 나갔다.

강태준의 돈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사건을 구축했다.

나는 서은하였다.

시청 비리를 폭로한 기사로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나는 이전에도 권력자들을 끌어내린 적이 있었다.

이 버릇없고 영혼 없는 여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달랐다.

강 회장 덕에 그 자리에 앉은 판사는 증거를 기각했다.

목격자는 증언을 번복했다.

강채린은 어떤 혐의도 없이 자유롭게 풀려났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지수가 나를 부축하는 팔이 느껴졌다.

끝이 아니었다.

항소할 것이다.

더 찾아낼 것이다.

그때 법정 경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은하 씨, 당신을 체포합니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검사석 테이블에 새로운 서류 파일이 나타났다.

내 남편, 이강혁이 일어섰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피고인 서은하, 아들 이선우 군의 사망에 이르게 한 중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합니다.”

판사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었다.

그들은 나를 재판에 세웠다.

내 남편, 나와 함께 인생을 만들고 선우의 아버지였던 그 남자가 직접 나를 기소했다.

그는 사고 후 잠 못 이루던 밤과 미친 듯이 걸었던 전화들을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증거로 사용했다.

내 기자로서의 조사를 편집증적인 집착으로 왜곡했다.

내가 선우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태만했다고 주장했다.

지수가 증인석에 섰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지수는 내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그 배신감은 너무나 날카로워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우리의 이미지를 이용했다.

아내의 부주의로 산산조각 난 완벽한 파워 커플.

곧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남자에게는 더 좋은 이야기였다.

더 깔끔한 이야기였다.

이강혁의 최종 변론은 카리스마와 거짓 슬픔이 뒤섞인 걸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찢어놓는 일이라도 사법 시스템은 공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처음으로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내가 거의 믿을 뻔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배심원단은 내게 유죄를 선고했다.

3년.

그들은 내게 3년 형을 선고했다.

청주여자교도소에서.

단지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엄마라는 이유로.

3년은 콘크리트와 회색 죄수복,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했던 폭력, 그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의 연속이었다.

나는 시작하지도 않은 잔혹한 싸움에서 임신했던 아이를 잃었다.

또 하나의 비밀을 가슴속 깊이 묻었다.

나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버텼다.

이강혁이 결코 답장하지 않은 수천 통의 편지에 적었던 단 하나의 불타는 질문을 연료 삼아.

왜?

출소하던 날, 하늘은 뿌옇고 무심한 회색이었다.

나는 갱생 시설로 가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내가 꼭 가야만 하는 곳으로 향했다.

내 아들의 무덤.

나는 무덤이 내 부재의 증거처럼 버려져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곳은 깨끗했다.

싱싱한 꽃과 묘비 머리맡의 작고 반짝이는 돌천사.

내가 거기 서 있을 때, 익숙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검은색 세단.

이강혁이 내렸다.

그는 더 늙고, 더 권위 있어 보였다.

이제 그는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강채린이 조수석에서 내리며 그의 팔에 소유욕 가득한 손을 얹었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보모가 어린아이를 내리게 도왔다.

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이강혁의 검은 머리와 강채린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들은 완벽한 가족처럼 무덤을 향해 걸어왔다.

아이가 앞서 달려가 이강혁의 다리를 껴안았다.

“아빠, 이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도 돼요?”

강채린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있다가, 아가. 네 형한테 먼저 인사해야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세상이 윙윙거리는 백색 소음 속으로 녹아내렸다.

형.

아빠.

나는 비명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커다란 떡갈나무 뒤로 비틀거리며 숨었다.

나는 그들을 지켜봤다.

세 사람.

이강혁은 무덤에 새로운 꽃다발을 놓으며 강채린의 손을 잠시 스쳤다.

그들은 조문 온 여느 가족처럼 보였다.

내 가족의 잿더미 위에 세워진 가족.

차가운 진실이 물리적인 타격처럼 나를 덮쳤다.

단순히 그의 경력 때문이 아니었다.

선거를 위해 나에게 누명을 씌운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대체했다.

우리 아들까지도.

심장이 텅 빈 상처처럼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이 그 사이를 윙윙거리며 지나갔다.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울부짖지 않으려고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물어 피 맛이 났다.

그는 그들을 선택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그는 그녀와 함께였다.

벽난로 위 사진이 떠올랐다.

우리가 함께 산 집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 세 사람.

더 많은 아이들과 웃음소리, 평생의 추억으로 채워나가기로 했던 집.

우리는 둘 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로스쿨에서 만난, 밑바닥에서 기어오르려는 굶주린 두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아버지의 벨트 자국으로 가득한 등을 기억했다.

그가 거의 말하지 않는 잔혹한 과거.

악몽을 꿀 때 그를 안아준 것은 나였다.

어린 인턴 시절, 내 모든 미래를 걸고 그의 폭력적인 아버지를 감옥에 보낼 증거를 흘린 것도 나였다.

그날 밤, 그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뺨에는 나를 막으려던 아버지가 던진 병에 긁힌 상처가 선명했다.

“다시는 누구도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은하야.”

그는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로 맹세했다.

“누구든 그러면, 내 손으로 평생 감옥에 처넣을 거야.”

우리는 해냈다.

그는 시 역사상 최연소 검사장이 되었다.

나는 스타 기자가 되었다.

우리는 결혼했고, 선우를 낳았고, 아름다운 집으로 이사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다.

선우의 방에서 우리 아들을 안고 눈물을 글썽이던 그의 모습이 기억났다.

“내가 가진 모든 건,”

그가 내게 속삭였다.

“다 당신 덕분이야.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내 완벽한 삶.

내 완벽한 남편.

내 아름다운 아들.

모두 사라졌다.

파괴되었다.

묘지 건너편에서 강채린의 날카롭고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혁 씨, 자기 전처 오늘 출소했다며.”

그 여자는 내가 숨어 있는 곳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 괜찮을까? 걱정돼?”

나는 숨을 참았다.

내 모든 존재가 그의 대답에 집중했다.

내가 붙잡고 있는지도 몰랐던 마지막 희망의 실오라기가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이강혁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차갑고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내가 왜? 이제 나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데.”

실오라기가 끊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살갗이 찢어졌다.

피가 발밑의 마른 잎사귀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들은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차에 올라타 떠났다.

나를 우리가 함께했던 유령들과 함께 남겨두고.

나는 해가 질 때까지 떨며 서 있었다.

그러다 3년 동안 숨겨두었던 대포폰을 꺼내 내가 가진 유일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지수.

그녀의 목소리는 망설이는 듯했다.

“은하야?”

“도와줘, 지수야.”

내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후회가 쏟아져 나왔다.

“은하야, 정말 미안해. 뭐든지 할게. 뭐든지. 내가 도울게. 우리가 그놈 잡을 거야. 그놈들 전부 다.”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이 마침내 뜨겁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갈 곳이 없었다.

지수와 함께 살던 아파트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아직 내 것이라고 느껴지는 유일한 곳으로 갔다.

그 집.

우리 집.

문 옆 헐거운 벽돌 밑에 열쇠는 여전히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공기는 퀴퀴했지만, 모든 것이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책장에는 내 책들이, 싱크대 옆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머그잔이.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벽난로 위의 가족사진이 사라져 있었다.

등 뒤에서 마룻바닥이 삐걱거렸다.

나는 홱 돌아섰다.

이강혁이 문간에 서 있었다.

그의 실루엣이 희미해지는 빛을 가렸다.

그의 눈은 어둡고 읽을 수 없는 심연 같았다.

우리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우리 사이의 공간은 3년간의 고통과 배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내가 해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가면이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거의 평범했다.

“돌아왔네.”

그는 물병을 내밀었다.

“목마를 텐데.”

나는 받지 않았다.

“특별한 거 안 탄 물이 더 좋은데.”

내 목소리에는 얼음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물병을 내려놓았다.

부엌으로 가더니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돌아왔다.

김이 우리 사이의 공기를 데웠다.

“자. 추울 텐데.”

이번에는 받았다.

손가락이 익숙한 도자기를 감쌌다.

그 온기가 절실했다.

우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그가 선물한 머그잔이 손안에서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미끄러졌다.

잔은 마룻바닥에서 산산조각 났고, 뜨거운 차가 내 낡은 신발 위로 쏟아졌다.

그 소리가 주문을 깼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목소리를 찾은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그 빨간 스포츠카.”

나는 떨리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시작했다.

“그 빨간 스포츠카에 대해 말해봐, 이강혁.”

회차 2

이강혁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한때 나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은 이제 섬뜩할 정도로 차분했다.

“다 지난 일이야, 은하야. 끝났어.”

“끝나?”

그 말은 목이 졸린 듯한 신음이었다.

“내 아들은 죽었어. 나는 3년을 감옥에서 보냈어.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방이 기울었다.

심장이 바이스에 꽉 조이는 것 같았다.

매번의 박동이 새로운 고통의 스파이크였다.

나는 비틀거렸고, 사지의 떨림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걱정의 빛을 보았다.

아주 희미한 빛.

“은하야.”

그가 낮은 경고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를 잡으려는 듯 재빨리 한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명랑하고 만화 같은 벨소리였다.

그는 멈췄다.

몸이 굳었다.

화면을 흘끗 보더니 그의 자세 전체가 바뀌었다.

걱정의 빛은 사라지고, 지친 부모의 부드러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금 가는 중이야.”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기에 말했다.

“응, 아들이 좋아하는 과자 사 갈게. 울리지 마.”

그는 전화를 끊었다.

방 안의 침묵은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나는 그가 선우에게 어땠는지 기억했다.

엄격했다.

요구 사항이 많았다.

선우가 저녁 식사 전에 과자를 달라고 울자, 그는 저녁도 굶기고 방으로 보냈다.

그는 항상 인격을 키우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아이, 강채린의 아이는 울기만 해도 과자를 얻었다.

나는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의자 등받이를 꽉 잡았다.

내게 남은 것은 자존심뿐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에 잠시 망설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좀 쉬어. 내일 얘기하자.”

그는 문을 나서려다 멈췄다.

“경보 코드는 그대로야. 전화할게.”

내 집?

여기가 아직도 내 집인가?

그 생각은 목구멍에서 쓴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가 떠났다.

현관문이 닫히자 집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겼다.

한때 그토록 밝았던 내 세상은 이제 회색과 검은색의 그림자뿐이었다.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나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계단을 올라 선우의 방으로 갔다.

방은 비어 있었다.

완전히 비어 있었다.

경주용 자동차 침대도 사라졌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으로 가득했던 책장도 사라졌다.

공룡과 로켓 그림으로 뒤덮여 있던 옅은 파란색 벽은 무미건조하고 개성 없는 흰색으로 덧칠해져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지워버렸다.

“이강혁, 이 개자식.”

나는 텅 빈 방에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무릎에 힘이 풀렸다.

나는 벽을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매끄럽고 새로운 페인트가 등에 차갑게 닿았다.

날것 그대로의 동물적인 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순수하고 희석되지 않은 고통의 비명이었다.

나는 텅 비어 버릴 때까지, 목이 쉬고 눈이 부어 감길 때까지 울었다.

지쳐서 안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우리 침실.

아주 작고 어리석은 일부는 그가 선우의 물건을 여기에 보관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했다.

좋아하던 담요.

잊혀진 장난감 하나.

방은 3년 전 내가 떠났을 때와 똑같았다.

같은 무거운 커튼, 같은 킹사이즈 침대.

내 옷은 여전히 옷장에 걸려 있었고, 내 향수병은 화장대에 줄지어 있었다.

왜?

새 가족이 있으면서 왜 내 물건을 그대로 두었을까?

그 여자를 여기로 데려왔을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았다.

서랍 뒤쪽, 내 낡은 일기장들 뒤에 작고 개봉되지 않은 란제리 상자가 있었다.

비싼 것.

실크와 레이스.

전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강채린의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리고 그가 왜 내 물건을 보관했는지도 알았다.

이 집은 우리 죽은 결혼 생활의 성지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적인 놀이터였다.

그들은 내 유령에 둘러싸여 우리 침대에서 뒤틀린 게임을 즐겼을 것이다.

그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구토했다.

쓴 담즙만 남을 때까지 게워냈다.

몸은 약해졌고, 영혼은 산산조각 났다.

나는 차가운 타일 바닥에 쓰러져 세상이 검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창문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 때 잠에서 깼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나를 화장실 바닥에서 옮겨 눕혀 놓았다.

이강혁이 창가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내가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부드러웠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끔찍한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사랑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다시 토하고 싶어졌다.

내 목소리는 쉰 소리였다.

“왜 내 물건들 안 버렸어?”

나는 시트를 갑옷처럼 두르고 몸을 일으켰다.

“왜 그냥 나를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았어, 이강혁? 내가 감옥에서 썩어가는 동안, 강채린이랑 내 침대에서 노는 게 더 재밌었어?”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의 부드러움은 사라졌다.

“알고 있었군.”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봤어. 묘지에서. 그 여자랑. 그리고 당신 아들이랑.”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저 야망과 거짓말로 조각된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어, 맞아.”

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이미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던 내 세상이 더 미세한 먼지로 부서져 내렸다.

그의 사랑, 그의 약속, 그의 달콤한 속삭임에 대한 모든 기억이 내 마음속에서 재로 변했다.

오래전 나를 안고 지켜주겠다고 약속하던 그가 생각났다.

선우가 태어났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그가 생각났다.

“왜 그냥 이혼하지 않았어?”

나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한테 이 모든 걸 겪게 했어?”

그는 턱을 꽉 다물었다.

“서울시장 선거 중에 지저분한 이혼 소송은 보기 좋지 않아, 은하야. 슬픔에 잠긴 홀아비가 훨씬 더 동정적인 인물이지.”

그는 선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치적 자산처럼.

“하지만 내가 후보 지명을 받고,”

그는 섬뜩할 정도로 합리적인 목소리로 계속했다.

“선거가 확실해지면, 강채린과 이혼할 거야. 당신과 나는 다시 함께할 수 있어.”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 담긴 순수하고 괴물 같은 뻔뻔함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는 나를 보관하고 있었다.

옷장 뒤편의 여벌 정장처럼.

재벌 상속녀와의 불륜이 목적을 다했을 때 돌아갈 편안한 선택지로.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빈민가 출신의 그 무자비한 소년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누구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회차 3

강태준 회장은 이강혁의 로스쿨 시절 멘토였다.

강채린은 이강혁과 내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그의 곁을 지키는 고정 멤버였다.

그녀는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그게 한 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냥 어린애야, 은하야.”

이강혁은 웃어넘기며 말했다.

“그 애 아버지가 나한테 중요해. 잘해줘야 해. 아무 의미 없어.”

나는 그를 믿었다.

그가 법정에서 나를 태만한 엄마, 히스테릭한 여자, 범죄자라고 불렀을 때조차 그를 믿었다.

내가 볼 수 없는 다른 이유, 숨겨진 진실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완벽하고 끔찍할 정도로 명확하게 보았다.

그들의 불륜은 아마 몇 년 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우리 침대에서 잘 수 없었다.

담요를 들고 선우의 텅 빈 방,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갓 칠한 페인트 냄새가 날카롭고 무미건조했다.

밤중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났을 때, 우리 침대에서 가져온 부드러운 캐시미어 담요가 내 위에 덮여 있었다.

이강혁.

그 제스처는 내가 결혼했던 남자, 내가 소파에서 잠들면 나를 덮어주던 그 남자를 너무나도 떠올리게 했다.

순간,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유령 같은 고통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쓴맛이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연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길고 뒤틀린 게임의 또 다른 계산된 움직임일 뿐이었다.

나는 오염된 것처럼 담요를 밀쳐냈다.

담요는 구석에 구겨진 채 쌓였다.

대포폰이 울렸다.

지수에게서 온 문자였다.

‘진전 있어. 강채린 전 운전기사가 얘기하겠대. 그날 차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도 몰라. 너도 집에서 뭐라도 찾아봐. 조심하고.’

나는 안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강혁의 서재를 향해.

그래.

뭔가를 찾을 것이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명랑한 웃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강채린이 있었다.

내 부엌에.

그녀는 이강혁의 품에 안겨 고개를 젖히고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키스하고 있었고, 그의 피부에 묻은 그녀의 선명한 붉은 립스틱 자국은 낙인 같았다.

나는 난간을 꽉 잡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그 모습은 배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강채린.”

나는 꽉 조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뭐 해?”

이강혁이 돌아섰다.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지며.

그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은하야. 채린이가… 네가 없는 동안 많이 도와줬어. 집안일도.”

“교도소 면회도 왔었지.”

강채린이 역겹도록 달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선우 생일 때마다 보러 갔어. 우리가 그 애 대모로 삼는 의식도 했잖아, 그렇지, 강혁 씨?”

혈관 속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뜨겁고 어지러운 파도처럼 머리로 쏠렸다.

“넌,”

나는 분노에 차 말했다.

“그 애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어. 살인자는 자기가 죽인 사람을 애도할 권리가 없어.”

이강혁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내 어깨 너머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신부님께 축복도 받았어, 은하야. 그게 아이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했어.”

세상이 고요해졌다.

공기는 그의 말에 담긴 순수하고 신성모독적인 공포로 바삭거렸다.

내 피는 얼음 조각으로 변해 혈관 안쪽을 긁는 것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말도 할 수 없었다.

강채린은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는 백합 꽃다발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 역겨운 향기가 내 피부를 기어 다니게 했다.

“출소 축하해, 은하 씨.”

그녀가 속삭였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거.”

나는 그녀의 손에서 꽃을 쳐냈다.

꽃잎이 바닥에 흩어졌다.

소리치고 싶었다.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지치고 텅 비어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

강채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734번 수감자. 교도소 생활이 모두에게 맞는 건 아닌가 봐.”

그 번호.

내 번호.

“네.”

나는 자동적으로 대답했다.

그 반응은 3년간의 점호와 인원 확인을 통해 내게 각인된 조건반사였다.

강채린은 날카롭고 의기양양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냥 장난친 거야! 너무 예민하네.”

이강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채린아, 그만해.”

“아, 왜 이래.”

그녀는 장난스럽게 그의 가슴을 쳤다.

그들은 내 앞에서 시시덕거렸다.

그들의 친밀함을 보여주는 무심하고 잔인한 과시였다.

나는 침대 옆 서랍의 란제리 상자를 기억했다.

내 영혼의 차가움이 단단한 얼음덩어리로 굳어졌다.

그날 저녁, 나는 시내의 조용한 식당에서 지수를 만났다.

이 고문은 멈춰야 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야 했지만, 선우를 위한 정의 없이는 떠날 수 없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 은하야.”

지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내게 물 한 잔을 밀어주었다.

“우리 집에 와서 지내. 그놈이랑 그 집에 있을 순 없어.”

“아니.”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어야 해. 증거를 찾을 유일한 방법이야. 그들에게 가까이 있을수록 좋아.”

바로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익숙하고 거슬리는 목소리가 낮은 대화 소리를 뚫고 들어왔다.

강채린.

그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내 눈은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게 향했다.

이강혁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그 나이 때의 선우와 너무나도 닮았다.

강채린은 내가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마치 내가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를 자기 뒤로 끌어당겨 보호했다.

그리고는 식당 전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한테서 떨어져, 아가. 저 여자는 살인자야. 자기 아들을 죽였어.”

식당이 조용해졌다.

모든 고개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강채린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래서, 734번, 바깥 생활은 좀 적응돼? 밥은 더 맛있고? 침대는 더 푹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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