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심해준, 너 진짜 한결같이 무정하다!"
방금 전까지 묘하게 흘렀던 기류는 순식간에 살을 에는 듯 차가워졌다.
당하윤은 속마음을 들키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은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오기가 서려 있었다. "안 준다면, 오늘부터 우리 관계는 끝이야. 너랑 난 이제 삼촌과 조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애초에 내 침대로 기어들어온 건 너야.
이제 와서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당하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심해준이 차갑게 비웃었다.
당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했을 때, 당하윤의 아버지 당성훈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투신자살했고, 오빠는 감옥에 갔다.
벼랑 끝에 몰린 당하윤의 어머니는 결국 첩이 되는 길을 택했다. 심해준의 형인 심중유의 내연녀로 밖에서 지내다, 본처가 세상을 떠나고 아이를 임신하면서 심씨 가문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심씨 가문 사람들은 모녀를 싫어하다 못해 혐오했다.
당하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죽은 듯이 피해 다녔지만, 그들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결국 당하윤은 어쩔 수 없이 심해준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유성에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심씨 가문의 실세가 바로 심해준이었으니까.
"그럼 우리 관계는 뭔데? 섹파? 세컨드? 아니면 엔조이…?" 얇은 이불이 당하윤의 어깨에서 스르르 흘러내리자, 조명 아래 백옥 같은 가슴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군침이 돌 만큼 탐스러운 광경이었다.
심해준은 억눌렀던 욕망이 다시 치솟는 것을 느꼈다. 당하윤의 요염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경국지색이란 게 바로 이런 거겠지.
"네가 원하는 다른 걸 말해 봐. 고려는 해 보지." 심해준은 손을 놓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몸뚱이는 여전히 만족스러우니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당하윤은 가슴이 시려왔다. 심해준의 섹스 파트너는 될 수 있어도, 첩 노릇은 할 수 없다. 그것이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심해준, 나 이제 놀 만큼 놀았고 질렸어. 오늘부터 우리 헤어져." 헤어지자는 말조차 민망했다. 심해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연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으니까.
당하윤은 너덜너덜해진 원피스를 끌어당겨 입으며 마음을 굳힌 듯했다.
그 진지한 꼴을 본 심해준이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얼굴이 음산하게 가라앉으며 억누르고 있던 짜증이 배어 나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당하윤은 이불을 걷으려던 손을 멈칫하더니, 불쾌감을 꾹 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섰다. "심 전무님이 제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면, 제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저 딴 남자 찾는 거 방해하지 마시고요."
그 말에 심해준의 이성이 끊어졌다. 그는 당하윤을 확 잡아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매끄러운 다리가 그의 다리에 비벼지며 야릇한 마찰을 일으켰다.
"이 몸뚱이를 나 말고 누가 만족시켜 준다고? 질려? 놀 만큼 놀아? 네가 무슨 낯짝으로 지껄이는 거야. 애초에 주제도 모르고 내 침대로 기어들어온 게 누군지 잊었어?"
당하윤이 발버둥 치며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 " 그래 나야, 근데 지금 후회해! 원서아랑 결혼한다며, 그럼 내가 수절하면서 네 사랑이라도 기다려야 해? 심해준, 내가 뻔뻔하긴 해도 그렇게 싸구려는 아니야!"
분위기가 빙점까지 떨어진 순간,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두 사람의 기세를 꺾었다.
심해준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끊으려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당하윤을 놓고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당하윤은 보았다. 발신자 이름, 원서아.
심해준이 다정하게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 위에서나 가끔 들을 수 있었던 그 목소리에, 당하윤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사서 굴욕을 당하는 걸까.
"금방 가요." 전화를 끊은 심해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옷을 챙겨 입으며 소파에 앉은 당하윤을 흘깃거렸다. "돈은 주 비서 시켜서 입금할 테니까, 떠날 생각 하지 마."
당하윤은 등을 돌린 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떠난 것을 확인하자 자조적인 미소를 짓던 절세미녀의 얼굴에 독한 결의가 떠올랐다.
얻지 못하면 버려야지.
회차 3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인턴십을 시작한 당하윤은 3학년 때 이미 자신만의 작업실을 열었다.
그녀의 전공과도 잘 어울리는 의상 디자인 작업실이었다.
최근 작업실이 계속해서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당하윤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방은 그녀가 유성에서 떠나길 바랐지만,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어젯밤 내내 들볶인 당하윤은 온몸이 쑤시고 아파왔다. 정장이 불편했던 그녀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편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릴 수는 없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당하윤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기... 어머님께서 오셨습니다.
""저희가 막으려고 했지만, 아이를 안고 있어서 아이가 다칠까 봐...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하윤은 직원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진미경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에 이번에 막아도 다음번에 또 찾아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괜찮아, 가서 일 봐. 알겠어.
""네."
그녀의 작업실은 크지 않았지만, 모든 인테리어는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었다. 간결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작업실을 몇 걸음 걷자 휴게실에 앉아 있는 진미경의 모습이 보였다.
진미경은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품에 안은 아이를 달래고 있는 모습이었다. 심천우는 조산아였고, 특히 진미경이 40대 중반의 나이에 임신했기에 두 사람의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미경은 심천우를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당하윤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어머니가 아이를 향해 미소 짓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부드러움이 가득했고, 온몸에서 모성애가 빛을 발했다.
당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 진미경은 현명하고 자상한 아내이자 이해심 많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심천우의 어머니일 뿐이다.
눈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낀 당하윤은 시선을 거두고 감정을 조절한 뒤 휴게실로 향했다.
진미경의 앞에 앉자,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린 직원이 커피 한 잔을 가져다주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커피를 천천히 휘저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오셨어요?"
진미경은 당하윤의 옷차림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 꼴이 그게 뭐니? 니가 지금 심씨 집안 사람인 거 몰라? 네 말과 행동은 심씨 집안의 체면을 대표해!"
소파에 기대앉은 당하윤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당씨예요. 심씨 집안 사람인 적 없어요.
""너!" 진미경은 화가 치밀었지만 품에 안은 심천우를 의식해 화를 억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심 아저씨가 너한테 좋은 사람을 물색해 줬어. 여씨 집안 둘째인데, 내일 옥식방으로 나가. 잊지 말고."
여씨 집안 둘째 도련님은 얼마 전 감옥에서 나온 것 같았다. 심중유는 정말 그녀에게 좋은 사람을 물색해 줬다.
당하윤은 경멸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 없어요."
진미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시간이 없다고? 어제 학교에도 안 가고 작업실에도 안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 밤새 집에도 안 들어오고 클럽에서 싸돌아다녔다던데, 시간이 없다고?"
그녀는 이미 딸이 어젯밤 클럽에서 밤새도록 놀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오늘 당하윤을 찾아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품에 안은 심천우가 졸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딸의 목에 희미하게 드러난 빨간 자국을 발견하고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너 목에 그거 뭐야? 내가 경고하는데, 밖에서 허튼 짓 하고 다니면 다리몽둥이 부러뜨릴 줄 알아!"
당하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태연하게 어머니를 쳐다봤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집안이 몰락한 경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늙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돈이 사람 때깔을 얼마나 좋게 하는지,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밖에서 뒹굴었어. 어쩔 건데? 언제부터 나 신경 썼다고 그래? 이제 와서 엄마 행세 하지 말고, 그 귀한 아들 데리고 당장 나가!"