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경시를 떠난지 10년, 임하늘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근 들어 자꾸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던 임하늘은 불안한 마음에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아뿔싸, 의사가 조금 까다로운 문제인 것 같다면서 전문의를 불러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임하늘은 불안한 마음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진료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실 문이 다시 열렸다. 순간, 익숙한 실루엣을 확인한 임하늘은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난지, 얼마나 되셨어요? "
낮게 깔린 목소리가 임하늘의 귓가에 들려왔고 그녀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얼굴 절반을 마스크로 가리고 테가 없는 안경을 착용한 그가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 세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임하늘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긴장한 듯 두 손으로 치맛단을 꽉 잡았다.
경시에 돌아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도현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현재,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어 버린 그녀는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조차 몰랐다.
"일단, 누우세요. 그리고 상의 좀 올려주시고요."
남자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임하늘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고 그녀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한참이나 아무 반응도 없는 그녀의 모습에 이도현은 살짝 짜증이 났다."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죄송합니다." 임하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침대에 눕더니 질끈 눈을 감았다.
그녀는 일초가 마치 100년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 된 상태였고 코끝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돋아 났다.
"제가 아프게 했나요?"
임하늘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이제 됐습니다. 상의 내리세요."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 드디어 들려왔다.
이어 이도현은 자리에서 일어섰고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제야 임하늘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빠르게 옷을 정리한 임하늘은 잠시 침대에 앉아 있다가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이도현은 허리를 곧게 펴고 컴퓨터에 진료 기록을 입력하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그의 손가락, 학창 시절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을 손이었다. 다만 그는 피아노를 대신 바이올린을 선택했다.
당시, 학교 내는 물론이고 학교 밖에도 그의 팬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이웃 도시에까지 그의 광팬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하필이면 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그것도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뚱뚱한 소녀와 온라인 연애를 시작할 줄이야!
"증상이 얼마나 지속되었나요? " 이도현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임하늘은 허리를 곧게 펴고 침을 꼴깍 삼켰다."20일 정도요."
그녀는 이도현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더 이상 주근깨가 가득하고 뚱뚱했던 임하은이 아니었으니까.
이름을 바꾼 것은 물론이고 다이어트에도 성공했으며 얼굴에 가득하던 유전성 주근깨도 깔끔하게 제거했다. 엄마도 달라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 1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도현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임하늘은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이도현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평소에 밤늦게 주무시는 편이세요?"
"12시에 자긴 하는데... 그게 늦게 자는 편인가요?" 임하늘은 조심스레 대답했다.
이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앞으로는 밤 11시 전에는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임하늘은 마치 상사의 메시지에 답장하듯 의례적으로 그저 '네'라고 대답했다.
이도현이 다시 물었다. "결혼은 하셨나요?"
"아니요."
"출산 경험은요?"
"없어요."
임하늘의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양성 유선 결절이에요. 유방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동반해 통증이 느껴지는 건 정상입니다. 하지만 악성 유방 종양으로 발전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생활 습관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건가요?" 임하늘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도현은 평범한 옷차림의 젊은 여자를 쳐다봤다.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을 보니 그의 말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부터 좋은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정기적으로 오셔서 검사를 받으시면 됩니다."
"네, 이도…" 임하늘은 본능적으로 이도현의 이름을 부르려다 가까스로 멈췄다.
"이교수님, 감사합니다."
이도현은 출력된 차트를 임하늘의 앞으로 살짝 밀어주었다. "다음 진료 때부터는 제 앞으로 바로 접수하시면 됩니다."
임하늘은 입술을 꼭 깨물고 물었다. "혹시… 다른 선생님께 진료받아도 될까요?"
고개를 숙인 그녀의 머릿속에는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다.
이도현은 멈칫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네. 좋을 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임하늘은 고개도 못한 채, 책상 위에 놓인 진료 차트를 챙겨 빠르게 진료실을 나섰다.
이도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보다 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이교수님, 자꾸 그러시면 환자한테서 컴플레인 들어와요."
동료 의사가 농담을 건넸다. "이교수가 신경 쓰기나 하겠어? 이교수한테 예약한 환자들을 줄 세우면 지구 한 바퀴는 가뿐히 돌 수 있을 거야."
이도현을 예약한 환자들은 많았다. 그가 진료를 마쳤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되었다. 그제야 그는 시간을 내 구내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겨우 찾았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식판을 들고 다가와 이도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도현은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병원장 비서가 왜 이제야 밥을 먹냐?"
송현수가 말했다. "오늘 이주혁을 만났어, 그 있잖아, 걔한테서 청첩장 받았어. 옆 반을 다니던 여자애랑 결혼한대. 널 꼭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던데?"
이도현은 그동안 동창들의 결혼식에 많이 참석했다. 28살, 한창 가정을 이룰 나이었으니 말이다.
"걔 여자친구가 너와 같은 합창단이었대. 맞다, 너네 합창단에 여자가 한명 더 있지 않았냐?" 송현수가 물었다. 송현수는 이도현이 떠올리지 못하는 듯하자 다시 한 번 덧붙였다."아. 있잖아, 그 깨순이 말이야."
"걘 왜 소식이 없냐? 심지어 걔 연락처를 아는 애들도 없어. 동창들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고, 친구들 결혼식에도 참가하지 않고. 완전 사라진 것 같다니까?"
"설마 애들 전부 걔를 깨순이라고 놀려서 아주 숨어 버린 건 아니겠지? 사실 주근깨는 적당이 있으면 귀여운 느낌도 있는데, 걘 너무 많아..."
이도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밥을 먹던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깨순이, 임하늘... 말 한마디 없이 10년을 사라진 여자...
회차 2
임하늘은 병원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 자꾸만 이도현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예전 보다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 합창단이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클럽에서 축하연이 열렸다.
합창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를 맡은 그녀는 민족 음악보다는 대중음악에 더 자신 있었다. 때문에 대회를 앞두고 이도현은 매일 두 시간씩 그녀를 가르쳤다.
그 덕분에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수상을 했다.
그녀가 한껏 꾸미고 이도현에게 줄 선물을 안고 클럽에 도착했을 때, 룸 안에서 들려오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전에 이도현에게 선물했던 바이올린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깨순이가 무슨 돈이 있어서 너한테 바이올린을 사 줬냐? 이거 200만원이 넘는 거 아니냐? "
"뻔하지, 덜 먹고 덜 쓰며, 한푼 두푼 모은 거겠지. 도현아, 깨순이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그냥 한번 만나 줘라."
"덜 먹고 덜 쓰는데 살은 하나도 안 빠지네. 여전히 뚱뚱하잖아. 그리고 도현이가 눈이 삐었냐? 걔랑 사귀게?"
"얼굴에 곰팡이가 낀 그딴 시골뜨기가 우리 도현이와 어울린 다고 생각해? "
그때, 이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평생 잊지 못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깟 바이올린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우리 집엔 그거보다 비싼 것들이 널리고 널렸어. 갖고 싶으면 너 가져."
룸 안이 조용해지더니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사과했다. "어떡해, 도현 오빠.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악기 줄이 끊어진 것 같아. "
송현수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섰다. "괜찮아, 강지안이 우리 도현이한테 선물 한 것도 아닌데 뭘." 야, 신경들 끄고 일단 마시자!"
문 앞에 선 임하늘은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숨이 막혀왔다.
그녀가 한참을 기다렸지만 이도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었고 줄이 끊어진 바이올린은 쓰레기마냥 구석에 버려졌다.
이도현은 부유한 의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 비해 임하늘의 집안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이도현을 이용해 뭔가를 얻으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그 바이올린은 그녀가 가면을 쓰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을 연주 알바를 해 번 돈으로 산 것이다.
한 곡을 연주하면 만원 정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반년 동안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샀다.
하지만 결국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말았다.
도착역을 알리는 지하철 안내 방송에 임하늘은 회상에서 빠져 나왔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이미 눈물 범벅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임하늘은 눈물을 닦아 내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녀는 회사에 들려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는 즉시 부랴부랴 강서구에 있는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
그녀가 귀국한 건 아픈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를 보살펴 드릴 사람이 없었던 터라 그녀는 경시에서 일자리를 구해 할머니를 돌보았다.
그런데 자신까지 병들 줄은 몰랐다.
그녀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을 때, 막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이웃 남재진과 마주쳤다.
키가 큰 남재진은 막 대학원을 졸업한 활발한 청년이었다. "하늘 누나, 오늘 일찍 퇴근하셨네요?"
"응, 재진아. 혹시 이 근처에 한의원 없어?" 임하늘과 남재진이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남재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나, 어디 아프세요?"
임하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 할머니께 보약을 지어 드리려고."
"누나 시간 괜찮으실 때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바로 이 근처에 한집 있어요." 남재진은 임하늘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임하늘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퇴근 후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임하늘이 집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문에 기대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재진이랑 같이 왔어? "
남재진의 집은 아랫층이었고 대각에 위치하고 있었다.
임하늘은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래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할머니는 그녀를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재진이도 참 괜찮은 애야.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 내가 잘 알지. 네가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고등학교 졸업할 때였지? 이제 너도 마냥 어리지만은 않아, 이제 결혼 생각도 해야지."
임하늘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 재진이는 저보다 한참 어려요."
의사가 그랬다. 할머니에게서 치매 조기 증상이 보인다고. 하지만 그녀에게 결혼을 보채는 일은 절대 잊지 않았다.
할머니는 유리병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오늘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이 안에 돌멩이들이 가득한 이 유리병을 발견했다. 네 할아버지가 왜 돌멩이를 모아다가 나한테 준 건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구나. "
유리병을 흘깃 쳐다 본 임하늘은 깜짝 놀랐고 하마터면 손에 든 물잔을 놓칠 뻔했다.
그건 할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이도현이 그녀에게 선물했던 유리병이었다.
회차 3
흔한 돌이 아니었다. 정확히 26개었고 서로 다른 도시의 시청 앞에서 주어 온 돌이었다.
이도현이 그랬다. 그녀가 26살이 되는 해, 그녀와 결혼을 할 것이며 신혼여행으로 그 26개 도시를 한 바퀴 돌자고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어쩌면 이도현은 이미 강지안과 결혼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진작에 그녀를 잊었을 수도 있다.
차라리 잊혀지는 게 나았다. 그와 다시 엮이는 걸 원치 않았고 그녀는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임하늘을 사색에서 끄집어냈다.
회사 상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임하늘은 손에 쥔 병을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네, 부장님."
그녀는 강서구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회사에 인턴으로 출근하고 있었고 지금은 정직원 전환을 앞둔 중요한 시기였다.
"임하늘 씨, <꿈속의 도시> 프로젝트 기획자가 임하늘 씨라고 들었어요. 내일 저희 광고주인 강대표께서 회사에 방문할 예정이니, 빈틈 없이 준비하셔야 합니다."
"네." 임하늘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형편이 그닥 좋지 못했던 탓에 할머니의 병원비는 현재 큰아버지가 내고 있고 생활비는 그녀가 부담하고 있다.
예전에 모아 둔 돈이 조금 있긴 했지만 이제 그녀도 투병 생활을 해야 하니 어깨가 자연히 무거워 질 수 밖에 없었다.
내일 발표인데 오늘 저녁에야 통보를 받았으니, 아무래도 오늘 밤은 꼬박 새워 기획서를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깊은 밤.
문득 이도현이 늦어도 밤 11시에는 자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임하늘은 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왜 또 그 자식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
다음 날 오전, 광고주가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검토하러 온다는 말에 모두가 회의실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 민지영이 초조한 얼굴로 임하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하늘 씨, 준비는 다 됐어요?"
"네."
임하늘은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강대표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아요? 완전 마녀래요. 오직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만 여자여자한 모습을 보인다지 뭐에요?"
임하늘은 선입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나이에 대표가 된 강대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강대표님이 일에 있어 신중하다는 뜻이겠죠."
민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두고 봐요. 곧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부장이 두 사람을 모시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중 한명은 젊어 보이는 여자였고 날씬한 몸매와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장부장은 그 여자에게 상석을 권했다. "강대표님, 이쪽이 바로 저희 <꿈속의 도시> 프로젝트 팀, 팀원들입니다. "
여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강성 그룹 대표 강지안입니다."
임하늘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강지안... 10년 전, 임하늘은 룸 문밖에서 똑똑히 들었다. 이도현과 강지안이 곧 약혼을 할 것이며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결혼 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선 여자가 바로 이도현의 와이프, 강지안이다.
임하늘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눈앞의 여자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장부장은 손짓으로 모두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강지안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쭉 훑어보며 물었다. "임하늘 씨가 어느 분이시죠? "
임하늘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옆에 있던 민지영이 팔꿈치로 그녀를 툭 쳤다. "강대표님이 찾잖아요, 하늘 씨."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임하늘은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강대표님. 제가 임하늘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즉시 시선을 돌렸다.
10년 전, 그녀는 강지안을 만난 적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강지안이 당시에 그녀에 대해 조사를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그녀를 알아보진 못할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임하은이 아니라, 임하늘이다.
임하늘은 속으로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에 놓인 손은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강지안은 임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프로젝트를 훑어보긴 했는데, 기획 의도가 뭔지 알 수 없는 부분이 몇 군데 보이더군요. 그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 주신다면, 이 기획안을 보류하도록 하죠. "
그 순간, 프로젝트 팀원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임하늘을 바라보며 모든 희망을 그녀에게 걸었다.
임하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는 모두 떨쳐내고 프로다운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프로젝트의 모든 부분에 대해 속속들이 숙지하고 있었고, 강지안의 모든 질문에 막힘 없이 설명했다.
최종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 기분이 좋았던 장부장은 팀원들을 이끌고 호텔 레스토랑으로 가 크게 한턱 쐤다.
다만 임하늘은 여전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만약 프로젝트가 통과된다면, 앞으로 강지안과 마주칠 일이 많아 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직서를 제출할 수도 없었다. 어렵게 인턴생활을 마무리 지었는데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임하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 후, 임하늘은 남재진과 함께 동네 한의원으로 향했다.
남재진의 아우디 A4가 의원 입구에 멈춰 섰다. "누나, 여기예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주차하고 바로 갈게요."
"응. 주차하고 문자 줘."
임하늘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한의원답게 어르신들이 많았다. 임하늘은 접수처를 찾아 한참이나 주위를 서성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등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하늘은 즉시 허리를 곧게 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치 슬로우 모션이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도현이었다. 그는 새하얀 의사가운을 입고 있었고 가슴팍에 달린 호주머니에는 6개의 볼펜이 꽂혀져 있었다.
그는 두 손을 가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