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고민훈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은별, 너 미친 거 아냐?"
다만 그의 눈에 들어 온 건 그녀의 뒷모습 뿐이었다.
안방을 나선 김은별은 눈물을 훔치며 복도 끝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 곳은 그녀가 고씨 본가에서의 쓰는 방이다. 고씨 가문의 사모님의 방이 아닌 고씨 본가의 '김집사'의 방이다.
좁고 어두운 방은 햇빛 한 줌 들지 않아 항상 어두컴컴했다.
마치 그녀와 고민훈의 관계처럼 말이다.
김은별은 말없이 캐리어를 꺼내 옷장 속 옷들을 하나씩 담기 시작했다.
다만 옷장 안에 있던 선물 상자 두 개는 따로 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들은 결혼 한 3년 동안, 고민훈 그녀에게 준 선물이다.
첫 번째 선물은 생일에 받았다. 늦은 밤, 그는 위통을 호소하며 오예진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갔고 이튿날 아침이 되어 돌아 온 그는 그녀에게 목걸이 하나를 건넸다.
두 번째 선물은 그녀가 아플 때였다. 고민훈은 고열에 시달리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오예진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나중에 그는 그녀에게 한 쌍의 귀걸이를 선물했다.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두 번의 선물, 전부 오예진을 위해 그녀를 소홀히 했던 것에 대한 보상일 뿐, 진정으로 그녀를 위한 선물이 아니었다.
고민훈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예진임을 진작에 알고 있었던 그녀였다.
김은별은 안간힘을 써서야 괴로운 기억 속에서 벗어 났다.
짐은 이미 다 챙겼다. 그녀는 침대 위에 놓여진 선물 상자를 흘끗 쳐다보고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떠났다.
피곤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생기를 앗아갔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다.
그때,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목소리에는 경멸이 가득 담겨있었다. "언니, 민훈 오빠네 집 하인은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씨 가문의 사모님이 될 언니를 봤으면서 어떻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김은별이 고개를 들었다. 그 곳에는 그녀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오예진, 그리고 오예진의 동생 오예원.
오예진과 오예원은 온 몸에 명품을 두르고 있었고 착용한 액세사리도 전부 고가의 명품이었다.
고민훈은 오씨 자매가 계모에게 학대를 받고 있다고 거듭 말했다. 하지만 김은별은 1도 믿지 않았다.
오예진은 김은별과 시선을 마주했다. 순진한 얼굴에 약간의 난처함이 피어났다. "예원아, 이분은 하인이 아니라 고씨 본가의 집사님이셔."
그녀는 김은별과 고민훈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했다.
적나라한 도발이 틀림 없었다.
오예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집사나 하인이나 뭐가 달라? 다 아랫것들이지!"
캐리어 손잡이를 쥔 김은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 깊이 파고들었다.
"야! 빨리 와서 짐을 옮기지 않고 뭐해? 눈치 없어? 형부한테 말해서 잘라버린다?!"
김은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쉴 때 마다 가슴이 쿡쿡 쑤셨다.
그러나 오예진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입을 열었다. "전 더 이상 고씨 본가의 집사가 아닙니다."
오예진의 청초한 얼굴에 조롱이 스쳤다.
그녀는 또각또각 김은별 앞으로 다가와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렸다.
"김은별씨, 사실 전 상관 없어요. 제가 고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더라도 은별씨는 여전히 김씨 가문의 집사로 일할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여태 하인 노릇을 해왔고 무척 잘 해왔지 않나요?"
김은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지난 3년 간, 오예진은 고민훈의 동생이라는 신분으로 고씨 본가에 드나 들었다. 그녀는 김은별이 고민훈의 와이프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를 하인처럼 부렸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으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김은별은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고민훈을 찾아가 하소연을 해 보았지만 그는 항상 같은 말만 반복했다.
"김은별, 예진이는 아직 어려, 너보다 두살이나 어리다고. 그저 동생이라 생각하고 좀 봐주면 안돼? 예진이는 착한 아이니까, 악의는 없을 거야."
김은별이 빨개진 눈으로 오예진을 응시했다. 그녀가 뭔가 말하려던 그때, 오예진이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김은별,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날 위해 널 아무렇지 않게 버렸어. 어때?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지?"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민훈 오빠는 내거야. 너 설마 민훈 오빠가 정말로 2년 뒤에 나랑 이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쩌면 그때쯤 우리 아이가 다 커서 민훈 오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도 있어."
김은별은 오예진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해 멘탈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고 하지만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싸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예진, 네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계모가 널 괴롭힌다는 거짓말로 고민훈을 속였지? 그 거짓말을 어떻게 숨길지나 고민하는 게 좋을 걸? 그리고 너, 거짓말로 시작 된 결혼이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아?"
오예진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너!"
김은별은 캐리어를 끌고 고씨 저택을 나서느라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걸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예진은 똑똑히 보았다.
오예진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 손으로 자신을 힘껏 밀었다.
김은별이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그녀는 이미 바닥에 쓰러졌다.
오예원은 언니가 바닥에 쓰러진 것을 보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년이! 하인 주제에 감히 우리 언니를 밀어?!"
오예진은 배를 감싸 쥐고 눈물을 글썽였다. "김 아가씨... 전 그냥 아가씨가 본가를 나가면 갈 곳이 없으실 것 같아서 집사로 남으라고 만류했을 뿐인데... 왜... 왜 저를 미시는 거에요?"
김은별은 대체 그녀가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난 밀지 않..."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김은별! 너 지금 예진이한테 무슨 짓이야!"
회차 3
고민훈은 굳은 얼굴로 오예진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진아, 어때?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곁에 서 있던 오예원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김은별을 쳐다보며 거들었다. "민훈 오빠, 오빠네 집 하인 말이에요.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감히 고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을 밀치다니요. 언니를 질투해서 일부러 밀친 게 틀림없어요. 정말 악독한 년이에요!"
오예진은 가련한 눈빛으로 고민훈을 쳐다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펼쳤다. "민훈 오빠, 김 아가씨를 혼내지 마. 김 아가씨도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같은 여자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고민훈은 가슴 아파하며 말했다. "예진아, 왜 이렇게 착한 거야?"
그는 오예진을 안아 들더니 김은별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김은별, 너 진짜 실망이다."
말을 마친 그는 김은별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예진을 안은 채 2층으로 올라갔다.
김은별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고민훈의 차가운 눈빛을 떠올리자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예원은 김은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찮은 년!"
오예원의 욕설을 들은 김은별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 김은별은 오예원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오예원, 가서 네 언니한테 물어봐. 남의 가정 파탄 낸 년이 누군지."
말을 마친 캐리어를 끌고 고씨 저택을 나섰다. 뒤에서 오예원이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름 밤, 폭우가 쏟아졌다.
김은별은 홀로 비를 맞으며 걸었다. 눈물이 빗물과 뒤섞여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김은별은 낡은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여긴 그녀의 부모님이 부자가 되기 전 살았던 곳이다.
돌고 돌아 그녀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 왔다.
김은별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장미진, 그녀의 절친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아악! 미친! 김은별, 뉴스 봤어? 그 년놈들 낯짝은 왜 그렇게 두껍냐?"
자기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알림에 뜬 뉴스를 누르자 기사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고씨 그룹 고민훈 대표, 오예진 디자이너에게 청혼. 하늘을 아름다운 불꽃놀이로 밤하늘을 수놓다.>
'청혼...'
'아직 이혼 서류도 제출하지 않았는데...청혼이라니... 고민훈은 그렇게 급했던 걸까?'
그녀는 화면을 내려 기사에 첨부 된 사진을 확인했다.
마냥 다정해 보이는 청혼 사진, 그러나 김은별의 시선을 끈 것은 밤하늘을 장식한 불꽃이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 쥔 듯 커다란 통증이 밀려왔다.
불꽃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바로 그녀가 자신의 결혼식을 위해 직접 디자인한 바로 그 불꽃놀이었다.
하지만 고민훈은... 그녀의 작품을 다른 여자를 위해 써버렸고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김은별, 고씨 가문의 사모님은 너잖아. 다음 달에 결혼식을 올리고 네 신분을 공개하기로 하지 않았냐? 그런데 왜 갑자기 오예진 더러운 년이 고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거야!"
'신분' 이라는 두 글자에 김은별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그녀가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미진아, 나 고민훈과 이혼할 거야."
정미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혼? 고민훈이 너한테 이혼 하자고 하디? 그 자식이 빌어 먹을 불륜녀, 오예진에게 안주인 자리를 내주려는 게 분명해! 동생이네 마네 가깝게 지낼 때부터 알아 봤어. 설마 그 년놈들이 이미 잔 건 아니겠지?"
김은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도 몰라."
그녀는 정말 몰랐다. 고민훈과 오예진이 어디까지 갔는지.
"솔직히 궁금하지 않아. 미진아, 나 고민훈과 이혼하고 나면 진정한 내 모습을 다시 되찾을 거야. 내게도 꿈이 있어. 두번 다시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며 살지 않을 거고 두번다시 자질구레한 집안일에 빠져 살지 않을거야."
"은별아, 해성시에서 가장 큰 불꽃 디자인 대회가 곧 시작될 거야. 참가해 보는 건 어때? 내가 대신 신청해 줄게! 김은별, 넌 천재 디자이너야! 고민훈 그 쓰레기 곁에서 집사 노릇을 하다니! 그건 재능낭비라고. 이혼 할 거라며?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네 꿈을 쫓아."
정미진은 친구가 남자 하나 때문에 꿈을 포기 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
김은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미진은 오히려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정말? 정말 대회에 참가 할거야?"
김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미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라고, 은별아. 네가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면 고민훈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은 땅을 치며 후회 할거야."
두 사람의 통화는 저녁까지 계속 되었다. 주된 내용은 고민훈을 향한 정미진의 저주와 욕설이었다.
"그 쓰레기 같은 놈은 언젠가 벌을 받게 될 거야..."
통화를 마친 김은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뉴스를 열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그녀의 마음을 찔렀다.
[고민훈과 오예진, 정말 잘 어울리지 않냐?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 이런 걸 천생연분이라고 하는 거야.] [고대표는 돈도 많은데 얼굴도 잘생겼어. 심지어 로맨틱하기까지 해. 그런 고대표와 결혼하다니...전생에 우주를 구했나 봐.]
[오예진이 너무 부러워. 이렇게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다니.]
김은별의 눈물 방울이 휴대폰 화면에 떨어졌다.
마침, 고민훈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김은별, 적당히 해. 그리고 내일 함께 구청에 가야 해. 이혼 서류를 작성 해야 하니까. 1000억 줄게, 그 정도면 보상으로 충분하잖아.]
김은별은 화면에 묻은 눈물을 닦아 내고 문자를 작성했다.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