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서재헌의 한마디는 윤하진을 1년 전의 추하고 이성을 잃었던 다툼을 떠올리게 했다.
"네가 언제 아이를 갖고, 언제 아이를 낳든… 그때가 되면 바로 이혼해 줄 거야. 아직은 그 빚을 갚지 못했잖아." 서재헌은 금테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리며 말했다. 웃음기 어린 그의 목소리는 은근히 유혹하는 듯 낮고 매끄러웠다. "윤하진,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서재헌은 말을 마치고 떠났다.
윤하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고 마음이 답답했다.
어젯밤 두 어린 소녀가 당시 상황을 다시 이야기해 주었을 때, 윤하진은 서재헌이 분노한 이유가 '몰래 임신하고 몰래 유산했다'는 농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1년 전 그 일을 아직도 원망하고 있었다.
윤하진은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복부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에게 아이 한 명을 빚졌다…
'흥,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한편.
윤하진은 오늘 외래 진료가 잡혀 있었다.
그녀는 복성 병원 심장외과 주임 의사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나이에 이 직책을 맡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과 출중한 전문 실력, 그리고 해외 최고 의과대학 출신이라는 이력을 바탕으로 원장이 직접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스카우트해 왔다.
복성 병원에서 몇 년 사이, 그녀는 실력으로 모든 사람을 납득시켰고, '심장외과 최고의 의사'라는 호칭에 충분히 걸맞았다.
진료실은 의사 한 명당 방 하나씩 이다. 윤하진은 사무용 의자에 앉아 안내 벨을 눌렀고, 방송에서는 기계 소리가 흘러나왔다. "1번 환자분, B1 진료실로 와주세요."
윤하진은 컴퓨터로 1번 환자의 진료 기록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밖에서 한 여자가 들어왔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한 번 쳐다봤다.
윤하진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진료 기록이 없네요. 처음 오신 건가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어린 소녀는 스무 살밖에 안 되었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깊게 파인 브이넥 원피스를 입고 성큼성큼 들어와 의자를 끌어당기고는 윤하진 맞은편에 앉았다.
윤하진은 다시 한번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소녀는 그녀를 오랫동안 응시하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윤하진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재헌 오빠 아기예요."
윤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그 소녀는 클럽 CCTV 영상에서 서재헌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그 여자였다.
클럽에서는 화장이 진해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윤하진의 표정은 점점 더 차분해졌고, 평온하게 말했다. "임신은 산부인과에 가셔야 해요. 여기는 심장외과예요. 제 진료 시간을 낭비하셨네요."
소녀가 웃었다. "아는 척하지 마세요, 윤 선생님. 제가 재헌 오빠 아이를 가졌는데, 아직도 자리 비켜줄 생각이 없으세요?"
'자리를 비켜달라고?'
윤하진은 펜을 돌렸다. 서재헌이 올림픽대로에 몇 년 동안 숨겨 두었던 내연녀조차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했는데, 새로 나타난 이 불륜녀는 제법 당돌했다.
어쩐지 서재헌이 그녀에게 이런 태도를 부릴 수 있는 힘을 실어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고, 내선 전화를 들었다. "김 선생님, 진료 하나 추가해 주세요. 지금 당장 무통 낙태로요. 환자 이름은… 심유나예요."
그때 심유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지더니 벌떡 일어섰다. "윤하진,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제 아기를 죽이려는 거예요? 감히 그렇게 했다간 재헌 오빠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윤하진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힘 센 간호사 두 명 더 보내주세요. 환자가 좀 협조적이지 않네요."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으로 건장한 체격의 간호사 두 명이 들어왔다. "윤 선생님."
심유나는 윤하진이 진심으로 그러는 것을 보고는 분노와 두려움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발을 구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윤하진! 주제넘게 굴지 마요! 당신이 어떻게 재헌 오빠랑 결혼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악랄하고 최악의 년이라고요!"
윤하진은 보온병 뚜껑을 열며 자신의 흰색 의사 가운을 가리켰다. "제가 뭐가 나쁘다는 거죠?"
이어 심유나는 독설을 퍼부었다. "당신 엄마가 재헌 오빠 어머니랑 절친이었다는 걸 이용해서 어릴 때부터 서씨 가문에 붙어 살았죠? 그 비위 맞추느라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제일 어이없는 건 그게 먹혔다는 거예요! 재헌 오빠 어머니가 억지로 재헌 오빠한테 당신이랑 결혼하라고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오빠가 부모를 죽게 만든 재수 없는 당신을 절대 택할 리가 없다고요! 그렇게 오래 독차지했으면 이제 됐잖아요? 이제 재헌 오빠 돌려줘요!"
윤하진은 서두르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게 많네요. 서재헌이 말해준 거예요?"
심유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절대 당신이 재헌 오빠를 계속 망치게 두지 않을 거예요!"
윤하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그녀의 복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까지 그 사람 편을 들고 싶다면, 제가 당신 소원을 이뤄줄 수도 있어요."
심유나는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소원을 이뤄준다는 거예요?"
윤하진은 두 간호사에게 말했다. "심유나 씨를 뒷문을 통해서 산부인과 김 선생님께 데려다 주세요. 그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실 거예요."
그녀는 심유나가 간호사들에게 끌려가면서 욕설을 퍼붓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서재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전화는 끊겼다.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서재헌이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무심한 듯한 억양이 섞여 있었다. "회의 중이야. 3분 안에 말해."
"네 새로 등장한 여자친구가 병원에서 난동을 피우면서 내 업무에 지장을 주고 있어. 빨리 와서 처리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 못 해." 말을 마친 윤하진은 전화를 끊었다. 통화 시간은 고작 30초였다.
아마 자신의 여자가 걱정됐던 모양인지, 회의를 마친 서재헌은 병원으로 향했다. 윤하진은 오전 진료를 모두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와 그를 만났다.
서재헌은 아침과 같은 검은색 정장이었지만, 넥타이를 풀고 단추 두 개를 풀어 셔츠 깃이 살짝 벌어져 날카로운 목젖을 드러냈다.
그가 거기에 앉자, 정장의 단정함과 본래의 제멋대로인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윤하진은 무심코 뒤로 기대며 둘 사이의 거리를 더욱 벌린 후 말했다. "그 여자가 네 아이를 가졌대."
서재헌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표정 변화가 없었고, 금테 안경은 그의 눈빛 속 감정을 숨겼다. 윤하진은 서재헌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 여자 지금 내 손안에 있어."
그제야 서재헌의 눈에 약간의 흥미가 비쳤다. "네가 걔를 가뒀다고? 너 원래 이렇게 간이 컸나?"
윤하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대담한 거라고? 서 도련님이 세상 물정을 모르네.'
그녀가 말했다. "너랑 거래를 하고 싶어."
서재헌은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15분 전에 내 맞은편에 앉아서 나랑 거래했던 계약서가 얼마짜리인지 알아?"
윤하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거래도 굉장히 값어치 있어. 나는 심유나의 아이를 남겨둘 수도 있고, 심지어 내가 낳았다고 말할 수도 있어. 그러면 사생아가 아니게 되고, 부모님께 잘 설명하면 그분들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이건 내가 너에게 아이를 갚는 셈이 되고, 우린 서로 빚을 청산하고 이혼하면 되는 거지."
서재헌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고, 금테 안경 너머 그의 눈빛은 잠시 깊어지더니 금세 흐려졌다. "윤 선생님이 수학자였네. 등가 교환을 이렇게 잘할 줄이야."
윤하진은 그 말이 비꼬는 것인지, 다른 의미인지 따질 생각조차 없었다. 그녀는 시계를 가리키며 차분하게 말했다. "잘 생각해봐. 하지만 너무 오래 끌지 마. 심유나는 이미 수술대 위에 있어. 뱃속의 아이를 살릴지 말지는 전적으로 네 대답에 달려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