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 한 남자가 분노 서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침대에 목이 눌린 채로, 고승연은 대담하게 손을 뻗어 그 남자의 복부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손이 닿자마자, 남자의 근육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승연의 손가락이 꽉 다물어진 남자의 입술 위에서 멈췄다. 빨간색 매니큐어가 더욱 선명해 보였다.
"네, 유혹하고 있는 거 맞아요. 그래서, 배현우 씨 생각은 어때요?"
고승연의 목을 누르고 있는 남자는 바로 배현우였다. 그는 그녀의 전남편의 삼촌이었다.
배현우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승연을 옅은 미소로 바라보았다. "내 조카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젠 전남편이잖아요." 고승연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고승연과 배성진의 결혼 생활이 공식적으로 끝난 날이었다.
그녀의 말에 배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고승연의 목을 놓아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한테 관심 없어. 나가."
그 말에 고승연은 재빠르게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배현우 씨, 관심은 말로만 표현하는 게 아니에요.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죠."
고승연의 따뜻한 숨결이 그의 목을 스치자, 배현우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고승연의 손이 다시 그의 복부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몸은 솔직한 것 같은데요, 배현우 씨."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각이었다.
배현우는 고승연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접근하려면 각오해야 할 텐데."
배현우는 잠시 갈등하는 듯하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고승연의 입술을 덮쳤다.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꽃 향기가 그를 감쌌다.
고승연이 입고 있던 옷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배현우가 그녀의 허리를 움켜쥔 순간, 고승연이 그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배현우 씨, 한 가지만 약속해줄 수 있어요?"
배현우의 욕망 가득한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잠시 망설이던 고승연이 자신의 진짜 목적을 털어놓았다.
"말해봐."
그의 목소리에 섞인 미묘한 불쾌감을 느낀 고승연이 그의 목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그를 달래려 했다. "배성진을 배성 그룹 대표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해줘요."
지금, 고승연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해성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씨 가문의 가장이자, 나라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이정도 부탁 쯤이야 그에게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이미 이혼한 마당에 넌 이제 배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배성진한테 손을 대야 하지?"
고승연이 그의 손을 놓으려 하자, 배현우가 말을 이었다. "다른 걸로 해."
"그럼... 내일 밤 연회에서..." 고승연이 그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 그녀의 말을 들은 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모든 걸 잊은 듯 다시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음날 아침, 배현우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마치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만끽한 듯한 느낌이었다.
6년 만에 처음으로 수면제 없이 푹 잠을 잔 날이었다.
무심코 옆으로 몸을 돌린 그는 차가운 베개 위에 놓인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배현우는 무심하게 그 쪽지를 집어 들었다. '배현우 씨, 약속 잊으면 안 돼요!' 문장 끝에는 스마일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체를 본 그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도대체 고승연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배현우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의 비서인 남혁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회차 2
고승연은 호텔에서 나와 교외에 있는 한적한 묘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묘지에 도착한 그녀는 조용히 한 묘비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은 채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예원,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딸의 이름이었다.
"예원아,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
배예원은 심한 심장병을 앓았었다. 그리하여 고승연은 1년 동안 심장 기증자를 기다렸지만, 결국 배성진이 기증자의 심장을 내연녀의 아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통사고로 긴급하게 이식 수술이 필요했던 그 아이를 위해, 배성진은 고승연 몰래 심장 이식 우선권을 포기하는 서류에 서명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배성진의 내연녀의 아들은 살아남았지만, 배예원은 겨우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날, 배예원을 화장하고 집에 돌아온 고승연은 배성진과 내연녀가 그녀가 집에 돌아온 것도 모른 채 뜨겁게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 고승연은 우연히 배성진의 고백을 듣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그저 내연녀의 대체품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고승연과 배성진의 결혼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고, 그녀는 그의 진짜 사랑을 대신할 존재였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딸인 배예원에 대한 사랑마저도 모두 거짓이었다. 배성진은 배예원의 생명을 완전히 외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둘의 이혼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지금까지도 배성진은 배예원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예원아, 엄마가 약속할게. 널 이렇게 만든 사람들한테 엄마가 반드시 복수할 거야."
배성진은 배씨 가문의 둘째 아들인 배종훈의 사생아였다. 배종훈의 지원 덕분에 배성진은 회사에서도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고승연은 배성진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의 뿌리인 배씨 가문부터 흔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배씨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배종훈의 사촌 동생이자, 배성진의 삼촌인 배현우였다.
배현우는 해성시에서도 명망 높은 인물로, 모두의 존경과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승연은 배현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배성진이 가진 모든 걸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지고 차가운 달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는 밤, 한창 배성진의 승진 축하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는 호화로운 연회장에서, 고위 인사들과 유명 인물들이 배성진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배성진 씨, 이사회 투표에서 최고 득표를 하셨다니, 대표 자리는 확정된 거나 다름 없네요! 정말 축하 드립니다."
"맞습니다. 불과 6년 만에 배성 그룹의 대표 자리에 오르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배성진은 그들의 칭찬에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홀 건너편에 서 있는 그의 연인, 김혜성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한편, 우아한 블랙 드레스를 입은 고승연은 아무도 없는 홀 한쪽 구석에서 와인을 홀짝이며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배성진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잃게 되어도 김혜성이 계속해서 그의 곁에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와인을 다 마신 고승연이 잔을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 김혜성이 도발적인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승연 씨, 지금까지 성진 씨 곁에서 내조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렇게 멋진 남자가 됐지 뭐야? 우리 결혼식에도 꼭 참석해 줘."
고승연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세게 틀어쥐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고맙긴. 그냥 쓰레기 옆에 파리가 꼬인 거지."
고승연의 차가운 말에 김혜성은 표정이 순간 굳어졌지만, 이내 차분함을 되찾고 말했다.
"아, 그리고 내 아들을 위해서 심장 기증 포기해 준 거, 정말 고마워. 성진 씨가 왜 당신 딸 대신 내 아들을 살렸는지 알아?" 고승연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김혜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성진 씨한테 우리 신형이가 성진 씨 아들이라고 말했거든."
김혜성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고승연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강렬한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이내 손바닥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깨진 와인잔이 손에 박혀있었다.
그날 연회장에는 경찰 관계자들도 참석해 있었다. 충동적으로 움직였다가는 모든 복수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 일부러 날 자극하려고 이러는 건가?'
고승연은 일단 김혜성을 그냥 두기로 했다. '일단은' 말이다.
회차 3
고승연은 깨져버린 와인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방에서 USB를 꺼냈다.
"여기에 지난 달 배성진이 바람 피우던 장면이 담긴 영상이 있어. 밖에 있는 기자들이 보면 아주 좋아하겠지?"
고승연의 말에 김혜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혹시 집에 몰래 카메라 설치했던 거야?" 김혜성은 혹시라도 자신이 도촬을 당했던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고승연이 팔짱을 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혹시 집에 도둑이라도 들까 봐 설치했던 건데, 뭐 문제라도 있어?"
김혜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연회는 배성진의 승진을 축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여기서 불미스러운 스캔들이 터지면 그녀의 대표 부인 자리도 물 건너 갈 것이 뻔했다.
잠시 고민하던 김혜성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성진 씨랑 함께 지내고, 아이까지 낳았으면서 어떻게 성진 씨 앞길을 망칠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딸 이야기가 나오자, 고승연의 심장은 또다시 찢어질 듯 아파왔다.
"철썩!"
고승연이 김혜성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여자에게 쏠렸다.
고승연이 차분하게 말했다. "미안, 파리 한 마리가 있길래! 안 그래, 김혜성 씨?"
김혜성은 뺨을 감싸 쥔 채 분노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고승연이 들고 있던 USB를 떠올리고는 치욕스러움을 꾹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파리... 정말 파리가 있었네요.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
배성진이 아직 공식적으로 이혼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기에 고승연은 '배성진의 부인' 신분으로 이 연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다시 저마다의 대화로 돌아갔다.
김혜성은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배성진과 결혼하는 즉시, 고승연을 당장 감옥에 처넣겠다고 다짐했다.
"혜성아, 괜찮아?" 배성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김혜성은 상처 받은 표정을 하고는 애써 차분히 대답했다. "괜찮아, 성진 씨. 신경 쓰지 마. 별 일 아니었어."
하지만 배성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승연을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 "고승연,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이제 와서 질투라도 하는 거야?"
'질투? 배성진은 진심으로 내가 질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딸의 수술 날, 배성진은 회사 일이 바쁘다며 병원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그는 병원에 있었다. 배예원이 아닌 김혜성의 아들의 심장 수술을 위해서 말이다.
딸을 화장하던 날, 그는 김혜성과의 밀회를 위해 또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딸의 장례식 날에마저 그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갔고, 고승연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단 한 마디였다. "그래."
고승연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눌러 담으며 대답했다. "어딜 봐서 내가 질투를 한다는 거야? 착각이 심하네."
고승연의 날카로운 말에 배성진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잠시 말을 잃고 시선을 돌렸다. "USB 가져왔어?"
고승연은 묵묵히 USB를 건넸고 그 모습을 보던 김혜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진 씨, 성진 씨가 이걸 가져오라고 한 거야?" 깜짝 놀란 김혜성이 물었다.
"응, 업무 자료가 필요해서 가져오라고 했어." 배성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고승연을 노려보는 김혜성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고승연이 아까 거짓말을 한 거였어? 그럼 뺨도 괜히 맞은 거고?'
김혜성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무대 위로 이사회 임원 한 명이 올라섰다. "여러분, 오늘 밤 임원진 관련 중요한 발표가 있습니다. 배성 그룹의 발전 전략과 개별 성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 배성진 씨를 회사 대표로 승진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배성진 대표님께서 그룹의 전반적인 운영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고, 배성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한편, 와인잔의 파편이 박힌 고승연의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빨간 카펫 위로 떨어진 피는 다행히 눈에 띄지 않았다.
김혜성은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내가 대표님 부인이 될 테니까 아까 때린 그 뺨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각오해."
고승연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부남 꼬셔서 올라간 자리인데, 누가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어두워지는 김혜성의 표정을 무시한 채 고승연은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배현우가 약속을 지키길 바라며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때, 무대로 비서 한 명이 급히 올라가더니 이사회 임원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러자 이사회 임원의 얼굴이 놀란 듯 굳어버렸다. "뭐라고? 배 대표님께서 오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