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김지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떤 행동을 할 지 예측할 수 없는 납치범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였다. 창문이 깨지며 무장한 요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납치범을 모두 제압하는 데는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요원들의 리더로 보이는 한 남자가 김지완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권 대표님이 반산 별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산 별장에서 권진은 지팡이를 집고 온몸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도 그의 아우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지완이 무사히 돌아온 모습을 보자마자 그의 표정은 한 순간 바뀌었다.
"세상에, 다친 데는 없니? 의사 불러놨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지 뭐니."
김지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찰과상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은 없어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든 죗값을 치르게 할 테니 걱정 말아라." 권진이 말했다.
이번 납치 사건이 권씨 명성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한 김지완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오랜 검진 끝에야 김지완은 가벼운 부상 외에는 크게 다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덕분에 권진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김지원은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쓰러지듯 잠들어 저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에 이어 침실 문이 살짝 열렸다.
그 순간 낯설지만 은은한 향이 방 안의 아로마 향과 섞이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누가 들어왔는지 알고 있었지만 김지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조명을 켜고 애교 있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김지완은 눈을 꼭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곧 이어 침대 위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파고 들었다.
차가운 손에 깜짝 놀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척여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상대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그녀의 등을 잡아 당겼다.
낮에 다쳤던 상처가 건드려지면서 고통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억눌렸던 좌절과 분노가 한 데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지완은 반항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권현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아랑곳 않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제 그만해." 권현석은 나지막이 말했다. "할아버지 연락 받고 왔어. 설마 또 밀당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는 유난히 '또' 라는 말에 힘을 주고 말했다.
목소리로 짐작하건대 권현석은 조금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그는 김지완이 벌였던 일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김지완이 일부러 권진을 이용해 이러한 상황을 의도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이전에 김지완이 한 번 그랬듯 납치 사건도 다르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그녀 몸 위의 멍 자국이 밤하늘의 짙은 어둠 속에 숨겨지며 마음속의 아픔도 함께 덮어진 듯했다. 김지완은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권현석의 눈을 응시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곁으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다면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어요?"
권현석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이번에는 순순히 인정하네. 하지만 당신이 망친 협력 사업 손실은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
김지완은 할 말을 잃었다.
장난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상처와 놀람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협력 중단은 원래 인위적으로 계획한 함정이었다. 그녀야말로 납치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 손실을 부담해야 하는가?
그런데 왠지 권현석은 그 납치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움을 청했을 때 침묵했던 그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권현석에게는 진정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이 사라지는 편을 원했을지도 몰랐다.
김지완은 이런 생각에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요. 그건 제가 이사회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줄 테니까."
"대답? 아마 어떻게 배상할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권현석은 말과 동시에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회차 3
권현석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에게는 사랑의 행위가 마치 화풀이 같았다.
하지만 납치 당했을 때 무심했던 그의 태도를 잊을 수 없던 김지완은 끝까지 피하려 했다.
권현석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김지완, 지금 내 인내심 테스트하는 거야? 그만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김지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김지완은 하체의 아픔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권현석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김지완의 허리를 잡은 다음 애무를 계속했다.
늘 그랬듯 관계가 끝나면 곧바로 떠날 것이라 김지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권현석은 그녀의 머리를 베개 쪽으로 누른 채 또다시 강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조금씩 절정에 도달하려 할 때 그는 입을 열었다. "또 이런 일 생기면 진짜 끝이야."
그의 행위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김지완은 곧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날 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납치범들의 질문이 계속 꿈속에서 쫓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꿈 속에서 김지완은 권현석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납치범은 그녀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렸다.
순간 식은땀을 흘리며 김지완은 잠에 깼다.
베개와 이불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샤워하기 전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그녀는 아침 식사를 한 뒤 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예원 씨, 사무실 정리 다 끝났습니다!"
김지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펴 보았다.
검고 긴 생머리에 우아하게 차려 입은 한 여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늘 권현석의 뒷모습에 가려져 있던 허예원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체 권현석이 저 여자의 어떤 점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호기심이 일었다.
허예원도 김지완의 시선을 느꼈는지 뒤돌아 섰다.
그 순간 김지완은 깨달았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김지완이 밝은 햇빛과 같다면 허예원은 고요한 달빛과 같은 여자였다. 도무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그때 옆에서 동료가 김지완에게 말을 건넸다. "아, 인사하세요. 이쪽은 허예원 씨예요. 예원 씨, 이쪽은 김지완 씨라고 해요."
허예원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반갑게 인사했다. "김지완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방문은 실례 아닌가요, 허예원 씨?" 김지완은 차갑게 대답했다.
비꼬는 말투에 허예원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현석 오빠가 데려왔지 뭐예요. 죄송해요."
하지만 전혀 미안한 말투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라니? 친숙한 표현에 김지완은 심기가 거슬렸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느낀 동료는 바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부로 허예원 씨는 마케팅 부서 부장직으로 오셨어요. 지완 씨와 같은 직책이에요. 다만 권 대표님께서는 예원 씨께 직접 보고를 받을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