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강아린은 남자가 도망친 방향을 확인하고 해안의 전망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망대 위에 올라선 그녀는 절벽에서 가볍게 암벽을 타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남자는 표범처럼 날렵하고 민첩한 움직임으로 저격수의 사살을 정확하게 피하고 있었다.
남자가 저격수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려는 순간, 강아린이 날카롭게 외쳤다. "어이, 거기! 총 넘겨!"
저격수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강아린에게 저격소총을 건넸다.
소총을 손에 쥔 강아린은 도망치는 남자의 뒷모습을 조준했다.
남자는 위험을 직감했는지 고개를 돌려 전망대 쪽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강아린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공기를 가르며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그녀는 소총에 달린 망원 조준경을 통해 총알이 남자의 어깨를 관통하며 피가 흩뿌려지는 것을 보았다.
분명히 남자의 심장을 조준했던 강아린은 뜻밖의 결과에 흠칫 놀란 듯했다.
남자는 휘청거렸지만 곧 몸을 바로잡고 쓰러지지 않았다. 강아린은 즉시 노리쇠를 끌어당겨 총알을 재장전 하고 다시 남자를 조준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절벽 끝에 서 있던 남자가 자신의 총을 꺼내 들더니 전망대를 겨누고 있었다. 망원 조준경 너머로 검은 총구가 반짝이는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강아린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옆으로 숙였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뺨에서 전해오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이내 따뜻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이미 절벽의 가장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강아린을 향해 비웃듯 손을 흔들더니, 바위에서 몸을 날려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강아린은 서둘러 전망대에서 내려와 그 바위를 향해 달려갔다.
바위를 타고 올라서 보니 표면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강아린은 한쪽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바위를 살짝 쓸어보았다. 그녀의 손끝에 선명한 빨간 자국이 묻어났다.
"강 교관님."
뒤따라온 병사가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는 재빨리 휴지를 건넸다.
강아린은 휴지로 손끝을 힘껏 문질러 피를 닦아낸 후 그 휴지를 병사에게 던져주었다. "이 혈흔을 분석해서 국제 DNA 데이터베이스에 일치하는 게 있는지 확인해."
"알겠습니다, 교관님."
강아린은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놈을 찾아. 살아 있으면 잡아오고, 죽었으면 시체를 끌고 와."
"네, 알겠습니다."
30분 쯤 지났을까, 강아린은 가면을 벗은 채로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깊은 상처가 선명히 남아있었다.
강아린은 거울을 보며 알코올 솜으로 상처 부위를 조심스레 닦아냈다. 따끔한 통증에 살짝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상처를 소독한 뒤, 강아린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보안 책임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정확히 뭘 훔쳐간 거야?"
"그게... "그게… MK001호 문건입니다, 교관님."
보안 책임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대답했다. MK001호 문건은 훈련소에서 가장 중요한 기밀 문서였다.
"명국, 경성시?"
이곳에선 도시와 국가 이름에 따라 파일명을 정했다. "M"은 국가명인 명국을 의미하고, "K"는 명국의 도시인 경성시를 뜻하며, "001"은 문서의 기밀 순위를 나타내는 숫자였다. "001"이라 함은 극비 수준의 문서라는 뜻이었다.
이 문건에는 악명 높은 711 국제 납치 사건에 대한 상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으로 다수의 특수부대 요원과 용병들이 목숨을 잃었고, 여러 국가가 연루된 민감한 문제였다.
누군가가 암호를 풀고 문서를 열람하기 전에 그 파일을 되찾아야 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위장복을 입은 한 남자가 빠르게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를 본 강아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산 채로 데려왔나? 아니면 시체로 데려왔나?"
"죄송합니다. 찾지 못했습니다."
강아린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그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한 명이 물속에서 잠입해 있다가 구출한 것 같습니다. 놈에게 분명 지원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소대가 놈들이 명국 경성시 방향으로 이동한 해상 경로를 추적했습니다."
정적이 흐르던 방 안에 갑자기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울리자, 강아린이 발신 번호를 확인하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심 이모?"
한편, 서유럽의 한 저택에서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린아, 001호 문건을 도난당했다면서?"
그 말을 들은 강아린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걱정 마세요. 암호를 풀기 전에 제가 되찾을 겁니다."
극비가 담긴 기밀 문서를 반드시 회수해야 했다.
"그럼 네가 명국으로 직접 가는 거야?"
심 이모의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강아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손에 든 전화기를 꼭 쥔 채 잠시 고민에 잠겼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심 이모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강아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제가 직접 명국으로 가서 문서를 되찾아올 겁니다."
"명국에 간 김에 강씨 가문에 좀 머무르는 건 어떠니?"
"이모, 그건..."
"아린아, 강씨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네 가족이야. 다시 잘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해놓을 테니 걱정 말고. 네가 경성 대학 교환학생으로 들어가게끔 마련해 놨어. 강씨 가문에 머무는 게 부담스러우면, 기숙사에 있어도 되고."
"오늘 밤 바로 명국으로 떠날 거예요."
이 말을 끝으로 강아린은 전화를 끊었다.
회차 3
경성 국제공항.
"형,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 거야? 어차피 비행기 타고 오는 건데, 그냥 기사 보냈으면 됐잖아. 우리가 꼭 여기까지 왔어야 했냐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형도 회사에서 할 일이 산더미고, 나도 내 스케줄이 있다고. 우리가.."
"저기 온다." 강대훈이 말했다.
그의 말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강소율이 재빨리 출구 쪽을 돌아봤다.
강대훈은 강아린을 바로 알아봤고, 강아린도 두 사람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강대훈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탑 아이돌인 강소율 역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8월의 경성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이런 더위 속에 두 사람의 차림새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강아린은 두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쳐 갔다.
"야, 강아린!"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강아린의 태도에 화가 난 강소율이 소리쳤다.
그러나 강아린은 멈추기는커녕 더 빨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강대훈이 재빨리 달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난 그만 해, 강아린."
4년 만에 다시 만나는 여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강대훈의 얼굴에는 전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4년 전이었다면 그의 이런 태도에 강아린이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강아린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너 미쳤어? 말 조심해, 강아린!" 강소율이 날을 세우며 맞받아쳤다.
"남한테 큰소리치기 전에 자기 잘못부터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너..."
"강소율!" 강대훈이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보였던 강소율은 강대훈의 제지에 억지로 분을 삼켰다.
두 형제를 지켜보던 강아린이 코웃음을 쳤다.
강소율을 겨우 진정시킨 강대훈이 다시 강아린을 보며 말했다. "차에 타. 할머니가 네가 온다고 우리한테 마중 나오라고 하셨어."
그 말에 강아린의 차가운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용히 근처에 주차된 마이바흐에 올라탔다.
"강아린. 경고하는데, 또 미완이한테 함부로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아야!"
강아린이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강소율은 조수석에 앉아 끊임없이 떠들었다. 강아린이 살짝 눈을 뜨더니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한마디만 더 해봐. 묵사발로 만들어 줄게." 강아린이 강소율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갑작스럽게 머리를 가격당한 강소율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본능적으로 반격하고 싶었지만, 강아린에게 머리카락이 붙잡힌 상태라 이를 악물고 욕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쳇!"
강아린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놓아주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강대훈은 뒷좌석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백미러로 뒤를 흘깃 바라보며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자 뒷좌석에서 강아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쳐다보기만 해. 내가 어떻게 하나."
강대훈은 말문이 막혔다.
조수석에 앉은 강소율은 그 모습을 보고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덧붙였다. "형, 신경 쓰지 마. 쟤는.."
"미쳤다"고 말하려던 강소율은,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침묵 속에서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눈을 뜬 강아린은 두 형제가 먼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차 문을 열었다.
눈 앞에 있는 저택을 바라보는 강아린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있는 듯했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녀는 16살이었다. 이미 특공훈련소의 선임 요원이었던 그녀에게 가족을 추적하는 일 따위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땐 어렸고, 가족이라는 인연에 대해 조금은 기대를 품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강씨 가문은 이른바 '친딸'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를 대신할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훈 오빠, 소율 오빠! 왔어?"
강아린이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누군가가 빠르게 뛰어나왔다. 분홍색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 입은 한 소녀가 강소율에게 달려와 안겼다.
소녀를 껴안은 강소율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랐고, 강대훈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에게 매달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미완은 강아린을 발견하자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강미완은 금세 다시 강아린을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 오신 걸 환영해요, 아린 언니."
"그래, 짝퉁아. 또 만났네."
강미완의 인사에 강아린은 그녀보다 더 화사한 미소로 응답하며 말했다. 강아린의 말을 듣는 순간 강미완의 얼굴이 바로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